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피아au
- 퍼록시 / 퍼시벌에그시
- 사망소재
목을 졸랐다. 길고 가느다란 목은 놀랍게도 제 손안에 꼭 들어 왔다. 그것은 저항 한번 없이 제 밑에 눌려 있었다. 펄떡펄떡 뛰는 혈관 아래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과 뼈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제 손에 모조리 박살나고 말 것이다. 뼈는 부러져 피부를 뚫고 나올 것이고, 근육은 찢어져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도 소년은 저항 한 번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 밀쳐 넘어졌을 때도, 자신이 그 위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를 때도, 커다란 두 손이 목에 닿았을 때도, 서서히 힘을 주고 있는 지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늘어진 몸은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소년은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소년을 주워온 그 날부터.
탕. 탕. 탕. 몇 번의 의미 없는 총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남자는 이미 죽은 시체 위에 몇 번이고 총을 갈겼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고약할 법도 한데 남자는 근처 소파에 가서 몸을 기댔다.
만약 그가 자신에게 빌었다면 살려줄 의향도 있었다.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눈물로 호소한다면 지금껏 통한 정을 봐서도 그만은 살려줄 수 도 있었다. 물론 그와 씹질 한 년은 절대 살려두지 못하겠지만,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앞에서 여자를 감쌌다. 첫발은 그의 미간에, 두 번째는 여자의 목구멍에 처박았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남자의 오랜 연인이었다. 아니 이었던가? 혹시 혼자만의 착각이었던가? 남자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시체를 치우곤 카펫을 거뒀다. 허, 그곳엔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끽해야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통로였다. 문을 열자 눈물 때문에 잔뜩 엉망이 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미치도록 그와 닮아있었다. 아이가 있었던가, 남자는 아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저항한 번 없이 끌려 올라온 아이는 시체를 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러워. 남자가 다시 총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아이가 딸꾹질을 멈추며 숨을 참았다.
“꼬마야 이름이 뭐니.”
아이는 옷이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어느새 총을 아이에게 겨누고 있었다.
“어,어차피 끅, 죽일 거면서, 흐끅, 뭘 물어요.”
맹랑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꼭 그와 닮아 있어서 남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
그리고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다. 무참히 아이의 머리를 꿰뚫고 벽에 박혀야 할 총알은 나가지 않았다. 아이는 눈을 살며시 떴고, 해리는 탄창이 빈 것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자 반항하는 것을 기절하는 시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운이 좋구나.”
물론 아이가 그것을 들을 일은 없었다.
에그시가 크는 것은 정말 빨랐다. 통통하게 차올랐던 젖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빠졌다. 가방을 뒤로 메고 학교에 다녀야 할 시간에 에그시는 해리에게 총을 쥐는 법. 칼을 휘두르는 법. 독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가끔 해리는 에그시가 자신이 부모를 죽인 원수를 잊었다고 생각할 만큼 해리를 잘 따랐다. 그러다가도 제 잔에 담긴 마티니의 향이 묘하게 변할 때마다 에그시를 칭찬했다. 바닥에 짓누르고 머리를 발로 밟은 채로, 해리는 마니티를 바닥에 붓고는 에그시에게 핥게 했다. 죽을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니 말렴. 해리의 말에 에그시는 이를 악물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고, 해리는 에그시를 발로 걷어찼다. 그 이후에 에그시가 해리의 음식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요리는 모조리 해리의 몫이었고, (가끔 에그시는 그에게 고용인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해리는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쓰지 않았다. 정작 가장 위험한 것은 곁에 두면서. 에그시의 말을 해리는 무시했다.) 에그시는 해리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나이프를 헷갈려서 손등을 맞았다. 에그시는 어차피 입에 들어가면 다 거기서 거긴데 뭘 그리 따지느냐고 했다가 이번에는 해리가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수치심과 허기에 결국 에그시는 테이블 매너를 일주일 만에 마스터했다. 멀린은 어딜 내놔도 손색없다며 칭찬했지만, 쏙 들어간 에그시의 뺨을 보고는 금세 질색을 했다.
에그시가 14살이 되던 해 해리는 에그시에게 단도를 선물했다. 호신용이라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자그마한 에그시의 손에는 꼭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해리를 찔렀다.
