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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단 하나의 기다란 날붙이가 소년의 몸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년의 몸을 받아든 왕은 아무 말도 없이 소년을 바라봤다. 눈도 채 감지 못하여 남겨진 반짝이던 금빛 눈은 죽어버렸다. 차갑게 식은 분노가 서서히 끌어 올랐다. 왕은 조심스레 소년의 몸을 바닥에 눕히고 눈을 감겨주었다.
‘칠칠치 못하지 않느냐. 시로.’
그 목소리에는 분노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안했다. ‘시로‘라고 불린 소년의 몸 위로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덮어주는 영웅왕은 매우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 서있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그곳에,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였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진, 생명이라 불리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그곳에. 그리고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손바닥 위로 톡톡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네가 죽는다고 해서 짐이 놓아줄성싶으냐.’
이상한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소년은 죽었다. 그것은 확실한 죽음이었다. 피가 터지고, 숨이 멎었다. 작은 경련도 없이, 이별을 고할 시간도 없이 소년은 죽어버렸다. 정신이 나간 것일까. 내가 약간 고개를 기울여 그들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찰나 눈이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바라봤다. 눈을 피해도, 고개를 돌려도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그것은 나는 모르는 감정이었다. 분노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애정 같은 것도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 말하던 황금빛 왕은 나에게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왜 해줘야 하는 것이지? 의문을 느끼는 순간, 커다란 손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으나, 뒤를 돌아보는 그 순간 목덜미를 잡아채일 것만 같았다.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바닥으로 넘어지자 눈앞이 금빛으로 밝게 빛났다. 꽉 쥐어짜이는 고통에 배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일어나거라.”
응? 시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내리쬐는 강한 빛에 바로 고개를 들지 못하자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까지 짐을 굶길 생각이냐. 무능한 것.”
그것은 꿈속의 남자와 무척이나 닮았지만, 전혀 다정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짜증만 돋구는 목소리에 나─에미야 시로는 짜증스레 눈을 떴다.
“잡종.”
“…길가메쉬.”
“짐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다니 무엄하구나.”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고개를 숙이는 게 짜증이 났는지 길가메쉬가 배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파! 시로가 몸서리를 치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쉽사리 물러날 상대가 아니었다. 길가메쉬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채 시로를 내려다 보며 혀를 쯧, 찼다.
“반 푼어치도 안되는 녀석이 멍청하기까지 하니 어찌할꼬.”
“비켜!”
“게다가 버릇도 없고.”
“길,가메쉬!”
“진즉 죽이고 새로운 마스터를 찾으려 했으나.”
시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길가메쉬가 손을 치우고선 시로의 배 위에 올라타 입술을 낼름 핥았다.
“네게 흥미가 생겨서 말이다. 잡종.”
아니, 에미야 시로라고 했던가. 분명 일부러 그런 것이다. 시로는 두 팔을 바닥에 결박당한 채 길가메쉬를 올려다봤다. 동공이 가늘게 좁아졌다. 진득한 시선이 온몸을 훑어 내렸다.
“……비켜.”
시로의 말을 무시한 채 이불을 치운 길가메쉬가 귀를 깨물었다. 윽, 신음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붕대로 칭칭 감겨있기는 하지만 시로의 몸은 확실히 좋은 편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적당히 마른 몸에 길가메쉬가 허리를 잡고 지분거렸다. 이윽고 차갑고 가는 손이 배를 어루만지며 바지 안으로 들어갈 때였다. 에미야 시로가 사색이 되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몸에 손대지 마!”
하, 길가메쉬가 헛웃음을 들이켰다. 령주의 힘이 길가메쉬를 저지했다.
“내 마스터는 할 일 못할 일 구분도 못하는 바보 천지였나?”
“적어도…이때 사용하는 거라는건 알겠는데.”
“어제 설명을 들었을 텐데.”
길가메쉬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입술이 삐죽 올라가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시로는 천천히 몸을 뒤로 빼며 길가메쉬를 밀쳐냈다. 의의로 쉽게 물러난 길가메쉬는 쳇, 하고 돌아서더니 이내 방을 빠져나갔다.
눈앞에 붉은 창이 날아들었다. 시로는 이를 악무는 한편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진짜 죽을 것이다. 어이없게도, 누군가에게 구해진 목숨을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그것도 같은 사람에게 말이다. 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붉은 창이 코앞에서 멈췄다. 커다란 사슬이 창을 잡아챘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천장에서 검이 쏟아 내리며 푸른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반응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찰나의 순간, 눈앞에서 검을 몸으로 받아낸 채 비틀거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떤 시로는 뒤로 물러섰다. 등에 차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벽은 아니었다. 벽치고는 지나치게 둥글었다. 시야가 밝게 물들었다. 시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추운 겨울이건만 추위는커녕 땀이 삐질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시로는 입을 벌려 천천히 숨을 삼켰다. 뒤에는 자신보다 머리 한 뼘은 더 클 것 같은 남자가 팔짱을 끼곤 삐딱하게 서있었다.
“사라져라. 번견.”
남자의 말 한마디에 허공에서 튀어나온 짧은 검이 푸른 남자의 미간을 꿰뚫곤 지나갔다. 그대로 뒤로 넘어간 남자는 이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무수한 검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에미야 시로는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 그렇게 입을 여는 순간 남자는 뒤돌아 봤다.
