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x에그시x빌런해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벼랑 끝에서 잡은 손이 사랑일 리가 없지.
[아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서 빨리 본부로 와주시죠]
에그시가 샌드위치 포장지와 싸우고 있는 동안 멀린의 메시지를 받은 해리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리도 불친절한 호출이라니. 에그시가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살짝 베어 먹으며 살살 해리의 눈치를 봤다. 그런 에그시를 보지 못한 건지 해리는 제 방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한 수트로 갈아입고 나왔다. 이미 샌드위치를 모두 삼킨 에그시가 주스를 홀짝이며 해리가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호출이에요?”
“그래. 금방 다녀오마.”
가운을 입고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에그시에게 고개를 숙여 키스한 해리가 말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이 사뭇 진지해 에그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어차피 갈 데도 없네요.”
그래 이것이 현실이다.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도, 희망이라 여겼던 그와의 도피도 모두 꿈이었다. 에그시는 그것을 구분할 줄 아는 아이였고, 생각보다 포기가 빨랐다. 꿈과 현실을 혼동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멀어지는 해리에게 손을 흔들고는 이내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에그시는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멍청이가 아니라고 해서, 포기가 빠르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멀린 정말 여기가 맞아요?”
에그시는 한 손에는 샴페인 잔을 쥐고서 물었다. 한숨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래] 갑작스레 주어진 임무는 어느 귀족의 파티에 잠입하라는 것이었다. 타겟도, 목표도 말해주지 않고서 에그시를 밀어 넣은 멀린은 단 한마디만 했다. “아서의 명령이다.” 해리 하트.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그날 아침 집을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또 무슨 일에 휘말린 걸까 걱정도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기에 에그시는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그보다 제 일이 먼저였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꽉 찬 홀에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깔렸다. 어쩌면 멀린이 자신에게 휴가를 준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해리가 매너를 좀 더 배우고 오라며 준 기회일지도 모르고, 에그시는 구석에 몸을 기대며 주변을 살폈다. 평화로운 곳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실 줄 몰랐고, 샴페인 맛도 아주 훌륭했으며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땀을 녹였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에그시가 고개를 돌렸다.
“shit…”
그것은 분명 해리 하트였다. 그래, 그럼 그렇지 그는 이런 곳에 자신을 혼자 보낼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어떠한 경우든 간에 그랬다.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눈이 마주쳤다는 게 착각이길 빌며 사람들 틈에 섞여 홀을 빠져나왔다.
긴 복도가 이어졌다. 대리석 바닥 위로 두 개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복도 끝의 문을 딴 에그시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Lucky!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해리가 저를 뒤따라오는 이유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확실한 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찰칵. 문이 다시 열렸다. 분명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에그시는 등 뒤에서 다가오는 커다란 열기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에그시.”
오, 해리. 등을 끌어안으며 뒷덜미를 깨문 해리 덕분에 에그시는 자신이 통신을 끄지 않았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잊었다. 재킷 안으로 들어온 손이 가슴 위를 지분거렸다. fucking 해리. 바짝 밀착한 몸을 꽉 끌어안은 그 때문에 몸을 돌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얼굴을 보여줘요. 벌써 며칠째란 말야. 에그시의 칭얼거림에 그가 고개만 살짝 돌려 에그시의 뺨에 키스했다.
“왜 그래요, 해, 읏…리…”
오늘따라 지나치게 다정한 것 같은데. 뒷말을 삼킨 에그시가 천천히 입을 벌리곤 그의 입술을 탐했다. 질척하게 얽혀오는 혀와 달리 손은 빠르게 에그시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면 물러날수록 버티기 힘들어 결국 뒤로 넘어졌을 때야 에그시는 그가 자신을 침대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렁거리는 침대 위에 잔뜩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흥분하는 그가 있었다. 에그시는 스스로 손을 뻗어 넥타이를 잡아 코앞까지 당겼다.
이마 끝에 길게 이어진 상처를 더듬었다.
“갑자기 이러면 당신이라도 조금, 무서운 거 알아요?”
마치 다른 사람 같아서.
아. 그제야 에그시는 눈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방에 깔린 감시카메라도, 침대 밑에 들어있을 도청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멀린까지. “왜 그러니. 에그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고 있는 해리 하트까지. 아니 가짜의 모습까지. 모두.
