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크래프트지라 인쇄하면 누런 색이 들어갑니다.
사망소재/스토리 날조가 들어갑니다.
E중대가 전멸하던 날 리즈가 아니라 프리드리히가 대신 죽고서 리즈가 시간을 되돌린다는 이야기 입니다.
책에는 글꼴,문단 편집이 들어가있습니다.
1
프리드리히가 죽었다.
베른하르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프리드리히의 묘 앞에 서더니 무너졌다. 그리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었다. 리즈는 그때 베른하르트가 탈수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몹시도 부러운 일이었다. 리즈는 죽고 싶었다. 온몸을 불살라 그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리즈의 불꽃은 자신을 태우지 못한다.
프리드리히의 장례식에는 사람이 많았다. 정확히는 E중대의 장례식이었다. 지금껏 전례 없는 사상자가 나왔다. E중대의 전멸은 레지먼트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 리즈도 그 레지먼트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리즈는 레지먼트가 아닌 프리드리히만을 보고 있었다. 인파 속을 느릿느릿하게 걸어가 베른하르트를 지나쳐 프리드리히 앞에 선 리즈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때문에 리즈는 울지 못했다. 죽은 이에 대한 슬픔으로 오열하는 이들을 달래줄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리즈는 없었다. 리즈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죽지 마, 죽지 마. 프리드리히!
* * *
“알고 있었지 미리안. 프리드리히가 죽으러 가는 거. 알고서도 말 안 했지.”
리즈가 미리안의 멱살을 잡고서 으르렁거렸다. 미리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장례식이었다, 프리드리히 말고도 죽은 동료는 많았다. 그런데도!
“프리드리히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건 그도 동의한 작전이야.”
거짓말이다.
“네가 반대할 테니까.”
거짓말이다. 프리드리히는 리즈를 혼자 두고 죽을 녀석이 아니었다.
“리즈 넌 레지먼트의 중심이다. 네가 쉽게 죽어선 안 돼.”
“그 말은…”
리즈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껏 프리드리히가 해온 행동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놈은 자길 희생해서라도 남을 구하고 싶었다. 천성이 그랬다. 리즈의 안위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 말은 네가 동료들을 사지로 보냈단 말이냐?”
“…정확히는 상부의 지시였지.”
미리안!! 리즈가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렸다.
“희생은 불가피해.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건 당연한 거야.”
“프리드리히는 너를 동료라고 생각했어.”
“프리드리히도 동의했던 일이지.”
“그래도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이야.”
“……”
미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즈의 손을 힘으로 떼어낸 후 등을 돌렸다.
“E중대로 복귀 준비하도록 해.”
0
“프리드리히. 너 나 좋아하냐?”
먼저 고백한 건 리즈였다. 프리드리히 놈이 하도 저를 좋아한다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리즈는 하는 수 없지 저 키만 산만한 놈을 연병장 구석까지 친절하게 불러냈다. 다른 이들과 있을 때는 안 그러던 놈이 제 앞에만 서면 뻣뻣하게 굳어서는 말을 못했다. 특히 단둘이 있을 때 더욱 그랬다. 리즈는 제가 프리드리히를 추운 연병장 구석에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옷단장을 하고 나왔다. 머리에 왁스 칠도 했다. 물론, 신발도 광나게 닦았다. 무슨 바람이 분건지는 몰라도 일단 저 좋다는 놈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지 않은가. 리즈가 툭 내뱉은 말에 프리드리히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렇겠지. 리즈는 아량이 넓은 선배였다. 그것이 프리드리히에게만 그렇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리즈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팔짱을 끼곤 말했다.
“내가 그렇게 좋다면 사…”
“네?! 아닌데요!!”
