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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연성 파레트 38.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물거품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처음 그가 저를 도와 줬을 때. 위기에서 구해줬을 때. 죽을 뻔한 걸 살려뒀을 때. 정말 방해라고 생각했지만 싫지 않았다. 싫지 않았으니까. 점점 좋아진 것뿐인데. 결국 내뱉고 말았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니 그래도 좋아. 나는 당신이 말린다고 하더라도 내 길을 걸어 갈 테니까. 그 끝이 끝없는 뫼비우스의 띠라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운명이 저기 지척에서 스러져가는 영웅과 같이 될 지어라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여관에서 깨어난 헤기는 모든 것이 되돌아 왔음을 알았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던 이들을 제외한 모든 것이 돌아와 있었다. 용병단을 나와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헤기의 앞에 나타난 허크는 그것을 보고만 있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가리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다리로 한 걸음 한걸음 옮기는 헤기를 보고만 있다가, 혀를 차다가, 이를 갈고는 커다란 손으로 헤기의 어깨를 잡아챘다. 너.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저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에는 빛이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무슨 말을, 하려고 했거늘. 다시 헤기를 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척 놀려도 줄 생각이었고, 화도 낼 생각이었으며, 싫은 소리를 잔뜩 할 생각이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대답도 하지 못할 약속을 툭 던져주고 가면 나는 어떡해야 하냐고.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허크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오열하는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이 일로 인해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더라도 상관없어요. 이게 내 길인걸.

 

  넌 그렇게 말했었지. 헤기. 그 길의 끝이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더라도.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헤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눈가를 혀로 핥아내린 허크가 입을 맞췄다. 딸꾹. 이 와중에도 딸꾹질은 나오는지 연신 가슴을 헐떡이는 헤기를 보며 허크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숙여 목부터 배까지 훑어 내렸다. 하얀 몸에는 흉터하나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얼굴을 바로 하지 못하고 옆만 바라보던 헤기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넘쳤다. 아래를 벗기던 허크가 다시 눈을 맞추려 애썼다. 헤기. 허크의 부름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고개를 돌린 헤기가 대답했다. 네. 목소리에도 힘이 하나도 없었다. 왜 울었어. 허크의 물음에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헤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허크는 조금 곤란한 듯 웃더니 양팔로 헤기를 제 품안에 가뒀다. 익숙한 상황인데도 벌벌 떨고 있는 게 꼭 벌 받는 모양새여서 계속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내가 너를 구해주지 않을까봐?”


 

  애초에 구한다는 건 무엇이고, 내가 무어라고 너를 구할 수 있을까.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는 같이 헤엄쳐주는 것도 못하고 너를 끌어안고 떨어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을 터인데.

 


  “너를 좋아하지 않을까봐?”

 


  연속한 질문에 어깨가 떨렸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에 허크가 손으로 입술을 훔쳤다.

 


  “너를 좋아하지 않게 되도 괜찮다고 했던 건 너였어.”

  “…그건…”

  “터무니없는 소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크는 헤기를 놓지 못했다. 네가 나와 검을 견주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끝에 내가 너를 잃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하여 네가 영웅의 길을 걷게 된다고 하더라도 허크는 헤기를 놓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리를 기억하는 건 바로 우리. 너와 나. 둘밖에 없어. 나야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척. 다 잊은 척 너를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울게 되니까. 이 험난한 세상에 너 혼자 남겨 두게 되니까. 그래서,

 


  “헤기. 내가 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움찔 떨리는 몸에, 시선이 완전히 저와 마주칠 때까지 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작은 동작하나하나를 눈에 새겨 넣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울면서 콜헨을 뛰어다니는 너를 붙잡고, 그래도 품을 뛰쳐나가 로체스트로 달려간 네가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었어. 기억나? 허크는 천천히 기억을 곱씹었다. 그런 너를 데리고 모르반으로 도망쳤었어. 처음에는 위로해준다는 명목으로, 그 다음에는 슬픔을 나누자는 의미로, 또 한 번은 다 잊고 새로 출발하자는 의미로. 이제 나는 무슨 핑계를 대고 너를 안아줘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네게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 난세에서 사람들은 너를 희망으로 생각하겠지. 그럼 너는, 너는 헤기.

 


  “나를…좋아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거짓말 이예요…”

  “그래.”

  “허크, 당신이 나를…아주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어…아주 많이 좋아해서……”

 


  흐르는 눈물을 손수 닦아준 허크가 헤기의 말을 기다렸다. 침을 꿀꺽 삼킨 헤기가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헤기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예요. 허크.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그건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저, 세상을 구하면 당연히 당신을 구하게 되니까.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당신은 몇 번이고 날 지나치지 못할 걸 아니까. 당신의 마음을 이용했어요. 내가 영웅의 길에 들어서는 걸 막지 못했다고 많이 자책했으면 좋겠어. 그럼 당신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 아냐. 이 피비린내 나는 전란 속에서 당신은 눈앞의 적도, 아군도 아닌 나를 구하러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잖아.

  나를 사랑하니까.










 

  “…이기적이죠.”

  “고작 그거야?”

 


  허크의 대답에 헤기가 손을 치우고는 대답했다. 네? 바보 같은 목소리에 허크가 몸을 일으키곤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했다. 고작 그거냐고. 헤기, 네가 바라는 게 내가 떠나지 않는 것. 그것뿐이냐고. 고작이라니. 헤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허크를 올려다봤다. 그는 웃고 있는 것도 같았고,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같았으나 늘 예상외의 대답을 내려놓는 그였기에 헤기는 그가 말해주기 전까진 판결을 눈앞에 둔 죄수의 기분이 되곤 했다.

 


  “더 큰걸 워해도 되.”

  “……”

  “네겐 그럴 가치가 있어.”

 


  허크의 말에 헤기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여기서 무얼 더 원한단 말인가, 당신에게. 내가 이제 걸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당신의,

 


  “내 목숨을 원해도 된다는 소리야.”

  “…필요 없어요…”

  “정말?”

  “…키스해줘요.”

 


  헤기가 두 팔을 쭉 뻗었다. 허크는 오냐, 하며 몸을 숙여 주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목에 매달린 헤기가 투덜거렸다. 당신을 잃고서 얻는 건 아무 가치가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모두 다 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빼고.

저번엔 일주일이었지. 그럼 이번엔 보름 어때. 허크의 말에 헤기는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며 제 목에 입을 맞추는 허크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한 달. 한 달 동안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물론 모든 게 헤기의 바람처럼 돌아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든 일도 계속 되겠지. 헤기. 나는 네가 이 모든 것이 익숙해지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항상 나를 찾길 바란다. 내가 없는 때에도 나를 기억하길 바란다. 영웅의 길 그 끝에서 지쳐 쓰러지는 그때에도 나를 생각하길 바란다. 네가 이기적이라면 나는 아주 나쁜놈이겠지. 하지만 분명 괜찮을 거라고 믿어. 모든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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