“에그시. 사람을 죽일 때는 칼보단 총이 좋단다.”
“존나 고마운 조언이네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리는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그대로 에그시를 들어 바닥에 내팽개친 후 그 위를 짓누르며 말했다. 해리는 에그시가 휘두르는 칼을 손으로 막았다. 한동안 펜 잡기는 힘들겠군. 그게 첫 감상이었다. 에그시는 제 입으로 들어오는 해리의 손을 핥았다. 피가 멎을 때까지.
에그시가 15살이 되던 해 해리는 에그시에게 잔업무를 맡겼다. 처음 해리의 사무실을 갈 수 있다고 들떴던 에그시는 금세 고개를 꺾었다. 대걸레를 들고 사무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에그시는 천장에 달린 에어컨을 보며 해리에게 틀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해리는 낭비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런던은 뜻밖의 더위를 앓고 있었고, 에그시는 그것이 자신을 골탕먹이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 더워, 에그시가 셔츠를 풀었다. 땀에 젖어 등에 딱 달라붙은 천에 팔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다.
“해리, 저 해리 사무실에 취직하면 안 돼요?”
“안 돼.”
딱 잘라 말하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에그시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노란 서류 파일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멀린이 리스트를 주며 이 순서대로 정리하라고 했지만,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워 죽겠다! 에그시가 소파에 벌러덩 누우며 소리쳤다. 그러다 해리에게 눈이 갔다. 이 더운 방에서, 넥타이까지 꼭꼭 매고 있는 그는 덥지도 않은 지 안경만 올려 쓰고 있었다. 눈이 나쁜 것도 아니면서,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해리가 고개를 돌렸다.
“왜.”
분명 저 인간은 뒤에도 눈이 달린 게 틀림없었다. 에그시는 괜히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말했다.
“그냥 해리는 안 덥나 싶어서.”
“더워.”
“그럼 에어컨 틀어요.”
“싫어.”
“왜요?”
“너 때문에.”
가끔, 정말 가끔, 아니 자주 해리는 자신보다 더 애 같을 때가 있었다. 에그시는 해리에게 다가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았다. 열기가 확 겹쳐지자 그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에그시는 해리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네? 에그시가 귀를 깨물며 말했다. 순간 뒤로 확 밀쳐진 에그시는 벽에 등을 부딪쳤다. 에구구, 등을 감싸며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기 전에 문밖으로 내쫓긴 에그시가 투덜거렸다. 미친 노친내가 발정이라도 났나.
애석하게도 에그시의 옷에는 도청기가 달려있었고, 멀린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
에그시는 해리가 마피아 조직의 보스이며, 런던 뒷골목 시장을 꽉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리에게 덤볐다. 해리는 이상하리 만치 자신에게 관대했지만, 또 어느 면에서는 칼 같아서 에그시는 여태껏 해리의 침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에그시가 해리와 함께 산 것은 아직 열 살도 채 되기 전이었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았을 리가 없다. 아니 교육 자체를 받았을 리가 없었다. 에그시는 해리가 주는 것만 받았고, 가르치는 것만 배웠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에그시는 일반 조직원보다 칼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해리는 제 얼굴로 날아오는 칼을 붙잡곤 다시 에그시에게 던졌다.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에그시는 욕설을 내뱉었다.
에그시는 바깥출입도 제한되어 있었다. 별로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해리는 마피아의 보스였고, 에그시는 쉬쉬하지만 보스의 어린 정부 취급받았다. 그래, 에그시는 자신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그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어쨌든, 지금의 에그시로서는 우습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에그시의 세상에는 해리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근 십 년을 함께 살았다. 그런 어린 애가, 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보는 거라곤 TV에 비춰지는 싸구려 포르노뿐인 어린 애가 해리를 대상으로 몽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리는 제 침실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에그시는 울상으로 속옷을 빨았고, 침대보는 버렸다. 해리가 모른 척해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에그시가 해리의 사무실에 드나들 때마다 끈적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멀린은 그들에게 죽고 싶지 않으면 눈을 돌리라고 했지만 해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방임과 다름없었다. 멀린은 해리가 에그시를 그토록 아끼면서 왜 그들을 내버려 두는지 알지 못했다. 에그시도 마찬가지였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주의였던가. 해리가 그렇게 애를 가르쳤던가. 멀린은 없는 머리가 빠지는 느낌에 이마를 그러쥐었다. 욱신욱신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결국, 일이 터졌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작고 유약해 보이기까지 하는 어린아이는 금세 먹잇감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운이 나쁘게도 그날은 해리와 멀린이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에그시는 시원한 사무실 소파에 누워 해리가 쥐여준 고전을 읽고 있었다. 생각보다 재밌어서 집중하고 있던 찰나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자주 보았던 사람인데 아마 조직의 카포 중 하나였다. 남자는 에그시를 보며 보스는? 하고 물었고, 에그시는 모른다고 했다. 해리는 항상 자신에게 어딜 가는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에그시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건 그래서 이다음 장면에서 누가 죽느냐는 것이다.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에그시에게 손짓했다. 사실 에그시는 남자가 얼마 전부터 자신의 엉덩이를 훔쳐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스 취향도 참 알만해.”