……귀어 줄 수도 있다. 리즈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프리드리히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두 손을 뻗고는 아니라고 마구 저어댔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손목을 분질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는 리즈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하늘을 봤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따, 딱히 선배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멋있고 잘생기긴 했지만요…우린 남자고… 그날 프리드리히는 발바닥에 땀 나도록 연병장을 달렸다. 비가 오고 나서야 겨우 달리기를 멈춘 프리드리히는 저를 보더니 홱 돌아 가버리는 리즈를 보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 위로 비가 툭툭 떨어졌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얼마 후 한밤중 리즈의 방에 누군가 찾아왔다. 레지먼트 내부에서 리즈의 방에 멋대로 찾아올 수 있는 이는 몇 없었다. 특히나 이런 시간에, 은밀하게 찾아오는 이는 손에 꼽았다. 리즈는 생각을 멈추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쾅! 쾅쾅! 발로 차는 것도 같았다. 절대 은밀하게는 아니었다. 리즈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문을 홱 열었다. 문을 두드리던 이는 제 몸 하나 지탱도 하지 못한 채 앞으로 꼬꾸라지려고 했고, 리즈는 그의 멱살을 잡아 제 방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꼴사납게 나뒹군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리즈를 돌아봤다.
“바로 서. 프리드리히.”
엄한 목소리에도 프리드리히는 몸을 가눌 줄 몰랐다. 얼씨구. 리즈는 일어서다 그대로 무릎을 찧고 넘어지는 프리드리히를 보며 혀를 찼다. 술은 또 어디서 구해 마신건지. 구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만, 아직 신입인 프리드리히가 술을 쉽게 마실 순 없었다. 보나 마나 뻔했다. 또 버티 영감탱이가 신입 몇을 데리고 한바탕 재롱잔치를 한 모양이다. 프리드리히는 신입 중에서도 눈에 띄었고, 본인 역시 노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으니 그런 자리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술도 있었겠고. 침대에 기대 이마를 쓸어 올리던 프리드리히가 무릎을 짚고 비틀비틀 섰다. 리즈 선배…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있던 리즈는 제 허리에 머리를 처박는 프리드리히를 보고만 있었다. “선배 좋아해…” 진짜 뭐하는 놈일까. 프리드리히는 리즈의 배에 얼굴을 한참이나 비비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도 나 좋아하지. 그러더니 제 바지를 홱 벗기려는 게 아닌가. 겨우 바지춤을 잡고 프리드리히를 밀쳐낸 리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냐? 취해도 단단히 취한 게 틀림없었다.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곱게 하는 법도 몰랐고, 심지어 상대는 얼마 전 제 고백을 뻥 차버린 건방진 후배 아닌가. 제게 개 쪽을 줘놓고,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리즈가 프리드리히를 툭 쳤다. 야. 일어나. 여기서 자지 마.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 나 싫어해? 혀가 꼬여가지고 발음이 아주 제 멋대로였다. 리즈는 프리드리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날 뻥 차 버린 놈이 누군데, 누굴 싫어해?”
리즈는 프리드리히의 옷을 단단히 입힌 후에 팔을 어깨에 걸치고는 몸을 들어 올렸다. 키는 큰데 뼈밖에 없는 건지 생각보다 가벼웠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정신일 때의 기준이었고, 프리드리히는 술에 취해있었으므로 리즈가 아무리 힘이 세고 이능을 가졌다지만 술에 취한 다 큰 사내를 혼자 방까지 데려다주긴 무리였다. 이 녀석 형을 부를까…이름이 베른하르…
“그건 선배가 너무 무드없게 연병장에서…”
그 후로 리즈는 프리드리히를 철저히 무시해왔다. 무시라고 해봤자 식사시간이나 자유 시간에 인사해오는 프리드리히를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다였다. 부대가 다르니까 만날 일도 별로 없었는데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예전처럼 인사는 받아주겠지만 웃고 떠드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리즈가 싫었다.
“그래서 술 먹고 고백하는 건 무드 있고?”
“싫어요?”
