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그시가 렌트보이인 설정
’에그시‘ 그 목소리가 어디의 누구 것인지 에그시는 모른다. 그러나 불현듯 머릿속에 맴도는 낯선 이의 방문을 반가워할 사람은 없었다. 에그시는 한참이나 머릿속을 맴도는 그 목소리를 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눈이 오면 찾아오는 그 아이는 자신의 골반 정도 오는 위치에서 고개를 들고는 수줍게 웃었다. 커다란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주 예쁜 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손안에 감겼다. ’에그시.‘ 다시 한 번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야 나는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린 에그시가 창밖을 내다봤다. 빌어먹게도 눈이 오고 있었다.
손으로 호호 입김을 불며 손을 녹인 에그시는 한적한 놀이터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그네에 앉았다. 젠장, 눈 오는 날은 이래서 싫다.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면 딘에게 맞을 게 뻔했다. 벌써부터 한쪽 뺨이 아렸다. 게다가 눈까지 오는데 쫓겨나기 까지 하면……상상만으로도 최악이군. 결국 에그시는 공원을 벗어나 시내로 가기로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안 되는 날에는 뭘 해도 안 된다. 에그시는 터진 입술을 소매로 훔치며 골목을 뛰쳐나왔다. 호군 줄 알았더니 순 날강도였다. 돈이 없어서 입으로만 해달라던 사내가 갑자기 흥분했는지 달려들었고, 욕을 하는 에그시의 뺨을 내리쳤다. 씨발, 그런다고 당하고 있을 에그시였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래도 이 바닥이 몇 년 째인데 저를 지킬 수 있는 호신술-이라고 하기도 민망하지만-은 당연히 익혀두고 있었다. 남자를 때려눕히고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노란 가로등 아래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던 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서였는지, 마음이 급해서였는지 바닥이 미끄러운 것은 생각도 못하고 빨리 걷던 에그시가 휘청거렸다. 아, 씨발, 진짜 되는 일이라곤 없군. 지금 넘어지면 백퍼 머리가 깨질 텐데. 순간적으로 많은 것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의 상상과는 달리 뒤에 사람이 있었는지 어깨가 붙잡혔고, 머리가 깨져 새하얀 눈에 딸기 잼을 토해놓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에그시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고 몸을 돌려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하고, 그리고는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을 다시 한 번 붙잡혔다.
“에그시?”
“…누구세요?”
분명 그것은 저의 이름이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에그시의 대답에 부드럽게 웃은 남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에그시의 팔을 붙들었다. 왜, 왜 이러세요. 비쩍 말라 보이는 남자는 그래도 자신보다 컸고, 손쉽게 에그시를 구석으로 잡아당겼다.
“길 한가운데서 그러고 있는 건 매너가 아니잖아.”
그리고 생각보다 매너가 좋았다. 나한테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기대했던 마음을 쏙 잡아넣고 남자에게서 빠져나왔다. 의외로 남자는 힘을 주지 않았다.
“나 정말 기억 안 나?”
아, 혹시 예전에 받았던 손님 중 하나였던가. 하지만 에그시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잘생긴 남자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에그시는 팔짱을 끼고서 고민하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에그시의 말에 남자가 기대로 가득 찬 눈을 하고서 응? 하고 되물었다.
“모르겠는데요.”
그리고 금세 고개를 숙이는 남자는 생각보다 재밌었고, 에그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나에게 매줬다.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치는 에그시의 두 손을 붙들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였다. “에그시.” 남자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렀을 때 에그시는 그가 꿈속의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리 하트야. 내 이름. 아직도 모르겠어?”
**
그러니까 십 년도 더 전에 일이었다. 에그시가 몸을 팔기 전, 엄마가 딘을 데려오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아니 그보다는 앞이었던가? 어쨌든 가세가 기울기 전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옆집에 해리 하트라는 아이가 있었다. 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똑 닮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애 같지 않은 아이였다. 하얀 피부와 분홍색 입술이 그랬다. 항상 자신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긴 했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친한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해리는 말이 없었고,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반면 에그시는 날이 밝을 때는 항상 골목을 뛰어다녔다. 부모님이 친한 사이였던 것이 둘의 접점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같이 저녁 식사를 했고, 부모님들은 당연히 둘을 붙여 놨다. 그 이후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그마저도 없었다. 엄마는 매일 술을 마셨고, 돈이 다 떨어졌을 땐 집을 팔아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해리와 함께한 것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에그시가 해리를 기억하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그 후 매일 같이 딘에게 맞았다. 에그시가 해리를 잊는 건 쉬웠다. 철이 들 무렵에는 몸을 팔아 번 돈을 딘에게 매일 상납해야 했고, 그보다 더, 머리가 컸을 때쯤엔 그냥 맞고 돈은 숨겼다. 가끔 숨긴 걸 들켰다가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입원한 적도 있었다.
“아. 그래 해리 하트. 기억나. 어릴 때 우리 옆집에 살았지. 오랜만이네. 반가워. 그럼 안녕.”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도 못 하는 저에게 반갑게 인사해주는 해리는 정말 좋은 사람이며, 새빨갛게 물든 얼굴은 그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싫었다. 에그시에게 그때의 추억은 꼭 아픈 손가락처럼 제 배를 쿡쿡 쑤셨고, 해리가 나타나는 순간 잊고 있었던 아픔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런 그를 싫어하는 자신이 경멸스러워서 에그시는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해리가 매준 목도리를 벗어 그에게 안겨주자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에그시 잠깐만.”
“왜.”
또 붙잡는 것이 너무 절박하여 에그시는 멈춰 서서 해리를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하자.”
“나는 너랑 할 얘기가 없는데.”
“에그시.”
“해리 하트.”
단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목이 탔다. 에그시는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를 향한 질투와 자신에 대한 경멸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너랑 단란하게 앉아서 얘기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 우리가?”
그제야 힘이 빠지는 손을 쳐낸 에그시가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이제는 붙잡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그시의 예상은 또 한 번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대로 들어가면 새 아빠한테 맞을 텐데? 여동생 분윳값은 벌어가야 하지 않겠어?”
에그시가 고개를 돌렸다. 해리는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아직도 그 갈색 눈을 하고, 웃으면서.
“오늘 돈도 못 벌었잖아.”
“…….”
“나한테 팔아.”
이 거리에 마치 해리와 저, 단 둘뿐인 것처럼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나 눈이 왔다.
“에그시.”
나쁜 아이는 아니었으나.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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