밝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바짝 올린 채, 그보다 더 빛나는 황금색 갑주를 입고 있는 남자는 눈동자를 한번 깜빡이더니 서서히 시로를 옭아맸다.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어두운 창고 안이었는데도 남자의 눈빛만이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남자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마스터인가.”
인상과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에 시로는 마스터? 하고 되물었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매서운 눈동자가 구겨졌다. 몸을 완전히 돌려 가까이 다가온 그는 어깻죽지를 꽉 잡아챘다. 시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금방 전 푸른 남자에게 당한 상처였다. 그는 몇 번 상처를 헤집더니 피로 잔뜩 젖은 손을 핥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무어라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빤히 바라보면 그는 혀를 한번 차더니 허공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에미야 시로는 눈을 마주친 순간, 아니 처음 본 순간 그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느낀 시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는 필시 자신을 죽이려던 사내와 같은 기운이었다. 아문 상처 위로 신음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가 다시 상처를 헤집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깨를 타고 올라온 손이 턱을 잡아당겼다. 강제로 고개를 쳐들어 올린 시로는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숨을 삼켰고, 이내 입술이 집어 삼켜졌다. 숨이 차, 입을 벌리자 혀가 들어왔고 타액이 얽혔다. 훅 열기가 차올랐다. 시로는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시로의 양손을 붙들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면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다른 수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다. 바닥에 짓눌려 같은 남자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하다가 숨이 막혀 죽는다니. 차라리 아까 죽어버릴 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입술이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연이어 허공에 날아드는 칼날을 쳐낸 그는 아무래도 버릇인 듯 다시 혀를 찼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네놈…영웅왕 길가메쉬.”
그것은 살기를 띄고 있었지만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영웅왕 길가메쉬’라는 것은 아마 눈앞의 남자를 가르키는 것일 테지,
“세이버여, 아쉽지만 지금은 너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세이버가 단호히 길가메쉬의 말을 잘라먹고 허공에 팔을 쳐들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쳐들었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아주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로는 저도 모르게 길가메쉬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네놈은 여기서 죽을테니 말이다. 네놈의 마스터와 함께.”
창고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살기가 몸을 찔렀다. 길가메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단 하나의 검. 특별한 기교도 마력도 흐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째선지 길가메쉬는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특별히 대항할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도망칠 것 같지도 않았다. 막아야 했다. 아니면 도망치기라도 해야 했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했던 간에 그는 한번 자신을 구해줬고,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되었다. 뻗은 손이 간신히 그에게 닿았다. 절대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고개만 까딱 돌려 자신을 돌아보았다. 새빨간 눈동자와 마주치자 현기증이 일어났다. 쓰러지려는 시로의 몸을 길가메쉬가 팔을 잡아당겼다. 빛은 지척에 와있었다. 차가운 금속구가 뺨에 닿았다.
“엑스─”
“그만둬 세이버!!”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세이버의 움직임이 멈췄다. 창고로 뛰어들어온 소녀는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벅찬 숨을 내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정신입니까 린!! 지금 영웅왕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
“그럼 린 어째서,”
세이버의 말에 대충 대답한 소녀는 우아한 자세로 검은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기껏 살려뒀는데 다시 죽이긴 그렇잖아? 안 그래 에미야군?”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옷을 걸친 소녀─토오사카 린은 당당하게 그들의 앞에 섰다. 시로는 아찔하게 멀어지는 정신을 애써 바로잡으며 길가메쉬에게 기댄 채 서 있었다. 닿은 차가운 금속 구 덕분에 조금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두통은 가실 줄 몰랐고, 손끝은 잘게 떨렸다. 힐끗, 주변을 살펴보던 린은 그제야 시로의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긴 한데…일단 방에 들어가서 얘기할까 에미야군? 안색이 말이 아니야.”
“토오사카…”
“응?”
린이 시로에게 다가오려던 찰나였다. 시로의 어깨를 잡은 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길가메쉬는 린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린은 인상을 잔뜩 쓰며 뒤로 살짝 물러나 세이버의 옆에 섰다.
“뭐야.”
“이 녀석은 일단은 내 마스터다. 다른 마스터에게서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린은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 기껏 생각해서 도와줬더니. 세이버가 무례하다며 바들바들 떠는 것을 애써 진정시킨 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서번트를 소환한 이상 서로는 적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라고 해도 봐주지 않는 것이 마술사의 룰이었다. 지금까지는 그 애를 생각해서 봐줬지만,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설명을 해야 했다. 어쨌거나 에미야 시로는 자기 때문에 죽었고, 성배 전쟁에 말려 들었다.
“뭐……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언제까지 나를 여기 세워둘 생각이야. 에미야군? 설마 그 많은 얘기를 여기서 다 듣고 싶은 건 아니지?”
엉망으로 깨진 바닥과 유리를 보며 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이 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던 시로는 길가메쉬를 보며 주춤했다. 분명 이름과 호칭은 아는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했다. 서번트는 너무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호칭 같고, 길가메쉬라고 부르자니 너무 길었다. 저기, 시로가 어색하게 그를 불렀다. 용케도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가 시로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아주 불쾌하다는 말투로.
