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크래프트지라 인쇄하면 누런 색이 들어갑니다.
7월 15일 일요일 오락관 B1 입니다~
책에는 글꼴,문단 편집이 들어가있습니다.
19금 아닙니다 ㅠㅠ
겨울이 되면 허크는 헤기에게 품을 자주 내어주곤 했다. 천성이 도련님이라 그런지 차가운 바닥이나 딱딱한 의자에 앉지 못해 항상 그의 허벅다리 위나 품에 폭 안겨 있었는데 사실 허크의 옷도 특별히 부드럽거나 따뜻하지 않았다. 딱딱한 쇠로 된 갑옷이 몇 겹이나 싸고 있었고, 움직이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바지 위에도 단단한 가죽 벨트가 꽁꽁 싸매고 있어서 앉으면 꼭 말 못 할 곳이 아파 보였는데도 헤기는 잘만 앉아 있었다. 어쩜 저리 품이 딱 맞는지 종종 의구심이 들기도 했는데 잘 보니 헤기가 허크의 품에 맞는 게 아니라 허크가 헤기에게 맞춰주는 것이었다. 춥다고 하면 몸을 더 끌어안아 주고 엉덩이가 아프다고 하면 손을 받쳐주었다. 정말 지극정성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지만 그보다 심했다. 헤기는 그의 품에서 대부분 잠을 청하거나 책을 읽곤 했다. 가끔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며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으면 허크가 픽 웃고는 헤기의 정수리에 턱을 툭 얹고 고개를 삐딱하게 숙인다. 이건 뭐라고 읽냐. 허크가 책 위를 커다란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키며 묻는다. 그러면 헤기는 또 열심히 설명해준다. 궁금해서 물어본 것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한들 허크가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헤기는 신이 나서 손짓, 발짓 다 써가며 가르쳐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군다. 허크는 종종 헤기가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가져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애가 애들을 가르친다니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이다.
“리플렉스라는 회복마법이에요. 그중에서도 상급 마법인데 시전자에게도 리스크가 큰 마법이라 잘 사용하지 않아요.”
흐음. 허크는 읽지도 못하는 마법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커다란 마법진과 꼬불꼬불한 글씨들이 요란하게 페이지를 꽉꽉 채우고 있었다.
“어떤 리스크인데?”
헤기가 읽고 있던 마법서에서 눈을 떼곤 허크를 올려다봤다. 곤란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혀로 입술을 축축이 적셨다. 설명하자면 긴데…. 허크는 상관없다는 듯 헤기를 품 안으로 꽉 끌어당겼다. 어차피 오늘은 종일 대기 상태일 거고, 전장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없다. 훈련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거나. 낡은 마법서의 책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내리던 헤기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천천히 목소리를 내었다.
“모든 마법은 시전자의 정신력에 비례해요. 정신이 곧고 단단한 사람일수록 마법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죠. 하지만 정신력이라는 것도 결국 소모되는 에너지라 한계가 찾아와요. 강력한 마법을 쓸수록, 위험한 마법을 쓸수록 소모가 빠르죠. 정신력을 모두 소모한 마법사가 쓸 수 있는 다른 힘이 생명력인데 보통 생명력을 소모해서 시전하는 마법은 정해져 있어요, 저주나 소환. 혹은 소생술 같은 것.”
최악의, 아주 최악의 상황에나 쓸법한 것들이죠. 헤기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별다른 호응은 없었다. 헤기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리플렉스는 시전자의 생명력을 대가로 타인의 생명력을 끌어올리는 힘이에요. 마법사가 괜히 체력이 좋아야 하는 게 아니란 소리죠.”
남 구하다가 제가 쓰러지면 안 되잖아요? 허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허크가 지켜줄 거니까 쓸 일 없을 거고, 그러니까 얼굴 펴요.”
