- 버티에드/버티에디/버티에드워드
- 킹s스피치x청증 크오
그 해 여름은 평균 기온을 훨씬 웃도는 매우 더운 날들이 계속됐다. 그러나 버티에게 그 해 여름은 단순히 더운 날이 아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가에 매달려 커튼을 흔들었고, 붉은 노을이 집안을 집어 삼켰다. 그때 바람과 함께 노을에 물들어 있던 그를 감히 내가 표현 할 수 있을까.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는 아름답다는 말 하나로 부족했다. 그 붉은 입술은 또 어떻고! 곡이 끝나고 천천히 뒤돌아본 그는 입가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는 듯 했다. 버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혹 제가 또 멍청하게 말을 더듬을까 두려웠다.
“아버지의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당신이었군요. 반가워요. 에드워드 브리튼입니다.”
자기소개와 함께 내밀어진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려다본 버티는 금세 후회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거둔 에드워드가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기 때문이다. 머저리, 등신. 차마 그 앞에서 내뱉지 못할 욕을 삼키며 손에 난 땀을 바지춤에 문지른 버티는 에드워드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도 말해야 한다.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러나 입만 열려고 하면 덜덜 떨리는 것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저기.” 버티가 간신히 입을 열었을 때 에드워드가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눈동자가 마치 새벽에 이슬을 담아 둔 것 같았다. 결국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에드워드가 자리를 피하려고 할 때 버티가 간신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놀란 것도 같았다.
“버,버, 버티라고 합니다…”
“본명인가요?”
“…….”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버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적막이 둘 사이를 내리 눌렀다. 이제는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은 버티 자신이었다. 어째서 자신은 이다지도 말솜씨가 없는 것인지 괜히 신이 원망스러웠다.
“뭐…말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죠. 다들 그런 비밀은 하나쯤 있으니까. 버티.”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에드워드를 보고 버티가 황급히 손을 잡았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버티. 라고 불러주는 순간 처음 숨을 내쉬는 아이처럼 버티는 숨을 들이마셨다. 덜컥, 폐부로 깊숙이 들어온 산소들이 마구 가슴을 찔렀다. 아, 큰일이다. 에드워드가 환하게 웃을수록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에드워드가 물었을 때 버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었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놀렸으니 자연스레 말수를 줄였다. 에드워드와의 대화는 즐거웠으나 그는 때때로 버티를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쉴 때가 많았다. 어째 제 얘기만 하는 것 같네요. 에드워드의 말에 버티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좋습니다. 에디를 더…많이 알고 싶거든요.”
“…버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으로 가슴을 훑고 어깨를 지나 뺨을 감쌀 때 버티는 드디어 자신의 심장이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버티가 알고 싶은 것처럼. 저도 버티를 알고 싶어요…근데 저는 버티에 대해 아는 거라곤 아주 잘생긴 남자라는 것뿐이잖아요?”
심지어 본명도 안 알려줘. 새초롬한 눈으로 자신을 힐끔 쳐다본 에드워드가 이내 몸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버티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에드워드는 그게 퍽 마음에 든 눈치였다. 버티, 하고 다시 부르자 그는 네, 하고 대답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내리쬐는 햇빛. 밝게 빛나는 더티 블론드의 머리카락,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 그 입술 사이로 나온 자신의 애칭. 그것은 버티의 여름 중 가장 뜨거웠던 해였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날들이었다.
***
친애하는 당신에게. 로 시작된 편지에 쓰여 진 글씨는 매우 동글동글 했다. 읽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정도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종종 그가 다니는 스쿨로, 혹은 집으로 찾아 갔었고, 그렇게 한해를 보냈다. 편지로는 전해지지 않는 말들이 많았다. 감정들이 많았다. 전할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그가 전쟁에 참가한다고 했을 때 많이도 싸웠으나 그는 확고했고, 나는 말릴 수 없었다. 당신이 그러면 안돼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버티는 결국 항복했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가는 거예요. 그래도 후방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런 편지가 이어졌다.
