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파레트 13. 고양이 혀/배려/“좀 전에 생각한건데.”
- 익명님 리퀘
에그시는 추위를 많이 탔다. 그렇다고 더위를 안타냐면 그것도 아니었기에 해리는 그런 에그시를 보며 참 지랄 맞은 몸뚱아리라고 입을 놀렸다가 그 지랄 맞은 손에 입술이 터져야 했고, 그 이후로 해리는 에그시를 보며 욕을 하지 않았다. 아니, 원래 욕은 잘 안하는 성격이었는데 이게 다 에그시 때문이었다. 끽 하면 말끝에 fuck을 달고 다니니, 옆집에 살면서 그것도 18년 동안같이 다니면서 자신이 에그시에게 욕을 한 것이 손에 꼽는 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에그시는 두 손, 발가락 모두 접어도 모자랄 정도로 욕을 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해리였기에 이번 겨울에도 그냥 에그시에게 따뜻한 핫초코를 사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근데 또 지랄 맞게도 에그시는 뜨거운 걸 못 먹었다. 그건 정말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애써 핫초코를 사주자 바로 컵에 입술을 묻은 에그시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화들짝 놀라며 입을 떼곤 혀를 내밀었다. 뜨거워. 하고 우는 뉘앙스를 취하자 해리는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왜, 왜 웃어! 에그시의 모습은 고양이 보다는 개에 가까웠다. 고양이 혀를 가진 개라니 귀엽기도 하지, 해리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말을 집어삼키며 에그시의 입가를 손수건으로 짓누르듯 닦아냈다. 하얀 피부는 눈에 띌 정도로 창백했고, 손발도 찼다. 어릴 땐 종종 서로의 집에서 함께 자기도 했다. 커서는 침대가 좁아서 그러지 못했지만, 그럴 때마다 스치는 에그시의 발끝은 차가웠다. 다음날 아침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잡은 손도 차가웠고, 추위를 많이 타면서도 답답한 걸 싫어해 휑하게 드러난 목덜미는 보기만 해도 시려웠다. 에그시에게 장갑과 목도리를 선물한 것은 해리였다. 집에 들어온 선물 중에 남는 걸 가져왔다고 하자 에그시는 내가 거지로 보이냐며 박박 우겼지만, 해리가 손수 메주는 목도리를 벗어 던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해리는 매년 커가는 에그시에게 새로운 장갑과 목도리를 선물했다. 올해는 필요 없잖아. 더는 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에그시가 했던 말이었다. 해리는 저보다 아래에 있는 에그시의 정수리에 뽀뽀를 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촌스러워. 해리가 하는 말에 에그시는 또 욕을 하려고 했지만, 꽉 끌어안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fucking 해리 하트.
“내가 좀 전에 생각한건데.”
“응?”
에그시가 낼름낼름 혀를 내밀며 핫초코를 마셨다. 그럴 거면 차라리 아이스초코로 바꿀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 지랄 맞은, 에그시는 위도 약했다. 이 추운 날 찬 걸 먹었다간 바로 배가 아프다며 징징 거릴게 분명했다. 여름에는 항상 그걸 잊곤 찬 걸 먹어 종일 선풍기를 켠 채 배 위에만 담요를 덮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너는 나하고 결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켁. 걸릴 것도 없었는데 에그시는 가슴을 붙잡고 기침을 토했다. 핫초코가 역류하다 못해 다시 우유와 초코로 분리된 것만 같았다. 해리는 칠칠맞게. 라며 다시 에그시의 입가를 닦아줬지만, 이번엔 에그시가 손을 쳐냈다. 탁. 찬 공기와 함께 소리가 크게 울렸다.
“노, 농담 재밌네.”
“농담 아닌데.”
금방까지 웃고 있던 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에그시의 들썩이던 어깨도 그대로 굳었다.
“에그시.”
해리가 한숨을 쉬며 에그시의 손을 잡아당겨 제 앞으로 가져갔다. 뭐하려고, 에그시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해리는 완고했다. 꽉 붙잡힌 손 위를 닦아내는 섬세한 손놀림에 에그시의 긴장이 한껏 풀어졌다.
“생각해봐. 매년 크리스마스 선물 준게 누군지.”
어, 에그시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해리와 함께 보냈다. 선물을 교환하며. 서로 여자친구 하나 없는 놈이라고 낄낄 거리며. 생각해보니 이놈은 여자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였지만.
“너 아플 때 누가 옆에 있었는지.”
그거야 당연히, 에그시는 엄마라고 소리치려다가 매번 학교를 마치면 제 옆에 와서 수업내용을 읊어주는 해리를 떠올렸다. 그땐 정말 죽이고 싶었는데. 아픈 사람 앞에서 공부를 가르치고 싶냐고.