셔츠에 보타이, 반바지에 하얀 니삭스라니. 남자가 에그시의 목덜미에 입을 묻으며 웃었다. 화장실은 더운데, 에그시가 칭얼거리자 남자가 하얀 니삭스를 벗기며 말했다. 그런건 이제 신경도 안쓰게 될 거야.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보타이에서 어쩐지 스피커 소리가 난것 같았다. 에그시는 고개를 돌린 채 키스만은 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지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속옷이 끌려 내려갔을 때야 에그시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응? 남자가 에그시의 엉덩이 사이로 부푼 앞섬을 비볐다. 순식간에 밀려온 공포에 에그시가 몸을 떨었다.
“놔, 놓으라고!”
이제 와서 앙탈은. 남자는 에그시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고 흥분한 듯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에그시의 비명에 황급히 입에 옷을 쑤셔 박고 손을 결박하자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흉물스러운 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에그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열리지 않은 제 아래에 남자가 성기를 비볐다. 처녀처럼 굴지 말라며 엉덩이를 맞았다. 아, 젠장. 해리. 에그시는 그 와중에 해리가 생각나는 것이 웃겼는지 실소했다.
똑. 똑. 똑.
동시에 남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에그시는 제 모습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반으로 갈린 남자를 보며 비명을 삼켰다. 이런,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나이는 해리보다 조금 어릴까,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어째서 남자가 반으로 갈린 건지 모를 일이다.
“랜슬롯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랜슬롯? 하, 에그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해리가 자신과 아주 친밀한 사이에게만 내려주는 암호명이었다. 분명 해리의 암호명은 갤러해드였지, 에그시가 자신을 랜슬롯이라 소개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랜슬롯은 자켓을 벗어 에그시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일으켜 세웠다. 어렵지 않게 결박을 풀고, 바지를 입은 에그시는 랜슬롯이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알았다. 혀를 차는 것도 같았다.
“갤러해드 경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 있었니.”
해리의 안부 인사는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멀린은 에그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깨에 걸친 자켓을 랜슬롯에게 돌려준 에그시는 한껏 풀어헤쳐 진 셔츠를 갈무리하며 말했다.
“덕분에.”
에그시의 대답에 해리는 웃으며 손짓을 했다. 오라는 신호였다. 에그시는 해리의 앞에 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보타이를 바로 메주며 에그시의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자 금세 달아올라 에그시가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흣, 해리의 어깨를 붙잡고 신음을 흘린 에그시가 잔뜩 젖은 눈으로 해리를 내려다봤다.
에그시는 이런 옷은 입지 않았다. 보타이라니 무슨 열 살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평소와 같이 아디다스 져지를 입으려던 에그시는 해리가 들려주는 깔끔한 셔츠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채 그를 올려다봤다. 해리는 지금껏 에그시의 옷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제야 제대로 된 정장을 맞춰주는구나 싶었다. 그것이 큰 착각이라는 것은 셔츠를 입고 그 밑에 있던 반바지와 니삭스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 씩씩거리는 에그시에게 해리는 뻔뻔한 얼굴로 그래서 안 입는다고? 하고 물었고, 에그시는 누가 안 입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단 소리잖아. 에그시는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악취미.”
“너만 할까.”
