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 미안해요...사랑해요..
해리 하트는 완벽하다. 아니 했다.
굳이 다른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는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그리고 아직도 많은 여성을 울리는 새침한 얼굴과 젠틀한 목소리는 당연했고, 그의 가문과 출신 역시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물론 성격이 나쁘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을 굳이 두 번이나 설명할 정도로 멀린은 한가하지 않았다. 어쨌든 요 이십 년간 킹스맨에서 최고의 요원이라 불리던 그였다. 아무리 나 이어린 신예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 바닥에서 베테랑인 그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건 이제 옛날이야기다.
그가 회의시간에 늦는 건 그가 갤러해드가 됐을 때부터 항상 있었던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막 킹스맨 에이전트가 된 에그시까지 늦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물론 에그시가 늦는데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해리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멀린은 일부러 해리보다 늦게 들어오는 에그시를 보고 부들부들 떨며 어깨를 붙잡았다. 둘이 동거한다는 것은 신입 요원들 빼고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한걸 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에그시가 그걸 들키기 싫어한다는 것도, 하지만.
“에그시…아니 갤러해드 넥타이가 바뀐 것 같은데.”
멀린이 지적을 하고 나서야 고개를 숙여 제 넥타이의 상태를 확인한 에그시가 곤란한 얼굴을 하며 멀린을 올려다봤다. 어떡해요. 집에 다녀오기는 너무 늦었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에그시를 보며 멀린은 어쩔 수 없다며 억지로 에그시를 만찬장에 밀어 넣었다. 크흠.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새파랗게 어린 신입이 늦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멀린이 고개를 들었을 때 해리의 가슴팍에 있는 넥타이를 봤다. 저 인간이 진짜.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얼굴이 토마토가 돼서 만찬장을 빠져나올 에그시를 떠올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째 저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에그시가 해리와 연애하는 걸 숨기고 싶어 한다는 걸 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다른 요원들이 알면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지만) 좋지 않게 볼 게 뻔했기 때문이고, 멀린 역시 그런 에그시의 의견에 찬성했다. 하지만 현 아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떻게 해서든 에그시에게 도장을 꾹꾹 박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 이십 년을 넘게 봐왔던 사람이다.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멀린은 제 어린 제자가 불쌍해서라도 해리에게 양해를 구했고, 해리는 못마땅한 듯하면서도 에그시가 곤란해 할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결국 사건은 터졌고, 에그시는 반쯤 울 것 같은 얼굴로 만찬장을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아서의 얼굴을 노려보던 멀린은 만찬장 안에 있던 일들을 이어피스로 모조리 듣고 있었다.
-갤러해드. 오늘 넥타이가 잘 어울리는군.
아주 뻔뻔한 얼굴로, 그 침묵이 가득한 자리에서 그 말을 내뱉었을 해리와
-나도 오늘 타이를 바꿨는데. 어떤가?
둘에게 꽂히는 시선. 그리고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 들듯 고개를 숙이는 에그시.
“해리…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안경을 벗고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에그시가 물었다. 아마 조금만 더 고개를 숙였다면 그대로 중력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뚫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저한테 개망신을 줄 수가 있어요…”
“개망신? 에그시 지금 넌 나와 교제 중인 게 개망신이라고 생각하니?”
아, 멀린은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분명 아서에게 올릴 보고서와 갤러해드에게 줄 다음 임무가 있었는데.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요!”
“아니. 그런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구나. 내가 얼마나…”
“해리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에그시가 말을 삼켰다. 결국,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내뱉어버린 에그시는 고개를 돌리고, 해리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에그시를 바라봤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리가 되묻는 말에 에그시가 고개를 홱 돌렸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얼굴은 누가 봐도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전 해리에게 남겨진 빚이니까요. 해리는 그걸 갚는 것뿐이고.”
멀린에게 임무를 받아든 에그시가 뚜벅뚜벅 걸어 만찬장을 나갔다. 둘만 남겨진 만찬장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들어올 틈새도 없는데 멀린은 괜히 소매를 정리했다.
“멀린.”
해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술이 고파 보였다.
“역시 에그시는 내가 부끄러운 걸까? 뭣 때문에? 역시 나이 때문이겠지. 에그시는 아직 젊고 아름다우니까 나보다 훨씬 젊고 멋있는 사람을 만나야겠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사실 빚을 갚는다고 했긴 했지만, 오히려 더 쌓아 가고 있는 기분이야.”
그건, 아닐 겁니다. 멀린이 애써 한마디 했다. 에그시가 저렇게 나가버린 이상 한동안 킹스맨 본부에선 찬바람뿐만 아니라 칼바람이 불 것이다.
“혼자 있고 싶군.”
그 말을 끝으로 멀린은 만찬장을 나왔다. 싸운 건 둘인데 어째 자신의 피까지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중앙 제어실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에그시가 벌떡 일어났다. 넥타이는 풀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그시는 멀린에게 받은 파일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할게요. 이거.”
사실 이건 멀린이 둘의 애정행각이 너무 심해 한동안 에그시를 멀리 그리고 되도록 오래 파견시키기 위해 남겨둔 거였다. 물론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멀린은 파일을 받아 들며 떨리는 에그시의 손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린애는 애였다.
“아서가 허락해야…”
“아서는 허락할 거에요. 그쵸 아서?”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멀린은 “그래.” 라며 말하는 해리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번만은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한 달 정도면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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