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에그시를 경찰서에서 빼내고 펍에서 저를 보는 반짝이는 눈동자에 서로의 운명이 바뀌는 미래를 보았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작은, 예를 들면 제 손목시계 안에 있는 톱니바퀴와 같아서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저와 에그시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고, 저만이 바꿀 수 있는 미래였다.
현 아서 그러니까 해리 하트는 사랑이라곤 해본 적 없는 남자였다.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있었으나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이제 그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해리가 서른 살의 줄을 타자 초조해 졌는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에게 여자를 붙이려고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내 해리는 한동안 긴 생머리만 봐도 질색을 했고, 결국 해리는 제 친구를 따라 킹스맨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더 이상 손쓸 도리조차 없었다.
킹스맨에 규칙 중에 가족을 만들면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다만, 해리는 여태껏 일해 오면서 수많은 동료들이 가족 때문에 목숨을 잃고, 배신하고, 도망치는 것을 봤다. 때문에 해리에게 가족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고, 연인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웠으며 하물며 사랑이라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에그시를 봤을 때. 그 작은 아이가 웃었을 때. 한껏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을 때. 침대 아래에서 잠자리 매너를 배웠을 때. 그 때 처음으로 해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막을 수도 없었고, 도망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이 에그시를 밀어내고 상처주는 일은 할 수 없었으니 뿌리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해리 하트는 인정했다. 자신이 에그시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에그시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해리가 살아 돌아왔을 때 에그시는 해리를 붙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그때 자신에게 매달려 우는 그 뒤통수가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해리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사귀자거나 연애를 하자거나 그런 거창한 고백은 없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관계로 발전했고, 에그시는 거침없이, 그리고 해리는 자연스럽게 사랑의 말을 내뱉었다. 주변에서 적당히 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에그시가 다쳤다. 킹스맨에게 부상은 흔한 일이었고, 에그시의 상처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해리가 놀라서 달려왔을때 에그시는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별거 아닌데…”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모습을 보며 해리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이제 아서의 자리에 앉은 해리는 현장에 나갈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킹스맨의 일은 위험했다. 언제 죽을지 몰랐다. 그건 에그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
에그시가 꽃을 좋아할까.
반지는 좀 더 화려한 걸 골랐어야 했나.
역시 마티니 보다는 와인이 좋겠지.
그래, 그래서 해리는 에그시 때문에 난생 처음 새빨간 장미를 들고, 몇날 며칠을 고민을 거듭한 끝에 고른 반지를 품에 넣고, 마티니 대신 레드와인을 준비한 채 에그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힐끔 보다 제 넥타이를 한번 느슨하게 풀고, 다시 시계를 보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목을 풀고, 그러기를 몇 십초. 문이 노크도 없이 쾅 열렸다. 오늘은 장기임무를 다녀온 에그시가 이주만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fucking!! 멀린이 계속”
오자마자 안경도 벗지 않고(아마 통신도 끄지 않았을 것이다.) 멀린의 욕을 내뱉으려던 에그시는 해리가 내민 꽃을 보고 입을 쏙 다물었다.
“어, 어, 해리…지금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지금 수십 가지 고백 중에 네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단다.”
품속에서 꺼낸 상자안에는 심플한 반지가 들어있었다. 에그시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와 해리의 손에 있는 반지를 번갈아 봤다.
“가장 로맨틱한 고백을 찾고 싶었는데, 도저히 찾아지지 않더구나.”
“해,해리…”
해리는 에그시의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주며 다른 한 손으론 에그시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