“짐의 이름은 ‘저기‘가 아니라 길가메쉬다. 잡종. 편한 데로 부르도록.”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문을 열곤 거실로 향하는 길가메쉬를 보며 시로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입에 아로새겼다. 길가메쉬. 길가메쉬, 길,가메쉬? 어쩐지 그리운 이름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의 여운이 입안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시로는 그가 부르는 목소리에 응. 길. 하고 대답하곤 그를 뒤따랐다. 어쩐지 걸음을 우뚝 멈춘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무서웠지만, 이내 등을 돌려 걷는 그를 보며 시로는 멍청하게 뒤따라 걸었다. 다른 무언갈 생각할 정도로 제정신도 아니었고, 그의 표정을 살필 정도로 상태도 좋지 못했다.
겨우 탁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앉을 수 있게 된 시로는 찻잔 세 개를 주르륵 꺼내 따뜻한 녹차를 부었다. 서번트라고 불리는 그들의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지만 없는 것보단 났겠지. 시로는 저 무섭도록 어색한 침묵의 자리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나 이대로 있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어서 애써 걸음을 옮기곤 그들의 사이에 앉았다. 의외로 길가메쉬는 아무 불평도 없이 찻잔을 받아 들었고, 린의 서번트가 보이지 않아 묻자, 보초라는 대답을 듣고서 자신의 앞에 놓았다. 마실 생각은 없었으나. 이대로 두기엔 아까우니까. 시로는 찻잔을 잡고 차가운 손을 녹였다.
“그럼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에미야 군은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알고 있어?”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린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데, 시로의 물음 섞인 눈동자에 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요점만 말하자면 에미야군은 마스터로 선택받은 거야. 그 증거로 몸 어딘가에 성흔이 깃들지 않았어?”
“성흔?”
시로가 짐작도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묻자 린이 아닌 옆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령주를 말하는 거다.”
길가메쉬가 턱짓을 하자 그제야 자신의 손등을 확인한 시로는 빨갛고 둥근 문양이 자신의 손등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로가 손등을 보여주자 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마스터의 증표야. 그리고 서번트를 규제하는 증표야. 그러니까 그게 있는 한 서번트는 너를 따를 거야.”
린의 말에 시로의 표정이 묘하게 구겨졌다.
“있는 한이라니 무슨 뜻이야?”
“……령주는 절대 명령권이야. 서번트가 의지에 반하더라도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주문. 그 예로 아까 세이버가 공격을 그만뒀지?”
시로는 살기로 죽을듯한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그들을 집어삼키려고 했다. 그것이 갑자기 멈춘 것은 린의 고함 때문이었지. 그제야 시로는 조금 이해한 듯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단, 령주는 3회뿐이니까. 헛되게 쓰지 않도록 해. 령주가 사라지면 에미야군은”
린이 힐끗 길가메쉬를 쳐다봤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길가메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살해당할 테니까.”
길가메쉬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시로를 마주 봤다. 길가메쉬의 시선이 둘을 훑었다.
“마스터가 다른 마스터를 쓰러뜨리는 게 성배 전쟁의 기본이야. 그렇게 다른 여섯 명을 쓰러뜨린 마스터에게는 소원을 이뤄주는 성배가 주어져.”
린이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시로가 그것을 뚝 잘라먹곤 물었다.
“잠깐 토오사카. 성배는 또 뭐야?”
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자면 넌 어느 의식에 말려든 거야. 성배 전쟁이라는 7명의 마스터에 의한 마술사 간의 살육전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살육전?”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게다가…너 사실 이해하고 있는 거 아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서번트에게 살해당할 뻔했잖아.”
순식간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죽을뻔했던 일. 허공에서 검이 날아든 것. 자신을 죽이려던 남자가 자리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남자가 등장한 것. 길가메쉬와 린. 그녀의 서번트까지.
“나도 마스터로 선택받은 하나. 그 서번트는 성배 전쟁을 이겨나가기 위한 성배가 준 사역마라고 생각하면 돼.”
시로가 고개를 돌려 길가메쉬를 바라봤다. 아까의 요란한 갑주는 어디 가고 조금 더 편해 보이는 옷으로 바뀐 길가메쉬를 보며 시로는 흠. 하곤 헛기침을 했다.
“사역마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야 그렇지. 사역마로 분류되긴 하지만 인간 이상의 존재. 과거의 영웅이니까.”
“과거의 영웅? 그가?”
“그래. 과거든 현대든 전설상의 영웅을 불러와 실체화 시킨 것이 서번트. 불러내는 것은 마스터의 역할. 나머지 실체화는 성배에 의한 현상이야. 뭐 서번트는 기본적으로 영체로 곁에 있지만 필요하다면 실체화 시켜서 전투를 시킬 수 있다는 의미야. 여기까진 이해했어?”
쉬지 않고 말한 까닭에 목이 탔는지 식은 차를 쭉 마신 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표정이 달라졌다. 시로는 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곤 입을 꾹 다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성배 전쟁을 감독하고 있는 녀석에게,”
쾅. 탁자 사이로 커다란 검이 박혔다. 비명을 지른 린의 목소리를 듣고 뛰어들어온 세이버가 분노하며 검을 꺼내 들었다. 길가메쉬,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보자 길가메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노하지 마라. 난 단지 저 계집이 우리를 사역마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길가메쉬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어느새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더구나.”
