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전력주제 <시>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최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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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런던의 날씨는 맑게 갠 날이 찾기 어려우니 비가 오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 없었으나 해리는 그날따라 기분이 언짢은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것은 제 동거인이 데리고 온 멍청한 강아지가 화장실을 가릴 줄 몰라서도, 기껏 탄 홍차의 맛이 더러워서도 아니었다. 아침부터 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할 동거인이 종일 집을 비워서였다. 만약 그가 집을 비우지 않았다면 저 개가 화장실을 잊고 카펫에다 실례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렇게 맛없는 홍차를 제게 내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동거인은 해리에게 지나치게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해리는 그에게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휴가를 따로 맞추는 일은 없었다. 킹스맨의 일들은 대부분 비정기적이었고 해리는 아서였다. 휴가를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으나 가끔은 휴식도 있어줘야 하는 법이었다. 굳이 에그시가 멀린을 닦달하며 해리에게 쉬는 날을 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지 않아도 해리는 충분히 쉴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나친 참견이었고 때문에 해리는 자신의 휴가를 에그시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니 평소에도 그랬다. 그래서 늘 무리하는 것은 에그시였다. 해리의 휴가날을 맞춰 몸을 혹사하며 임무를 끝내고 기절하듯 그의 품에서 잠들었다. 얼굴에 잔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해리는 이불을 끌어올려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음…사랑해요. 해리.”
사랑이라. 해리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같이 살며, 아침을 함께 하고 잠들기 전에 키스를 하고 때로는 섹스를 하기도 했지만 해리에게 그것은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에그시가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리의 아들이었고, 자신의 제자였다. 소중한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였으므로 해리는 에그시의 사랑한다는 칭얼거림을 대충 흘려듣고는 침실을 빠져나왔다. 휴가라고 한들 보고서를 읽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제 서재로 들어가 에그시가 마무리한 임무를 살펴보며 눈가를 쓸어내렸다. ‘폭파사고.’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러고 보니 에그시가 자꾸 몸을 떠는 것이 생각났다. 아마 상처 때문일 것이다. 휘말렸나. 킹스맨에게 부상은 흔하다. 일이 일이다 보니 총에 맞거나 칼에 베이는 건 당연지사고 폭탄, 독극물을 비롯한 온갖 죽음에 이르는 것들이 그들을 위협했다. 수트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동거인이 점심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말도 없이 쳐들어오더니 이제는 말도 없이 나가 연락하나 없는 게 괘씸해 해리는 혼자 점심을 해결하곤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커다란 글씨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에그시는 세상을 구했으나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유명인사의 스캔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에그시의 우산이 그대로 구석에 새워져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래서 듣지 못할 뻔 했다. 해리는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인기척이 있었다. 아주 작고 조심스러워서 하마터면 듣지 못할 뻔한 소심한 아이의 인기척이었다. 문을 열자 온통 비에 젖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몸이 보였다. 우산을 쓰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쓰지 않은 것인지 어두운 금발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있다가 아이가 뒤를 돌아봤다. 축 처진 눈꼬리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에그시.”
그것이 비가 아니라는 것은 아무리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시익 웃는 미소가 안타깝게도 아이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리!” 목소리는 밝았는데 표정은 그러지 못했다. 에그시는 아직 어렸다. 제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다.
“우산은?”
“깜빡했지 뭐예요.”
소매를 축 늘어트리며 말하는 모양새가 퍽 우스웠는지 해리가 헛기침을 했다.
“감기 걸리겠다. 얼른 들어와서 씻고 옷 갈아입어.”
“이대로 들어가면 거실이 엉망이 될걸요?”
“이대로 널 현관에 내버려 뒀다간 동네가 엉망이 될 거다.”
오, 에그시는 조금 주저하는듯싶더니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길게 이어진 빗물에 해리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옷 벗는 소리가 들렸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을 머금은 육중한 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해리는 앞에 옷을 놔두며 한참을 에그시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샤워기 소리와 함께.
