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연성 파레트 

43.“우리 그냥 죽어버릴까.” / 젖은 머리카락/ 한 치의 흩으렴 없이 웃다


http://yellweroom.tistory.com/234 이거 과거편입니다






 

 

 폭풍우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헤기는 당장에라도 모르반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지금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사공의 말에 멈춰서야했다. 지금 파도는 배는 물론이고 섬마저 삼켜버릴 정도로 거칠었고, 그 앞에서 우리는 한낱 작은 인간에 불과했다. 허크는 헤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헤기의 눈동자는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콜헨으로 돌아가면…, 돌아가면. 허크가 되물었을 때 헤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무로 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같이 누울 때면 헤기는 가만히 눈을 감고 허크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대왔다. 나무로 된 집에는 비 냄새와 풀냄새가 가득하게 났지만, 방은 정사 후 끈적함만이 남아있었다. 배를 띄우지 못한지 나흘. 신이 장난이라도 치는 것마냥 그들을 모르반에 묶어놨다. 허크는 차라리 그것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콜헨에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뀌지 않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헤기는 믿고 싶지 않아 했지만, 허크는 꼭 두 눈으로 봐서 절망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헤기도, 저도. 


 “헤기. 우리 그냥…여기서.” 


 허크가 그 말을 꺼낸 건 벌써 다섯 번째였다. 헤기는 그때마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날 이후로 헤기는 인형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허크가 헤기의 입을 열게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그중에서도 허크는 단 하나의 방법만을 택했다. 다른 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이마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새 말랐는지 허리를 부딪칠 때 뼈가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저녁은 뭐가 먹고 싶어. 허크의 말에 헤기는 고개만 저었다. 그러다가도 크게 콱 올려치면 신음이 샜다. 비가 와서 가게들도 문을 안 열어 당분간 장은 못 보겠다. 가게라고 해봤자 모르반에 딱 하나 있는 가게를 말하는 것일 테다. 집에 빵이랑, 생선이랑, 야채도 있고. 고기가 있던가. 허크의 말에 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 상태는 썩 좋지만은 않았다. 여기저기 썩어들어 가 냄새가 났다.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다. 원래도 빈집을 얻은 것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비만 오지 않았더라도 벌써 보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크는 이 집이 무너져 그 아래 깔려 죽어도 좋으니 비가 그치지 않길 바랐다. 차라리, 그때 우리가 모른척할 수 있었더라면. 갑자기 들이닥친 이방인에게 친절하게 방을 내어주던 안주인도, 너와 같은 또래의 금발의 꼬맹이도, 집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선뜻 이 집을 가리키며 빈집이라고 말해주던 마법사도 그저 모른척 할 수 있었더라면, 이토록 비참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그 일을 반복하고 나서도 또다시 운명의 굴레에 속하게 되었지. 

 

 헤기, 정말 콜헨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 여기서 나와 단둘이 사는 것만으로는 안되는 거야? 

 

 허크의 물음에 헤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어리석게도. 


 이렇게 된 이유를, 


 헤기의 말에 허크는 몸을 푹 숙였다. 맞물려 있던 살들이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헤기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이불을 꽉 쥐었다. 일주일. 벌써 일주일째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가고, 언제까지나 집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때까지 헤기의 마음을 붙잡아두지 않으면 저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헤기가 달아날까 봐. 카단이 티이를 잃었을 때처럼, 밀레드가 제 누나를 잃었을 때처럼, 허크 역시 헤기가 어디론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헤기, 우리 그냥” 


 죽어버릴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나도 처참했다. 헤기. 허크는 다시 한 번 헤기를 불렀다. 네가 내게 붙잡혀 있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이게 내 욕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네게,...모든 것이었으면 좋았으려만.


 “사랑한다.”

 “저도 사랑해요.”


 침묵투성이인 허크의 말에 헤기는 한 치의 흩으렴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만이 진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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