중요한 사실? 린이 되물었다. 길가메쉬는 시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짐이 소환에 응한 것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성배는 손에 넣은 자의 소원을 이뤄주지. 그건 마스터뿐만 아니라 서번트의 소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따르고, 때로는 너희를 위해 목숨을 잃지.”
시로가 숨을 삼켰다.
“그러니 에미야 시로. 너는 짐을 위해서라도 성배를 손에 넣어야 하느니라. 너 이외의 다른 마스터에게 성배가 넘어가는 건 짐이 허락하지 않아.”
길가메쉬가 린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것을 듣고만 있던 세이버가 린의 앞을 막아섰다. 소원이 있는 것은 그뿐만 아니었다. 모든 서번트는 성배가 이루어주는 소원을 위해 마스터의 소환에 응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 길가메쉬의 말은 어느 하나 틀린 것 없었다.
하지만, 시로는 달랐다. 시로는 마술사도 아니었고, 서번트도 아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한 남학생이었다. 어쩌다 마술을 조금 쓸 줄 아는, 평범한 17살 소년. 그런 소년에게 하루도 아니고 단 몇 시간 안에 벌어진 살육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니, 시로가 길가메쉬를 노려봤다.
“그…성배라는 것이 그렇게 좋으면 다 같이 나눠가지면 안 되는 거야? 굳이 서로를 죽여가며 가질 필요가 있는 거야?”
시로의 말에 길가메쉬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으며 한참을 웃은 길가메쉬가 시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파! 시로가 소리쳤지만 그렇다고 내려줄 사람이 아니었다. 시로는 코앞까지 다가온 길가메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새빨간 눈동자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구나. 어째서 그것을 다른 잡것들과 나눠 가져야 하지? 애초에 세상 모든 보물은 짐의 것이다. 그것을 나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게다가 짐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건 딱 한 명뿐이라고.”
그리고 바닥에 내던져진 시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마술사끼리 하는 전투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어. 뭣보다. 성배 같은 정체도 모르는 거에는 흥미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걸 위해서 목숨을 거는 건.”
“누가 목숨을 걸라고 하더냐?”
길가메쉬가 시로의 말을 뚝 잘라먹었다. 아까부터 계속, 시로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길가메쉬는 등을 돌려 세이버를 노려봤다. 허공이 황금빛으로 일렁거렸다. 수많은 보구가 튀어나왔다.
“너는 여기에 박혀서 밥이나 하고 있어라. 싸우는 건 짐 혼자다.”
길가메쉬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린이 간신히 일어서서 전투태세를 갖췄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공기가 팽팽하게 얼어붙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허공에 있는 검들이 그들을 무참히 꿰뚫을 것이다. 린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처음부터, 세이버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후회하는 것도 잠시였다. 길가메쉬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때와 맞지 않게 침착한 목소리는 세 사람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둘을 보내줘. 그리고 일단은 나랑 얘기해.”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에 길가메쉬는 시로를 한 번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허공에 있던 검들이 사라졌다.
“가라. 오늘은 내 마스터의 목숨을 구해준 답례로 그냥 보내주지. 하지만”
길가메쉬가 이를 으득 깨물었다.
“다음은 없다. 너희들도. 너도.”
마지막은 분명 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을 알면서도 시로는 외면했다. 린이 주먹을 꽉 쥐었다. 무장을 해제한 채 등을 돌리고 있는 길가메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물러나라고. 그것도 적의 마스터의 도움을 받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분명 그녀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하지만 압도적이었다. 마술사니까 알 수 있었다. 길가메쉬라고 하는 저 서번트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분명 최강의 서번트를 뽑은 것은 자신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세이버가 린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린. 가죠. 저로는 영웅왕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세이버……”
“분하지만. 그는 정말 강하니까요.”
린은 시로를 돌아봤다. 언뜻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은 시로는 살짝 손을 흔들며 그녀들을 배웅했다. 나갈 수조차 없었지만, 서서히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갈 무렵 길가메쉬가 시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밤은 이미 깊었다. 벌레도 울지 않는 겨울이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할 말은?”
길가메쉬가 먼저 물었다. 시로는 주전자를 다시 한 번 데우며 음, 하고 대답했다. 사실 할 말도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토오사카가 죽을 것 같았기에 둘러댄 변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죽을 차례가 된 것 같아 시로는 아주 천천히 길가메쉬의 앞에 식은 차를 치우고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길가메쉬가 시로를 바라봤다.
“길……가메쉬는 소원이 있다고 했지?”
“그래.”
“그건 내가 들어줄 수는 없는 소원이야?”
길가메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로를 노려봤다. 분명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시로는 애써 침착하게 찻잔에 손을 감싸며 물었다. 눈빛이, 위아래로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온몸 구석구석 내장 깊숙한 곳까지 훑어지는 느낌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네놈이.”
길가메쉬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천장이 쿵 하고 울렸다. 또 손님인가. 길가메쉬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시로의 시선을 무시한 채 길가메쉬는 등을 돌렸다.