**
에그시가 마피아 간부로 들어온 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에그시에게 성적인 농담과 조롱을 하던 놈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그것을 에그시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해리의 옆에 서서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해리가 그들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혔다. 해리는 에그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테이블매너부터 시작해 기본상식과 예절,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지식과 그리고 칼과 총을 다루는 방법. 약을 구별하는 방법. 그리고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자신이 배웠던 모든 것들을 가르쳤다. 간혹 멀린이 그에게 에그시를 후계자로 올릴 생각이냐고 물었지만, 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해리는 아직 제 안에서 에그시를 정의하지 못했다.
이러려고 데려온 아이는 아니었다. 아니,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원칙상 에그시도 그 자리에서 죽여야 했다. 배신자는 처리하고,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 게 그들의 법이었다. 빼앗을 수 없다면 죽이기라도 해야 했다. 그의 성격상이라면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슨 변덕인지 해리는 에그시를 17년 동안 키우며 제 옆에 뒀다. 다들 어린애인 하나 끼고 사냐는 말에 해리는 말없이 그들을 노려봤다. 소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에그시는 정말 해리의 어린 정부가 됐다.
해리에게 에그시는 떨어지지 않는 망령 같았다. 에그시는 크면 클수록 그를 생각나게 했다. 아직도 간혹 꿈에서 그가 나왔다. 아직 제가 마피아 보스가 아니었을 때, 아직 순수할 수 있었을 때. 그는 해리에게 지지 않는 태양 같았다. 밝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저 그것만 볼 수 있었다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조직을 배신했고, 자신의 손에 살해당했다. 해리는 아직도 똑바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만약, 이라는 것만큼 의미 없는 말도 없지만, 아주 만약 그가 자신에게 도망가자고 했다면. 부도 권력도 명예도 모두 버리고 자신과 떠나자고 했다면 해리는 망설임 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서워서 해리는 남자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언윈.” 그것이 해리가 남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에그시.”
그리고 해리는 에그시가 자신의 약점이 될 것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해리는 에그시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17년이란 세월은 마냥 의미 없지는 않았다. 해리는 이제 입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올리지 않았다. 에그시에게 만약은 없어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래야 했다.
만약 에그시가 위험에 처한다면, 자신에게 모든 걸 다 버리고 도망치자고 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뿌리칠 자신이 없었다.
“또 다쳤다고 들었는데.”
“…누가 말했어요? 제임스죠?”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제임스를 노려보던 에그시를 보며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그시가 조직에 들어온 이후 항상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실전은 중요하다. 아무리 주변에서 설명을 해주고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일이 일인 만큼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순발력과 판단력이 중요한 게 이 바닥이었다. 물론 에그시는 순발력은 좋았다. 판단력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해리는 아직도 제 강아지를 쏘지 못하고 끼고 다니는 에그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벗어 보렴.”
“폭킹…여기서요?”
물론 말투도 좋지 않았다. 해리는 말없이 에그시를 바라봤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이 조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에그시는 투덜거리면서도 천천히 셔츠에 단추를 풀었다. 말은 잘 듣는단 말이지. 해리는 셔츠 아래에 드러나는 마른 몸을 감상하며 손짓했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가온 에그시가 해리 앞에 섰다. 가슴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온 손이 붕대가 칭칭 감긴 허리를 쥐었다. 잇새로 억눌린 신음이 샜다.
“역시 일을 맡기긴 아직 무린가.”
“아,아니에요! 이번에 그놈들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어서 그랬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요!”
“거래내용을 말한 게 아니잖니. 이래서는…”
해리는 제 무릎 위에 에그시를 앉힌 후 목덜미를 잡아 제 코앞에 데려왔다.
“잠자리도 할 수 없겠는걸.”
젠장. 해리. 에그시가 해리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미 방안은 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허억, 헉…헉…으……”
스스로 해리의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엉덩이를 비비던 에그시가 입술을 깨물었다. 홀딱 벗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바지 지퍼만 내린 채 여유로운 모습으로 자길 감상하고 있는 해리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그시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으나 해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끔 에그시의 뺨과 입술, 목과 가슴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이 품고 있는 그의 것은 여전히 흥분한 채였다.
연륜의 차이를 실감한 에그시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볐다. 흐으응, 읏. 신음이 높이 샜다. 문 뒤에 있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높은 신음을 흘리는 에그시를 보며 해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목소리가 너무 크구나. 에그시.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곤란하지 않겠니?”