그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도 버티는 악몽을 꿨다. 사망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오는 꿈을, 그들의 가족이 오열하는 꿈을, 그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가 오는 꿈을. 그 꿈들은 편지가 오지 않았을 때 절정을 치달았다. 하루하루 담배를 입에 물고 살 던 버티는 담배를 끊으라는 치료사의 말에 화를 냈다. 이게 아니면! 그러나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버티는 차마 에드워드에 대해 말 할 수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다시 편지가 왔다. 버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다쳐서 며칠간 편지를 쓰지 못했다. 미안하다. 라는 말로 시작한 편지에는 피가 뚝뚝 묻어있었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전쟁들이 현실로 다가와 그를 덮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에는 희망적인 얘기뿐이었다. 버티가 알 고 싶은 것은 그가 어떻게 얼마나 다쳤냐는 것이었으나 에드워드는 누워 있을 때 천사의 노래를 들었었다. 누나가 나를 치료해 줬다. 누나도 많이 힘들 텐데. 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던 우리들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편지는 점점 짧아졌고, 횟수가 줄었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잘 지내시나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제가 잘 지키고 있다는 뜻이니까.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가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참고 있어요. 아직도 말투 못 고쳤죠? 걱정 말아요. 그래도 당신 목소리는 좋은걸. (중략) 예전에 당신이 그랬죠. 제 머리카락이 정말 부드럽다고, 근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짧게 깎고 제대로 감지도 못해서 푸석푸석해요. 어쩌죠? 제가 돌아갔을 때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할까 겁이나요. (중략) 쓸데없는 소리해서 죄송해요. 정말 이러고 싶지 않은데. 요즘 정신이 없어요. 공습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어요. (중략) 어쩌면 다음 편지는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몰라요. 그래도 기다려 줄래요? 다시 한 번. 당신과 숲속을 걷고 싶어요. 손을 잡고.
그리고 편지는 오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꿈속에서 버티는 에드워드를 만났다. 숲속에서. 맨발로 숲을 걸었는데 전혀 아프지 않았다. 흙을 밟아 더러워지긴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살이 에드워드를 감싸 안았다. 한 발짝 뒤에서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던 버티는 에드워드가 멈춰 서자 같이 멈춰 섰다. 버티.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을 잡는 순간. 버티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티는 분명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강한 남자잖아요?”
“에디…”
“봐요. 제 이름도 이젠 더듬지 않잖아.”
“나는…정말…”
“버티 날 봐요. 제발 나를 봐. 나는 괜찮아요. 당신을 지켰으니. 그러니 버티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울지 말고, 아니 우는 건 괜찮아. 슬퍼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대신 하루 동안 만 크게 슬퍼하고 다음날부턴 슬퍼하지 말아요. 안 그럼…내가 너무 슬프니까. 저를 슬프게 만들 거예요?”
“…알겠어요…”
“버티. 나의 버티. 벌써 울면 어떡해.”
에드워드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버티는 이내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아이 같아 에드워드가 눈을 꼭 감았다. 버티 그렇게 울면 제가 못가잖아요. 에드워드의 말에 버티가 고개를 들었다. 가요? 어딜? 버티의 물음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버티, 알고 있잖아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버티.”
“제 고집이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말이라도, 그렇다고 해줄 수 있는 거잖아요. 에디.”
“…안 돼요.”
“에드워드.”
버티가 애원했다. 붙잡힌 손목을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아래서부터 서서히 사라지는 에드워드를 보며 버티가 비명을 질렀다. 가지 말아요, 제발. 끌어안아도, 애원해도 그는 점차 사라졌다. 붙잡은 손끝도 얼굴을 묻었던 젖은 어깨도, 희미한 빛이 그 자리를 맴돌았다.
“사랑해요. 버티.”
전보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