집 밖으로 커다란 이형의 괴물이 있었다.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몸집에 시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넌” 시로가 부르자 소녀는 생긋 웃으며 치마폭을 살짝 들어 올려 우아하게 인사했다.
“안녕 오빠. 소환은 성공한 것 같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소녀였다. 시로가 한 걸음 다가서려 하자 길가메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호의와 살기도 구분하지 못하는 게냐. 네놈은.”
하하. 소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긴 눈꼬리가 길게 휘어지며 웃은 소녀는 하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곱게 눈을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리야스필 폰 아인츠베른. 약속대로 오빠의 목숨을 가지러 왔어.”
분명 그 모습은 감히 천사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내뱉는 말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이리야의 마지막 말이 싸움의 불씨가 되어 땅에 툭 떨어졌다. 그 불은 순식간에 퍼져 주변으로 번져 나갔다.
“누가 누구의 목숨을 가져가? 건방지구나 계집.”
길가메쉬가 게이트 오브 바빌론을 펼쳤다. 무수한 보구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버서커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온몸에 보구들이 박혔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 뿐이었다. 보구들이 남긴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래, 그것은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겉모습만이 간신히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 시로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때였다. 하얀 은사의 검이 시로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길가메쉬가 난사한 보구에 의해 사라졌다. 길가메쉬는 혀를 차며 시로를 끌어당겼다.
“그러게 얌전히 집안에 있었으면 좋을 것을.”
“그렇지만…난 마스터인걸”
“마스터라는 자각은 있느냐?”
계속되는 보구의 사출로 제자리에서 몇 발자국 움직이지도 못하는 버서커를 뒤로 한 채 농담을 주고받는 둘을 보고 이리야의 표정이 하얗게 굳었다.
“사이가 제법 좋네?”
이리야가 둘에게 말했다. 그제야 시로가 이리야를 봤다. 지금껏 봤던 예쁜 미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잔뜩 화난 얼굴로 이리야는 버서커에게 명했다.
“미쳐버려. 버서커. 그리고 저 둘을 찢어 죽여.”
이리야의 새빨간 눈이 타올랐다. 버서커의 마력의 흐름이 달라졌다. 마지막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순간 버서커가 길가메쉬에게 달려들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쏟아지고, 뼈가 드러나도 멈추지 않았다. 길가메쉬에게 닿으려는 찰나 수많은 사슬이 버서커의 몸을 포박했다. 그가 움직이려고 하면 할수록 사슬은 더욱 굵어지고 단단해졌다. 그것은 버서커의 목과 팔다리, 손, 들고 있던 보구까지 속박했다. "버서커!" 이리야가 소리쳤지만 잠시 뿐이었다. 하늘의 사슬은 버서커를 단단히 동여맸다.
“찢어 죽이겠다고 했느냐?”
길가메쉬가 되물었다. 이리야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길가메쉬는 버서커를 본체만체하며 이리야의 앞으로 다가갔다. 은사의 매가 그 주변을 맴돌았지만 이내 길가메쉬의 보구에 의해 사라졌다. 길가메쉬의 손이 이리야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렸다. 시로가 길가메쉬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지만 듣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는 이리야의 얼굴을 살핀 길가메쉬가 그대로 이리야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리야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버서커가 사슬을 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하늘의 사슬은 신성이 높을수록 강도가 증가했다. 반인반신의 버서커─헤라클래스가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찮구나. 죽어라.”
“멈춰 길가메쉬!”
하늘에서 일렁이던 붉은 창이 우뚝 멈췄다. 령주의 힘이 길가메쉬를 제지했다. 길가메쉬가 고개를 홱 돌려 시로를 노려봤다. 허겁지겁 달려온 시로가 이리야의 앞을 막아섰다.
“네놈이 미쳤느냐.”
“아니, 기다려. 내 말을 들어보라고.”
“쓸데없는 말이면 네놈부터 죽여버리겠다.”
힐끗, 이리야의 안색을 살핀 시로가 침을 꿀꺽 삼키며 길가메쉬를 올려다봤다. 머리 한 뼘은 더 큰 그가 삐딱하게 서서 시로를 내려다봤다. 지금껏 한 번도 좋은 시선은 받지 못했지만, 자신을 향한 살기는 처음이었기에 시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어린 여자애잖아. 분명 뭔가 잘못된 게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리고 시로의 말은 다 나오지 못했다. 은사의 작은 검이 시로의 배를 관통했다. 순식간이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의 공격은 길가메쉬 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이리야가 그 모습을 보며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하하하하!! 어린 여자애라고? 오빠는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찌보면 우는것 같기도 했고, 발악 같기도 했다. 피가 울컥 올라왔다. 앞으로 쓰러지는 시로의 몸을 받아낸 길가메쉬는 자신의 뺨에 튄 피를 쓸어내렸다. 끈적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버서커를 묶고 있던 사슬이 끊어졌다. 도망치는 둘을 쫓지 않은 건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분노는 차갑게 가라앉아 길가메쉬의 이성을 잡아챘다. 아직 품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에미야 시로는 살아있다. 아직 죽지 않았다. 그것만이 길가메쉬를 묶어뒀다. 분명 이대로 저 둘을 쫓으면 완전히 끝낼수 있었다. 이 세상에 살점하나 남기지 않고,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미야 시로가 아직 살아 있었다. 길가메쉬는 천천히 시로를 안아 들고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시로의 옷을 벗기곤 상처를 확인했다. 깊은 상처긴 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살 수 있다. 살릴 수 있어야만 했다.