“흥, 응, 으! 버,벌써, 아,알 사람은, 읏…다 아는데에…아!”
“난 질투가 아주 많아서 다른 누군가 네 신음소리를 듣는다면 그 귀를 잘라버릴지도 모른단다.”
에그시가 숨을 삼켰다. 싸이코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히끅 거리는 딸꾹질과 함께 입술이 삼켜졌다. 순식간에 책상 위로 넘어간 에그시가 해리를 밀어내려 손을 뻗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제 아래를 쑤시던 성기가 쑥 빠져나가더니 한 번에 치고 들어왔다. 히익! 허리를 튕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흘렀다. 분명 사정을 했는데도 다시 크기을 키워가는 해리를 보며 에그시가 허벅지를 달달 떨었다.
“너,너무…해…흐…흐아!”
“너무한 건, 후…에그시 너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신음을 내지른 에그시가 해리의 목에 매달렸다. 이미 문밖의 경호원은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제 스팟만 찾아 문지르고 자극하는 그를 놀려주기 위해 뺨을 잡고 키스한 에그시가 잔뜩 풀린 혀로 사랑을 속삭였다. 금세 흥이 식을 줄 알았던 에그시의 생각과는 반대로 해리는 에그시의 몸을 떼어낸 후 손을 묶었다. 지탱할 곳을 잃은 몸뚱이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바튼 숨을 몰아쉬던 에그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을 보고도 그는 닦아주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후, 하….아…너무한 건, 해리…죠…내가 아니라……”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내뱉은 에그시의 말에 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랑한다구요. 빌어먹을 해리 하트.”
**
에그시. 해리가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오랜만에 폐 속으로 들어온 뜨거운 연기는 이미 뒤집어진 해리의 속을 뜨겁게 달구기만 할 뿐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땀으로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고, 타이를 끌어내린 해리가 구두 끝으로 에그시의 턱을 들어 올렸다. 쿨럭, 간헐적으로 기침과 함께 피를 쏟은 에그시가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은 이미 뜨지도 못한 채 경련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곤 해리의 발이 한 번 더 에그시의 얼굴을 걷어찼다. 커다란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돌아간 얼굴을 바로 한 에그시가 툭 부러진 이를 뱉었다. 피범벅이 되어 해리의 앞으로 굴러온 이를 보며 해리가 시가를 물어뜯었다.
“에그시. 런던은 내 손바닥 안에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네. 알고 있어요.”
에그시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경찰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거야.”
“그렇겠죠.”
터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에그시가 대꾸했다. 참으로 싱거운 대화였다. 해리는 이 작은 아이를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조직에 스파이가 있었다. 새삼 놀랍지도 않았으나, 그 스파이와 에그시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은 해리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치, 오래전 배신한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번 투덜거리면서도 에그시는 그녀가 오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제 나이 또래는 그녀 하나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적인 장소에서 둘이 만났기 때문에 묵인되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파이였다. 다른 조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누군가의 밑에 있을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스가 직접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 해리는 꽤 비밀스러운 정부요원을 떠올렸다. 분명 현장팀은 해체했다고 들었는데. 그녀가 움직이는 몸놀림은 예사로운 게 아니었고, 그녀가 쓰는 무기 역시 현대문물을 훨씬 뛰어 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녀는 에그시를 쏘지 못했다. 그대로 총을 쐈다면 분명 에그시의 가슴을 꿰뚫고 자신 역시 죽었으리라. 하지만 그 여자는. 이제 에그시와 비슷한 또래로 추측되는 그 작은 소녀는 에그시를 쏘지 못했다. 그리고 에그시는 자신을 막아섰다. 지켜준 것이 아니었다. 에그시가 지킨 것은 그 여자였고, 해리는 그녀를 놓아주는 대신 에그시를 심문했다. 고문관을 부르겠다는 멀린의 말에 해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멀린이 에그시를 보며 딱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곧이어 퍽,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몸뚱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너와는 상관없는 아이잖니. 네가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바닥으로 쓰러진 에그시를 보며 해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뒤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의자는 팽팽하게 해리를 지탱한 채 회전했다. 해리는 하얀 손수건으로 손을 닦고는 책상 위를 어지럽힌 서류를 훑어봤다. 그 여자가 몇 년간 빼돌린 장부의 일부였다. 큰 액수는 아니었다. 그래 액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사이 빼돌린 정보가 문제였지. 해리는 금고를 열어 장부를 넣어두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방안에 울렸다. 바닥에 뺨을 기대고 누운 에그시를 보며 해리가 시가를 깊게 빨았다. 이내 뿌연 연기가 눈 앞을 가렸다. 끌어 올랐던 분노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에그시의 상처를 살폈다.
