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에서 지급되는 무기들은 생각보다 일상생활에서도 훌륭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라면 좋겠지만 정말 쓸모가 없었다. 불을 붙이면 터지는 라이터라던가 자세 한 번 잘못 잡으면 독을 내뿜는 구두라던가(그 자세를 얼마나 자주 하겠느냐마는) 아, 그래도 시계는 쓸만했다. 가끔 해리가 쓸데없는 기억이라며 제 목에 픽픽 기억삭제 침을 날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만년필은, 음.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군. 아무튼, 에그시는 완벽하게 수트로 무장을 하고 무기도 지니고 다녔지만, 일상생활에는 영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비가 자주 오는 영국에서 우산은 쓸만하지 않냐는 멀린의 말에 에그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조금 지난 일이다.
“이런…”
비가 내렸다. 갑작스런 비는 아니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 아까워서라도 에그시는 우산을 펼쳤다. 손잡이 부분만 조심하면 총이 나갈 일도 없었기에 살짝 잡아드는 것을 해리가 들어올렸다. 네가 들면 내가 목이 아프단다. 하고 웃으며 말하는 게 분명한데 왜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한지 모를 일이다. 해리 우산은요? 하고 물으니 캡에 두고 내렸단다. 혹시 치매? 까지 말했다가 우산에서 쫓겨날 뻔 한 에그시가 해리의 품에 달라붙었다. 내 우산인데! 하고 소리치는 것을 모른척한 해리가 건널목 앞에 섰다. 빨간불이었는데 어차피 차도 없었고, 그냥 지나가도 되겠지, 하는 에그시를 잡아챈 해리가 그를 품에 넣었다. 해리? 천천히 돌아보는 에그시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해리가 우산을 앞으로 숙였다. 비가 해리의 어깨를 타고 톡톡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수트에 방수기능도 있었던가?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벌린 에그시는 더운 숨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아, 해리. 에그시가 몸을 기대자 해리가 우산을 다시 바로 들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바뀌었다. 해리가 버튼을 누른 것이다.
“…누가 봤으면 어쩌려구요.”
“아무도 없으니 그냥 지나려고 한 거 아니니?”
한마디도 져주는 법이 없다. 아, 알겠어요! 에그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것을 어렵지 않게 따라붙은 해리가 에그시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줬다.
그래서? 멀린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멀린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에그시가 소파에 쿠션을 끌어안고 기댄 채로 말을 이었다.
“또 얼마 전에는요.”
해리와 동거한 이후에 같이 출근하는 건 당연했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각을 했다. 사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침마다 일어나지 못하는 해리를 억지로 깨우고 아침준비를 하고 제이비의 밥을 챙겨주고 옷을 입고나면 해리는 아직 가운을 입은 채였다. 해리! 하고 에그시가 다그치면 그제야 들고 있던 커피와 신문을 내려놓고 에그시의 허리를 끌어안은 해리가 속삭였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아침은 길단다.” 길긴 개뿔. 에그시는 블랙캡 안에서 흐트러진 넥타이를 다시 매야했다.
킹스맨이라고 적힌 양복점 앞에 도착하자 먼저 내린 해리가 잠깐 기다리라며 우산을 팡! 펼쳤다. 어차피 몇 초도 안 걸릴 거리를 뭣 하러 우산을 펼치냐는 말에 해리가 에그시의 손을 잡고 웃었다. 해리? 에그시가 차에서 몸을 일으키려 고개를 들었을 때 겹쳐지는 입술에 숨을 삼켰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진짜! 라고 소리는 치고 싶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툭. 우산이 해리의 손에서 떨어졌다. 에그시는 차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해리를 보며 안 된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금세 자신의 위에 자리를 잡은 해리를 올려다보며 에그시가 눈을 꼭 감았다. 멀린 미안해요! 라고 속으로만 사죄를 한 채 환상적인 시간을 보낸 에그시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오늘 지각한 이유가?”
“그렇죠. 멀린!”
에그시가 멀린에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그러니 우산을 검은색이 아니라 투명한 걸로 바꾸면 어떨까요? 해리도 그럼 그런 짓 못할 거예요. 멀린이 혀를 찼다. 그 인간이라면 우산이 투명하던 분홍색이던 노란색이던 심지어 도청기가 달려 있다고 한들,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하고보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