“발렌타인이나 화이트데이에 내가 선물을 준게 누군지.”
해리였다. 이건 빼도 박도 못했다. 에그시는 이상하게 발렌타인데이에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인기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어째 매번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에 비해 옆자리인 해리의 책상에는 항상 초콜렛과(심지어 화이트데이날 남자가 사탕을 주기도 했다) 사탕이 가득했다. 해리는 버릴 순 없고 혼자 먹자니 너무 많다며 에그시에게 항상 나눠줬었다. 그런데 시발놈아 이건 네가 사서 준게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확신이 없었다. 가끔은 오다주웠다. 하며 에그시에게 과자를 던져준 적도 많았기에.
“네가 이렇게 칠칠이처럼 흘리고 먹으면 닦아주는 게 누군지. 응, 에그시?”
그러고 보니 이놈은 독한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리며 매번 주머니에는 감기약과 핫팩 같은걸 챙기고 다녔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말하면 다음날 꼭 보고 와서 같이 얘기를 해주었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고 하면 음반을 구해왔었다. 지금까지, 에그시는 그것이 단지 해리가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냥 나랑 잘 맞는 소꿉친구구나, 아마 해리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 것들이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그거 승낙하는 거지?”
소꿉친구니까 하는 말인데 해리 하트의 성격은 정말 지랄 맞았다. 이 소리를 한 번 했다가 정말 지랄 맞은 게 뭔지 본적이 있으니 더 이상 그 단어를 꺼내는 일은 없었지만, 해리 하트는 정말 그 지랄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렸다. 외모와 성적, 집안 뭐 하나 빼놓는 게 없었다. 딱 하나, 제일 중요한 성격이 모나긴 했지만 누구나 해리의 얼굴을 한 번 보면 납득했다. 저 얼굴에 저 성격이면 그럴만 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평가였다. 눈앞에서 고백하던 중간에 뻥 차기. 편지 찢기는 일상이었고, 대놓고 못생겼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옆에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몰라도 에그시는 그 모습을 보며 먹던 삼단 아이스크림을 바닥으로 툭 떨어트렸다. ‘…미,미친놈아 뭐하는 거야!’ 에그시의 외침과 동시에 해리는 뺨을 맞았다. 그땐 정말 놀랐다. 설마 해리의 뺨을 때리는 애가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도 뺨을 맞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해리는 에그시에게 다시 오단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화를 풀라고 했지만 에그시는 도저히 속이 좋지 않았다. 아까 그 여자애 때문인가, 까지 생각하다가 끊어질듯 아파오는 위장에 에그시는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해리의 입에 처박았다. 그날은 종일 끙끙 앓으며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해리는 끝까지 미안하다고는 안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거절해도 해리 하트는 자기 고집대로 할 것이었고. 생각해보면,
“시발…어차피 별로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에그시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에그시의 말이 맞았다. 결혼?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물론 해리라면 내일 당장 식을 올리자며 웨딩마차에 자신을 태워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만나서 같이 학교로 향하고, 전공만 다르다 할 뿐 밥은 항상 같이 먹고 서로 마치는 시간이 달라도 항상 같이 집에 갔다. 일주일에 네 번은 서로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주말에는 같이 놀러가거나 종일 함께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근데 결혼하면 뭐가 달라질까? 잠자리? 호칭? 여보? 자기? 달링? 에그시는 해리와 저가 사랑한다고 하는 상상을 했다. 썩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제게 사랑한다고 하는 해리라니, 어쩌면 저는 영국의 여자들 혹은 남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도 몰랐다. 에그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얼굴에 열이 몰렸다.
“아이는…낳아 줄 수 없지만……”
아, 에그시. 해리가 내뱉은 ‘에그시’라는 이름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빛나는 하나의 단어 같았다. 해리가 불러주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 그런.
“금방 그거 반칙이야.”
덥석. 에그시의 목도리를 잡은 해리가 강하게 에그시를 끌어당겼다. 손에 있던 핫초코가 쏟아질라 그것을 쳐내지 못한 에그시가 그대로 앞으로 끌려갔다. 입술이 부딪쳤고, 곧이어 깨물렸다. 어서 열어보라는 듯 혀로 핥자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해리의 숨을 받아 들였다. 뜨거웠다. 겨울이라고 하기에 해리의 체온은 너무나 뜨거웠다. 그렇지만 그 뜨거움 때문에 혀가 따끔거리거나, 쓰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게 딱 맞는 온도였다. 딱 이 정도의 온도만 있더라면 겨울은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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