해리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어떤 미학도 찾아 볼 수 없는 일련의 행위들은 해리에게 거부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리는 사람이 어디를 맞아야, 어느 정도의 강도로 맞아야 아프고, 멍이 들지 않는지. 증거를 남기지 않는지. 혹은 죽지 않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해리가 고문관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었다. 에그시의 몸에 멍이 드는 게 싫었다. 얼굴은 어쩔 수 없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후회해서는 어쩌겠는가. 해리는 바로 누운 에그시의 얼굴을 닦았다. 색색 숨을 내쉬던 에그시가 한쪽 눈만 빼꼼 뜨고는 해리를 바라봤다. 여전히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삐리릭.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자 곧이어 남겨진 메모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그녀는 죽었습니다. 갤러해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거울 앞에 서서 제 입안을 살핀 에그시가 인상을 썼다. 설마 이를 부러뜨릴 줄이야. 이거 다시 맞추려면 얼마나 들까? 이번엔 금니로 바꿔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거울 너머로 비치는 남자를 노려봤다. 안대를 쓰지 않은 눈으로. 한쪽은 멍 때문에 차마 안대를 벗을 수가 없었다. 에그시는 자켓을 바로 하고, 옷매무새를 살폈다. 완벽해. 물론 얼굴에 안대와 이만 제대로 붙어 있었다면 더 완벽했을 테지만.
“잘 어울리는구나.”
피팅룸은 좁았다. 삼면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바짝 뒤로 다가온 해리의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점점 거울 앞으로 다가서는 몸이 이내 완전히 밀착하자 목덜미에 숨이 닿았다. 엉덩이를 훑고 앞으로 침범한 손이 바지를 끌어 내렸다.
“해리, 옷…망가져요……”
“음…”
“해리이…”
“다음에 맞출 때는 뒤에도 지퍼를 달아 놓으라고 해야겠구나.”
젠장, 굳이 이 좁은 곳에 같이 들어왔을 때부터 짐작 했어야 했는데. 에그시는 거울에 뺨을 붙이고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지탱한 채 해리의 것을 받았다. 잘 빗어 넘긴 머리가 엉망이 됐다. 해리가 허리를 털 때마다 에그시가 몸을 바르작 거리며 신음을 참았다.
옷을 갈아입었다. 속옷까지 전부다. 에그시는 수치심 때문에 당장에라도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결국 신음을 참지 못한 제가 울음을 터트린 탓이다. 그리고 해리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모든 걸 준비해놓고 있었다. 에그시는 제 뒤에 서서 옷 갈아입는 것을 빤히 쳐다보는 해리를 보며 욕을 짓씹었다. 신사는 무슨.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리가 준비한 다른 양복의 엉덩이에 지퍼가 없었다는 것이다.
“늦겠구나.”
“fuck you. 누구 때문인데.”
에그시는 해리가 내미는 팔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린 뒤, 차에 올라탔다.
무도회라니 웃기는 소리. 에그시는 커다란 홀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름만 무도회인 이 사교모임에는 영국의 이름 있는 귀족은 모두 모였을 것이다. 그중에는 정치인도 있을 것이고, 왕족도 있을 것이며, 그리고 마피아도 있겠지. 에그시는 구석에 앉아 마티니를 홀짝거리며 그 마피아를 노려봤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저러고 있으면 마치 평범한 사람 같아서.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지루하죠?”
뭐야 이건, 에그시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에그시의 손에 들려있던 마티니를 치우곤 제가 들고 있는 샴페인을 건네며 옆에 앉았다. 당신 같은 스위티는 이쪽이 더 어울리죠. 남자의 말에 에그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들이켰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온갖 미사여구를 붙이며 저에게 작업을 거는 남자를 보며 에그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리를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쳇, 질투라도 할 줄 알았더니. 더 이상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어서 에그시는 적당히 둘러대며 해리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남자가 붙잡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휘청,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 잡으며 에그시가 남자를 노려봤다.