해리는 에그시에게 최소한의 일만 간섭하며 어쩔 때는 남보다 더 매몰차게 굴었다. 특히 공적인 장소에선 더 그랬다. 그러지 않으면 불쑥 저 어리광을 받아줄까 두려웠다. 해리는 에그시의 사랑이 어리광이라 생각했다. 어려서 아버지가 없었으니 그것을 푸는 것이라 여겼다. 어느 정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에그시에게는 자신을 든든하게 지탱해줄 기둥이 필요했고, 그걸 부순 해리는 대신이 되어 주었다. 너무 늦은 17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였지만, 에그시는 해리를 원망하지 않았다. 가끔 해리는 에그시의 마음이 너무 벅차 차라리 원망을 하고 욕을 했으면 하고 바랐다.
[아서. 갤러해드가.]
멀린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에그시가] 그것은 지독한 악몽이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에그시는 1인실에서 혼자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고 멀린에게 물어봐도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창문이 없는 킹스맨 본부의 병실과는 달리 사람이 사는듯한 곳이었다. 창밖으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옆 탁상에는 하얀 꽃병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꽂혀 있지 않았다. 해리는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웃고 있는 에그시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걱정했어요?”
“너란 아이는 정말……”
고문이 있었다고 했다. 발목은 부러지고 손등은 불로 지졌다고, 온몸을 구타당했다고 했다. 죽기 직전에 랜슬롯이 현장을 덮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고, 해리는 그 앞에 앉아 에그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얼굴에 난 상처를 눈에 새겼다.
“그런데 일반병원이라니. 크게 다쳤나 보구나.”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본부에 있는 병원은 너무 답답하잖아요?”
그때 해리가 누워있을 때 엄청 답답해 보여서. 에그시가 배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해리의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침묵이라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에그시의 표정을 해리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에그시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다. 그것은 기쁨이나 안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에그시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슬픔, 고통, 절망. 단순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고독.”이었다.
에그시가 제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 왜 이러지.” 제가 들어도 티 날 정도로 어색한 목소리로 에그시는 눈물을 닦아냈다. “해리가 이상한 말해서 그렇잖아요.” 괜히 해리의 탓을 해보면서 멎지도 않을 눈가를 꾹 눌렀다.
“해리는 안 바빠요? 고작 에이전트 하나 때문에 시간 빼도 되는 거예요?”
민망했는지 에그시가 말을 돌렸다. 해리는 제 품에 있는 손수건을 들어 에그시의 눈가를 닦아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해리는 그때와 같이 에그시의 슬픔을 모른 척했다. 주제를 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에그시의 일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나중에 다시 오마.”
웃으며 배웅하는 에그시를 뒤로한 채 해리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꽃병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려 다음에 올 때는 꽃을 사오기로 다짐했다. 에그시라면 그것마저도 좋아해 줄 것이다.
걸음을 옮기려는 해리를 누군가 붙잡았다. 아마도 에그시의 주치의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언뜻 마주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아마 본부내의 사람일 것이다. 그는 능숙하게 해리를 모른척 하며 말을 걸었다. “에그시 언윈의 보호자 되시는 분이십니까?” 해리는 넥타이를 고쳐매며 말했다. 아직 문 뒤에는 에그시가 울고 있었다.
“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환자분께서.”
남자는 말을 삼켰다. 말하기 곤란한 듯 괜히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해리의 얼굴을 힐끗 보며 이내 입을 열었다.
“유산하셨습니다.”
“…….”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 겁니다. 게다가 배에 파편이 박혀서 아이는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남자의 말은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해리는 쥐고 있던 주먹이 스륵 풀리는 것을 알았다. 발밑이 무너지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무너지는 것은 저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해리를 지나쳐 병실로 들어갔다. 이내 에그시의 비명이 제 가슴을 관통했다.
며칠 후 다시 병실을 방문했을 때 에그시는 활짝 웃으며 해리를 반겨주었다.
“웬 꽃이에요?”
투덜거리면서도 한 송이를 꺼내 꽃병에 담은 에그시는 나머지 꽃에 제 코를 묻곤 얼굴을 비볐다.
“그냥…보니까 네가 생각나더구나.”
헤에. 에그시는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해리를 바라봤다. 꽃이 제 뺨을 간질이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다가오는 해리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 눈망울이, 눈꼬리가 여전히 축 늘어져 있어 늘 울상인 것 같은 아이였다. 해리는 몸을 숙여 제 아이의 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한다. 에그시.”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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