“…….”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정하게 물어보는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에그시는 안경을 벗어 던지곤 신음했다. 씨발, 씨발…젠장. 빌어먹을. 자신은 지금 시험에 들고 있다. 눈앞에 가짜를 죽이라고 그들이 자신을 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이다. 멀린, 믿었는데. 에그시는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을 입속에 눌러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물러나 주었고, 우습게도 나란히 침대 위에 앉는 꼴이 되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려고 하는 그를 붙잡고 다시 앉혔다. 에그시는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어깨 위로 느껴지는 감촉에 고개를 들었다. “에그시.” 그가 에그시의 어깨를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슬픈 표정은 짓지 말아 주렴.”
“…….”
“네가 울면 난 초조해져.”
에그시의 손이 허공에 머무르다 살짝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당신은 왜 날 찾아왔어요?”
마주 본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진한 갈색 눈동자는 오로지 에그시만을 담고 있었다.
“날 찾아오지 않으면 죽을 일도 없었을 거예요.”
“네 손에 죽는다면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지.”
“.……당신은.”
“해리.”
“…해리는”
죽는 게 무섭지 않아요? 에그시의 말에 그는 웃으며 양손으로 에그시의 뺨을 감쌌다.
“난 너를 위해 태어났고, 네가 바랬기 때문에 존재한단다.”
“해리의 말은 너무 어려워요.”
이해를 바라진 않아.
“저는 해리를 죽여야 해요.”
“알고 있단다.”
도망치세요. 에그시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 당장 도망치세요. 미국이든 중국이든 멀리 가버리라고,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품에서 꺼낸 작은 권총은 차게 식어 있었다. 소름끼치는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온몸에 흘렀다. 그는 에그시의 손을 잡고 정확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놓았다.
“가르쳐 줬겠지. 킹스맨 수트는 방탄이라고, 그러니까 나를 노리려거든 머리를 노리는 게 좋을 거라고.”
“뭐…그랬죠. 설마 진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사격 솜씨가 아주 훌륭했었지?”
“이 정도 거리라면 어린 애라도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그가 덜덜 떨리는 에그시의 손을 꽉 잡았다.
“울지 말렴.”
“젠장…빌어먹을…죄송해요.”
달깍. 헤머를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에그시를 보며 그가 타일렀다. 타겟은 정확히 봐야지. 그 목소리에 다시 울음이 왈칵 터졌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눈물을 닦아주는 다른 한 손이 마치 진짜라고 말하는 것처럼 뜨거웠다.
“해리는 어디까지 기억해요?”
“전부.”
“…….”
“그리고 항상.”
탕. 총성이 울렸다. 제 옆으로 쓰러지는 그를 보며 에그시는 눈물을 마저 삼켰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울지 말라고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조금만 더 늦었을 땐 그냥 들어오려고 했다.”
“…다행이네요. 자기 손으로 자기랑 똑같은 사람을 죽이는 건 좀 그렇잖아요?”
에그시의 말에 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컵을 들어 목을 축이며 들고 있던 권총을 내려놨다. 그것은 필시 자신이 해내지 못 할 거라 생각해 준비한 것일 테다. 에그시는 잔뜩 빨개진 눈으로 해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요? 왜 진작 타겟을 말해주지 않았나요? 말해줬더라면.”
“그 새끼와 다시 도망치려고?”
“해리!”
“미리 말해줬더라면 뭐가 바뀌지? 하나도 바뀌는 건 없어 에그시. 너는 그를 죽여야 해.”
“내가 아니어도 됐잖아!”
이제 에그시의 총구는 해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런. 멀린이 탄식하는 소리가 벌써 들린 듯했다.
“내가 아니어도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았잖아! 왜 하필 저예요. 왜 하필 해리 하트를 죽이는 게 저여야만 했어요?”
“쏴.”
네? 에그시는 제 귀를 의심했다. 컵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원망스러우면 나를 쏘라고.”
총을 잡은 손이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뚜벅. 뚜벅 다가오는 구두굽 소리에 에그시가 양손으로 그를 겨누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킹스맨 수트는”
“알아요. 젠장…안다구요….”
결국, 에그시는 손을 툭 떨어트렸다. 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진짜라는 걸아는 이상 어떻게 자신이 해리 하트를 쏘겠는가. 차라리 자신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에그시는 고개를 돌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봤다. 하얀 침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가 번진 그 모습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에그시는 제 머리에 총을 쏠 정도로 용기 있지 않았다. 또한, 아직 진짜 해리가 살아 있었다. 사랑을 말하지는 않지만. 사랑을 죽일 수 있으면서 제 사랑은 죽이지 못한 자신의 꼴이 비참해서 에그시는 다른 요원들이 시체를 치우러 오기까지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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