오래전, 소년의 몸을 꿰뚫었던 은색의 화살촉을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순간 길가메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화살은 소년의 몸을 꿰뚫은 화살은 촉부터 깃까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뚝뚝 흐르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은 그것은 단 하나였다. 하나의 화살이 과녁을 뚫고 들어왔다. 참으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미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황급히 써내린 단막극은 거기서 끝났다.
탁. 탁. 탁. 칼을 도마에 내리치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힐끗 거실을 내다봤다. 언제 갈아입은 것인지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검은 라이더 자켓을 입고 있는 길가메쉬는 누가 봐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생긴. 시로는 굳이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첫 번째는 어째서 그는 아주 뻔뻔하게 거실에 누워 TV를 보고 있는가, 두 번째는 왜 자신은 두 사람분의 식사를 만들고 있는가.
분명 서번트는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길가메쉬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니 일정량의 마력만 공급된다면 수면을 취하지도, 식사 활동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자신이 길가메쉬에게 공급해줄 수 있는 마력이 부족하다 못해 메말라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납득 할 수 없었다. 식사만으로 마력공급이 해결되면 모든 서번트는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마스터와 함께 식사할 만한 서번트가 몇이나 있겠냐만은, 시로는 어젯밤 버서커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으앗.”
딴생각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던 냄비가 끌어 올랐다. 황급히 불을 끄고 안을 확인하자 다행히도 무사한 것 같았다. 시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곤 국자로 살짝 떠 간을 확인했다. 입안에 향긋한 풀 내음이 잔뜩 퍼졌다.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국그릇을 꺼내고, 된장국을 담고, 소스를 둘러 구운 생선을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냉장고에 미리 준비해둔 차가운 두부를 꺼내 썰어놓은 야채와 함께 간장을 곁들였다. 완벽해. 시로는 제가 만들어 놓고도 만족스러웠는지 천천히 그릇을 옮겼다. 그제야 일어나 탁상 앞에 앉은 길가메쉬가 젓가락을 들었다.
“왜 그러느냐?”
시로가 밥을 덜 다 말곤 길가메쉬를 빤히 바라봤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우스웠는지 시로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아니 젓가락 질 할 줄 아는구나 싶어서.”
“……잡종”
“아니, 순수한 감탄사니까.”
시로가 서둘러 변명을 했다. 길가메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시로를 노려보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시로는 밥을 먹으면서도 길가메쉬를 힐끔 쳐다봤다. 생긴 건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와인잔을 홀짝일 것 같았는데 생각 외로 이런 모습도 어울렸다. 시로의 시선을 느꼈는지 길가메쉬가 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또 왜 그러느냐.”
귀찮다거나, 짜증 난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단지 조금 거슬린 듯한 소리에 시로가 아니, 하고 운을 띄웠다.
“그 옷은 어디서 났어? 우리 집에는 그런 옷이 없거든.”
“흥. 당연하지. 게다가 네놈 옷이 나에게 맞을 거라 생각하느냐?”
길가메쉬가 거만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시로의 이마에 사거리 마크가 삐죽 생겨났다.
“그래서 어디서 났는데? 돈은 없었을 텐데 설마 훔친 건 아니지?”
흥, 시로가 식사를 끝냈는지 젓가락을 소리 나게 탁상위에 내려놨다. 길가메쉬가 그 모습을 보며 히죽, 하고 웃더니 품속에서 노란색 카드를 꺼냈다.
“네놈 이런 걸 본 적은 있느냐?”
“…….”
그것은 누가 봐도 부의 상징인 골드카드였다. 시로는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물었다. 어디서? 탁상을 치우는 것도 잊지 않은 채 말이다.
“짐이 못하는 거 봤느냐.”
물론 지금 여기서, 라이더 자켓을 입고, 녹차를 마시며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시로는 애써 부들거리는 마음을 다잡고는 식기를 치웠다. 설거지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길가메쉬가 시로를 붙잡았다.
“앉아 보아라.”
꽉 잡힌 손목이 아팠다. 시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앞에 앉았지만, 옷 아래로 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둘러 아래 팔까지 내려왔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대한 변명을 듣고 싶은데.”
길가메쉬가 팔짱을 끼고 벽에 등을 기댄 채 시로를 바라봤다. 금방 전까지만 해도 풀어졌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 왔다. 시로는 침을 꿀꺽 삼키며 탁상 아래로 자신의 배를 만졌다. 어젯밤 이곳이 꿰뚫렸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길가메쉬의 목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쓰러진 몸은 가누지도 못하고 길가메쉬의 품에 들려있었다.
“나는 소환되고 나서 이미 세 번의 전투를 했다.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전투를 하면 할수록 마력의 소비도 빨라지지. 게다가 어제 네놈의 멍청한 짓 때문에 마력의 절반을 소모했어.”