싫지 않았다. 리즈는 거절당하고 난 후에도 프리드리히를 여전히 좋아했다. 그저, 이런 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리즈도 프리드리히도 어린애가 아니었기에 야밤에 술 먹고 남의 방까지 찾아와 고백하는 것이 단순히 사귀자라는 의미만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리즈는 짧게 키스한 후에 입을 닦아냈다. 프리드리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랑 키스하는 게 싫어요? 싫을 리가 없었지만 리즈는 그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건방지기도 했고, 무드 타령을 하던 녀석이 입에 술 냄새를 잔뜩 묻히고 달려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격 같았으면 당장 욕실에 처박아 이를 닦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프리드리히니까 참았다. 리즈는 우악스럽게 프리드리히의 옷을 벗겨냈다. 단추는 거의 다 풀려 있어서 어렵지도 않았다. 손길 자체가 투박했다. 프리드리히가 하나뿐인 셔츠라고 투덜거렸다. 그럼 다른 걸 입고 왔어야지. 리즈의 말에 프리드리히가 손가락 틈 사이로 리즈를 힐끔 보며 말했다.
“설마 선배가 덮칠 줄은 몰랐어…”
“덮쳐? 네가 내 바지 벗기려던 건 뭔데?”
“그건 그거고…”
“시끄러워.”
바지를 쑥 벗기자 프리드리히가 몸을 덜덜 떨었다. 춥냐? 리즈가 묻자 프리드리히가 큰소리를 냈다. 선배 진짜 무드없다. 처음 하니까 떨리는 거잖아. 프리드리히가 몸을 일으켜 입을 맞췄다. 저만 홀라당 벗겨놓고선 자긴 하나도 벗지 않는 손놀림이 과연 에이스다. 프리드리히의 칭찬에 리즈가 벗어주랴? 하며 윗옷을 벗어젖혔다. 애초에 리즈는 거의 벗고 있었기에 프리드리히가 벗기려고 들지도 않았다. 선배 진짜 에이스네, 프리드리히가 리즈의 몸을 보고 말했다. 술 먹고 노는 누구랑은 다르니까. 리즈가 다시 한번 프리드리히의 입술을 덮쳤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눈을 떴다. 숨을 헐떡인 리즈가 주변을 살폈다. 하늘은 푸르렀고, 연병장은 모래바람이 휘날렸다. 간간이 풀꽃이 피기도 했다. 리즈는 이날을 알고 있다. 어째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는? 죽은 후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아팠다. 분명 그 후의 기억이 있었다. 리즈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지나가던 동료가 안색이 나쁘다고 물었다. 리즈는 웃을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에 제 불꽃에 휘말려 죽은 이였다. 리즈는 도망치듯 그의 손길을 뿌리치곤 기숙사 뒤쪽으로 달려갔다. 아, 여기는. 리즈는 혹시나 하면서도 기대를 했다. “프리드리히.” 그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프리드리히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날 프리드리히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었고, 그걸 리즈에게 들켜서. 그래서…
“어……에이스…”
프리드리히는 그때까지 리즈의 이름도 몰랐다.
이건 기적이란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시간은 대략 10년 전이었다. 리즈는 죽은 후의 기억을 찾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는데 그 부분만 잘라놓은 것처럼 텅 비었다. 프리드리히는 무슨 생각을 하냐며 물었지만, 고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즈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프리드리히의 뒤통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친해지는 건 쉬웠다. 다시 연인 관계가 되는 것도 쉬웠다. 리즈는 제 고백을 뻥 차버린 후에 돌아가려는 프리드리히의 앞을 막아섰다. 예전엔 분명 연병장을 돌라고 시켰었지. 대신 리즈는 프리드리히에게 말했다.
“좋아한다.” 프리드리히는 그 말에 우뚝 멈춰 서더니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얌전해졌다. 키스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진득한 키스였다. 이제 프리드리히에게 리즈와의 키스는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바뀐 미래에서도 프리드리히는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분명 프리드리히가 뛰어들기 전에 리즈가 발견해 머저리 하나를 구해냈건만 프리드리히가 후퇴하는 쪽에 괴물이 또 튀어나왔다. 리즈는 베른하르트에 의해서 살아난 프리드리히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마에 깊게 남은 상처가 있었다. 리즈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안다. 이대로 간다면 이야기는 똑같이 끝날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럴수 없었다. 프리드리히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너 B중대로 와라.”