헤기의 손이 허크의 뺨에 닿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허크는 닿은 헤기의 손에 살짝 입을 맞추곤 말했다.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허크는 모른다. 다만 헤기의 미소에 잠깐이나마 파도처럼 밀려왔던 걱정과 근심들이 모두 부서져 내렸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은 유한하여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견딜 수 없을 것만 같던 상처도 살아있다 보면 낫는다. 잊을 수 없는 기억도 어느샌가 흐릿하여 미련인지 아쉬움인지도 모를 감정만 끈적하게 고여있었다. 허크는 저를 거둬줬던 대장장이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떠올린다고 한들 그의 얼굴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마는 반듯했고 눈은 게슴츠레했던가? 코는 크고 입은 늘 웃고 있었다. 웃고 있었나? 그래도 은인이고 부모와 같은 사람인데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허크는 피투성이 대검을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고는 눈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엔 이 친구도 잊게 될 것이다. 얼굴조차, 후에는 이름조차 헷갈릴지도 모른다. 그때 죽은 녀석이 누구랬지? 하고 술 한 잔 하면서 떠올릴지도 모르는 녀석이다. 그렇게 수없이 되뇌고 되뇌어봐도 당장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엔 부족했다. 콜헨에서 한 해를 보내며 같이 다닌 녀석이 있다. 덩치는 저와 비슷했고 방패와 검을 썼다. 용병 주제에 목숨을 사리는 녀석이라 그만두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다. 녀석은 그럴 때마다 목숨을 소중히 하기 때문에 너와 술을 마시고 있지 않으냐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댔다. 그게 썩 싫지 않아서 어울리기를 한해. 대장 역시 녀석을 좋아했다. 용병단에서 더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좋은 성격이었다. 검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좋아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좋아한다. 용병단에 처음 노름판을 펼친 것도 더그 녀석이다. 종종 술에 취해 모험담을 늘어놓던 녀석이었다. 별들을 따라 숲을 걷다 보면 커다란 놀 종족과 마주칠 때도 있고, 아름다운 엘프들과 마주칠 때도 있다며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책을 집필할 거라 말했다. 글도 쓸 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나는 그게 재밌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 녀석이었다.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기억할 만 한 추억도 없는 녀석.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눈을 녹인 물을 뜨겁게 끓였다. 반은 마시는 데 사용했고, 반은 남은 천을 푹 담가 수건으로 썼다.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자 앓는 듯한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아아…으…. 그새 더 마른 몸을 닦아내는 건 썩 즐겁지 않았다. 밥은 먹냐는 질문을 이제는 쉽게 툭 던질 수 없었다. 누구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는지 뻔히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신의 말이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껏 허크의 말에 상처 입은 이들은 별로 없었다. 다들 원래 저런 놈인가보다 하고 웃어넘기거나 무시했고, 용병들 대부분이 말투가 험악했기 때문이다. 제 말투가 곱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건 허크가 살아오면서, 살아남기 위해서 터득했던 것들이었고 쉽게 고쳐질 것들이 아니었다. 허나 고치고 싶은 상대가 나타났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쏙 들어간 마른 배까지 닦아주고선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러면 허크가 춥잖아요….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난 안쪽에 두 겹이나 더 입어서 괜찮으니까 덮고 있어. 허크의 말에 헤기는 고개만 푹 파묻었다. 두꺼운 가죽옷이 찬 공기를 막아주니 아까보다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허크가 입고 있는 건 별로 안 두꺼워 보이는데. 헤기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허크는 신발을 벗기곤, 엉덩이를 들어 보라고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엉덩이를 쑥 들어 올린 헤기는 순식간에 벗겨진 바지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속옷까지 벗기려나 싶어 엉덩이에 힘을 주고 있자 허크가 긴장하지 말라며 발목을 잡아 왔다. 따뜻한 물기를 머금은 천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헤기는 겉옷만 꼭 쥐고는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말랑말랑한 종아리를 어루만지던 손이 오금 아래로 들어갔다. 하얗고 동그란 무릎뼈를 지나쳐 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들어오자 헤기가 어깨를 움츠렸다. 분명 멀리 있던 허크가 숨을 나눌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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