길가메쉬의 말에 시로는 할 말이 없었다. 어제 분명 자신은 죽을 뻔했고, 그것을 살려 낸 것은 길가메쉬일 터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서번트는 마스터로부터 마력제공에 의해 몸을 유지하고, 그렇기에 서번트는 마스터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네놈은”
“…내가 불완전한 마스터라서 마력이 부족하다는 거야?”
“아니. 서번트가 마스터의 마력이 필요한 건 아주 소량이다. 아무리 네놈이라도 그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문제는 네놈으로부터는 마력공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야.”
탁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길가메쉬는 몸을 앞으로 빼서 시로와 눈을 맞췄다.
“본래 이어져 있어야 할 영맥이 단선되어 있지. 네놈 잘못은 아니다. 아마도 불완전한 소환이 문제였던 거겠지.”
아무런 촉매도 없이 주문도 없이 나타난 서번트. 세이버가 스스로 물러나고, 버서커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묶어 버릴 수 있는 영령. 그것이 길가메쉬였다. 에미야 시로는 길가메쉬에게 남아있는 마력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마력이었으니. 하지만 그것에도 끝은 있겠지.
“최근에 이 근방에서 실종사건이 일어났었지. 그것은 다른 서번트에 의한 것이겠지. 너처럼 덜떨어진 마스터가 서번트의 마력 소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마력을 보충하려고 벌인 짓거리 일 것이다.”
“서번트가 인간을 먹어?”
“간단한 논리다. 자연령은 자연으로부터 힘을 받지. 그렇다면 인간령인 우리들은 대체 무엇에게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너희들이 고기를 먹듯이, 인간령인 우리들은 즉. 길가메쉬의 말에 시로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의 혼을…먹어?”
“그래.”
쾅. 탁상을 내리친 시로가 고개를 숙였다.
“인간을 죽여서 서번트에게 제물로 바치는 마스터는 결코 적지 않다. 서번트가 아무리 강해도 마력의 그릇 자체에는 한계가 있지.”
“하지만!”
“게다가 너는 십 년 전에 이미 겪어봤지 않느냐. 그 대참사를.”
시로의 노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시로는 길가메쉬를 바라봤다. 그 얼굴에는, 눈동자에는, 입가에는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애정도, 증오도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얼굴로 그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알았어?”
“짐은 왕이다. 모를 리가 없지.”
십년 전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 날. 하늘은 까맣게 타오르고 주변은 시뻘겋게 물들어 뼛속까지 활활 태워버리던 그 날. 어떻게 잊겠는가. 에미야 시로는 단 하루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었다. 살아남은 단 한 사람. 그러나 그것 역시 살아남았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비참한 몰골이었다. 살이 타고,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시로는 울고 있는 사람을 봤다. 울고 싶은 자신인데 눈물샘조차 불길 속에서 다 메말라 버린 것인지 나오지 않던 자신 대신 울어주던 한 사람.
“네놈은 성배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네놈을 이루고 있는 근원은 그것과 아주 가까우니 우스운 상황이 아닌가. 마스터.”
꼭 이럴 때만 그는 자신을 마스터라고 불렀다. 시로는 입술을 깨물며 길가메쉬를 노려봤다. 성배 전쟁으로 인해 태어난 것이 자신이었다. 그러니, 시로는 자신의 양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을 마술사라고 말하던 그 사람도 이 전쟁에 참가했을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전쟁에 참가했을까.
“좋아. 협력할게. 그런 녀석들이 성배를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시로의 말에 길가메쉬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네놈은 내게 어떤 방식으로 마력을 제공할 거지?”
코앞까지 다가온 길가메쉬는 어느새 탁상을 넘어 시로를 바닥으로 밀쳐 넘어트렸다.
“뭐,뭐야…”
“네놈도 다른 녀석들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칠 텐가?”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한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시로가 그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손목을 잡힌채 바닥에 내리눌러졌다.
“그럼 어떻게 할 거지? 네놈의 몸이라도 바칠 테냐? 그러고 보니 마술사의 체액에는 마력이 흘러나온다고 하지.”
길가메쉬의 동공이 가늘게 조였다. 한 손으로 가볍게 시로를 제압한 길가메쉬가 다른 한 손으로 시로의 턱을 붙잡고 올렸다.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입술이 겹쳐졌다. 시로는 입을 벌리려 애쓰지 않는 한편 그를 밀어내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쉽지 않았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입술 때문이 숨이 차 시로는 저도 모르게 앙다문 입술을 벌렸다.
“읍,읏”
때를 기다렸다는 듯 침범해온 뜨거운 혀가 입안을 헤집었다. 혀가 얽히고, 입천장을 긁어 올렸다. 허리가 저절로 튀었다. 시로는 입술을 깨물고, 턱을 깨물며 다시 입안에 침범하는 길가메쉬의 혀를 이번에는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키스는 거칠고, 달콤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자 빛에 반사된 길가메쉬의 입술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길,가메쉬.”