프리드리히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럴 만 했다. 이미 B중대는 한번 전멸한 뒤였다. 리즈는 프리드리히가 대답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상처받을 거라는 것도 알고. 그래도 위험하게 두는 것보다는 옆에서 두고 지키는 게 나았다.
“B중대?”
“싫어?”
“싫다고 하면 선배가 그냥 둬?”
아니지. 리즈가 프리드리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말랑말랑했다. 아직은 어렸다. 아직은 멀었다. 프리드리히가 죽는 건 적어도 오 년 후였다. 그래도 초조했다. 미래는 바뀔 수 있다. 그렇기에 프리드리히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허가할 수 없다. 지금 소꿉장난하러 왔나?”
방에서 쫓겨나듯 나오는 리즈를 보며 프리드리히가 웃었다. 안된다고 했잖아. 왜 고집을 부려요? 리즈는 프리드리히의 말은 듣지도 않고서 저벅저벅 걸어갔다. 베티 영감탱이 놈은 프리드리히를 아끼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아직 계획이 실행되지 않았나? 아니다. 디아이는 보통 몇 년, 또는 수십 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제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던 놈이었다. 그런 디아이의 작전을 아직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먼저 전멸한 B중대가 남긴 흔적을 토대로…
“선배?”
희생은 불가피하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래왔다. 프리드히는 몰랐을까. 미리안은 프리드리히 역시 작전을 알고 있다고 했다. 소대장쯤 되는 녀석이 몰랐을까. 부하들을 다 죽이러 가는 길이 될 터였다. 인원도 전력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녀석들이 맞닥뜨린 건 불을 뿜는 거대한 용이었을 것이다. 순식간이었겠지. 고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공포감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리즈는 제 검에 불꽃을 일으켰다. 프리드리히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죽기 전의 기억이 리즈에겐 그대로 있었다. 불꽃을 쓰는 것도 처음에만 힘들었지 나중에도 리즈를 능가할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리즈는 레지먼트가 붕괴할 때까지 영원한 에이스였다. 그런 자신이 지금부터 작전을 짠다면. 코어가 두 개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작전이다. 지금의 기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무슨 수를 써야 프리드리히가 살 수 있는가. 포기했을까? 프리드리히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베른하르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녀석이라면 프리드리히를 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그랬을 것이고. 그러나 프리드리히 본인은 달랐다. 너무도 쉽게 목숨을 내놓았다. 프리드리히가 목숨을 버리려고 할 때는 보통 누군가 위험에 처했거나. 버릴 수 없었을 때였다. 중대를 버리진 못했겠지. 못했을 것이다. 안다고 해도 혼자서 빠져나갈 녀석이 아니었다. 다 같이 도망치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레지먼트에는 베른하르트가 있다. 하나뿐인 형제…
생각이 뒤섞일수록 리즈의 불꽃은 크게 일렁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프리드리히의 마음속까지 알 수는 없었다. 리즈는 프리드리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이름. 나이. 키. 고향. 가족 혹은 쌍둥이 형에 대한 일들. 겨우 그 정도. 리즈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오 년. 짧은지 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가 없는 십 년 보다는 짧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프리드리히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이제 진정됐어? 물어보는 것에 리즈는 팔을 쭉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하늘은 푸르고, 프리드리히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제는 안다.
“프리드리히 너…휴가 언제냐.”
리즈가 멋쩍게 물었다. 프리드리히는 속으로 날짜를 세어보고는 열흘 후라고 말했다. 아마 맞을 거야. 프리드리히의 말에 리즈가 투덜거렸다. 아마가 뭐야. 아마가. 사실 지금 같은 시기에 휴가가 있는 것도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사람만 가능했다. 프리드리히 혼자 E중대에 남겨 놓는 건 힘들었지만 같은 중대일수록 휴가가 겹치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때 시간 비워둬.”
“그날은 베른…”
“데이트하자.”
“…하…르트……”
“괜찮지?”
“비워놓을게요.”
프리드리히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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