하반신을 지분거리는 길가메쉬가 시로의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붕대 위를 긁어 내리던 손은 이내 옷을 끌어올렸다. 판판한 가슴이 드러나자 길가메쉬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시로는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채 애써 고개만 돌렸다. 길가메쉬가 살을 깨물 때마다 짜릿짜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안 돼. 머릿속에서 적신호가 울렸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분명 아침에 령주로 명했을 텐데도 길가메쉬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움직였다.
“안 돼…하지마 길가메쉬!”
그러다 시로의 확실한 명령에 몸이 우뚝 멈췄다. 쳇,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길가메쉬가 시로를 내려다봤다.
“네놈도 기분이 좋았으면서 무슨 짓거리지?”
“그것과 이건 별개야. 끝났으면 떨어져.”
흥.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에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로는 황급히 그에게서 손목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손목을 한 참이나 물어뜯곤 놔주지 않았다. 키스할 때보다 더 민망한 소리가 방안에 가득 울렸다. 길가메쉬는 시로의 손목을 한참이나 물어뜯고, 빨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로를 쳐다봤다.
“뭐 침보다는 피, 피보다는 정액에 더 많이 들어있다고 하지만.”
“령주…쓸거야.”
안색이 하얗게 질린 시로가 손목을 쓸어내렸다. 마술사의 체액에 피, 라는 것도 있었는데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시로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학교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넘어서야 학교에 도착한 시로는 토오사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싫어도 알 수 있었다. 학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웠다. 어젯밤 운동장 저 근처에서 서번트 두 명의 싸움이 있었고, 복도 끝에선 내가 한번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로는 턱을 괴고는 하품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에미야 시로는 시력만은 쓸데없이 좋았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런 외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후유키 시에는 한 명 밖에 없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뻔뻔하게 교문을 통과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학교 주변을 훑고는 곧바로 시로를 마주 봤다. 아직 다른 사람이 보지는 않은 것 같아, 시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느냐는 선생님의 말에 대충 화장실이라고 대답한 시로는 일 층까지 뛰어 내려갔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복도로 들어온 길가메쉬는 시로를 보자마자 흥 하고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요사스러운 미소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새빨간 입술에서 한숨이 길게 나왔다.
“너,너 왜 여기에 있어?”
“아무리 반 푼어치 마스터라고 해도 일단은 내 마스터이니, 지켜주러 온 게 당연하지 않느냐.”
한마디로 걱정돼서 왔다. 는 말을 저렇게 빙빙 꼬아 말하다니, 시로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다가는 지켜주긴커녕 들켜서 학교가 풍비박산 나도 모를 일이다. 그때였다. 시로의 머리 위로 목검 하나가 빠르게 날아와 정수리를 때렸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은 시로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이 학교에 하나뿐이었다. 그랬기에 시로는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투정을 부렸다.
“화장실에 간다던 시로군이 오지 않아 걱정돼서 직접 찾으러 왔잖아!”
어깨에 목검을 얹고 다른 한 손은 허리에 얹은 후지무라 타이가가 시로를 보며 소리쳤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수업을 빼먹어도 되는 거야? 시로의 말에 타이가는 금세 아차 하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돌아가려다 돌연 시로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화장실 간다면서 왜 여기 있는 거야?”
그제야 시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길가메쉬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차마 소리쳐 부를 수도 없어 시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타이가를 보내야 했다. 늦으면 안 돼. 하는 말도 잊지 않고서 그녀가 사라지고 몇 초 후, 갑작스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란 시로가 원망스런 눈초리로 그를 올려다봤다.
“길가메쉬…”
“무척 시끄러운 잡종이군.”
후지 누나는 잡종이 아니야. 하는 시로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길가메쉬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 위로 미세하게 마력의 잔재가 느껴졌다. 그것도 이미 여기에는 없는 마력이라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경계해둬서 나쁠 건 없었다. 성배 전쟁에는 항상 이레귤러가 존재했으니까.
“그나저나 어딜 갖다 온 거야?”
“음? 뭐가 말이냐.”
“금방 후지 누나가 있을 땐 어디 갔었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마스터.”
그리고 길가메쉬는 다시 한 번 눈앞에서 사라졌다.
“길,길가메쉬?”
“영체화라는 거다.”
또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로가 앞으로 넘어졌다.
“쯧…우리 서번트는 평범한 인간의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평소에는 이렇게 영체화 해 있다가 전투 시에만 실체화 한다.”
아, 그렇구나. 시로가 멍청한 얼굴로 일어서서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근데 그럼 지금까지 왜 실체화 하고 있었던 건데?”
“뭣 하러 영체화 같은 번거로운 짓을 하는 거지? 무엇보다 마력제공도 하지 않는 마스터를 위해서?”
실체화가 더 번거로운 것 같은데. 시로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뒷말에 반박할 자신도 없었거니 외 들킨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어딜 보나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그저 다른 사람보다 잘생긴.
“평범한 학교로군.”
“내가 말했잖아. 위험할 일은 없을 거라고.”
“어제는?”
윽. 시로가 정곡을 찔린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모습을 본 길가메쉬가 작게 웃더니 시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마칠 때까지…얌전히 있어야…되?”
“짐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건방지구나 마스터..”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느새 영체화를 하고 사라진 길가메쉬를 보며 시로는 가볍게 웃곤 교실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어쩐지 마음 한켠이 든든해져 수업을 듣는 내내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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