“그쪽은 제 파트너입니다.”
그리고 에그시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에그시를 가로챘다. 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남자는 실례했다며 자리를 떠났고, 그는 에그시를 부축하며 테라스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을 맞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드나?”
별로, 걱정되는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에그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런 곳에서는 누가 주는 걸 함부로 마시는 게 아니야. 특히 너 같은 애는.”
표적이 되기 쉽거든. 그가 말을 아꼈다.
“…빨리도 알려주시네요.”
“알고 있을 줄 알았지. 눈치가 좋은 아이잖아?”
비꼬는 건가. 에그시는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그를 노려봤다. 그는 더는 말이 없었다. 해리보다 큰 키에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 아하, 에그시는 금세 그가 누군지 추측해낼 수 있었다.
“록시는 잘 있어요?”
그의 얼굴이 무너졌다. 에그시는 이제야 그가 록산느 모튼이 항상 얘기하던 퍼시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가 그라는 것도.
“죽었다고 했을 텐데.”
“거짓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도청기 없어요.” 에그시가 팔을 벌리며 말하려다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볼썽사납게 무릎을 꿇은 에그시를 일으킨 퍼시벌이 속삭였다. “갤러해드가 보고 있어.” 에그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그에게 안겨있으니, 다시 한 번 그가 속삭였다.
“록산느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좋겠군. 언윈.”
“그건 내가 할 말이에요.”
“……그래.”
퍼시벌은 수긍했고, 이내 에그시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fuck. 대체 아까 그 샴페인에는 뭐가 들어 있길래 이토록 어지러운 것인지,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을 것을.
“갤러해드에게 말했다. 먼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군.”
퍼시벌이 건네준 물을 마신 에그시가 인상을 썼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그의 부축을 받아 차에 올라탄 에그시는 뒤에 따라붙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했다.
“당신이 운전하게요?”
조수석에 자신을 태운 퍼시벌을 보며 에그시가 물었다. 퍼시벌은 안전벨트를 꽉 매주며 에그시의 뺨을 툭 건드렸다.
“자는 게 네 맘에 편할 거야.“
아아, 지겹군. 백미러 사이로 비치는 수많은 헤드라이트가 빛을 내뿜었다.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긴 밤이 될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에그시는 눈을 감았다.
**
록산느 모튼. 에그시 언윈의 유일한 친구였으며 퍼시벌의 부하였고, 어쩌면 킹스맨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나간 스파이였다. 아니, 생사를 모르니 아직 정확하지는 않았다. 에그시는 아직도 도로 위를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오래 달린 것 같은데 상대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디의 패밀리냐고 묻기엔 에그시는 너무 지쳐있었다. 안대로 가려진 눈 아래를 긁다가 문득 해리를 떠올렸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하하호호 하며 지겨운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웃기는 모습이었다. 에그시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퍼시벌이 시선을 돌렸다. 언윈. 순간 에그시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줄 알았다. 조금 뒤늦게 네? 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다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총알이 방탄유리에 박히는 소리는 둘에게 전혀 방해가되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한적 없나?”
음. 퍼시벌의 말에 에그시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쩜 저렇게 아픈 구석만 찌르는 줄 몰라. 에그시가 고개를 돌려 차 안을 살피자 퍼시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도청기는 없어.”
“GPS는 있을 거 같은데요.”
뭐, 그렇겠지. 퍼시벌이 조금 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그시는 제 완전히 도청기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퍼시벌에게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요?”
솔직히, 떠본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리가, 그들이 저를 놓아 줄 리가 없었다. 죽였으면 죽였지. 에그시의 말에 퍼시벌이 고개를 돌렸다. 살짝 달싹인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긴장했나. 그 순간 차가 빠르게 회전했다. 타이어가 터진 모양이었다. 에그시는 벨트를 꽉 잡고는 퍼시벌이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다시 차를 세워 방향을 바꿔 달렸다. 터진 타이어 때문에 질질 끄는 소리가 났다.
“내가 너라면 많이 억울할 것 같아서.”
“거짓말.”
“…….”
“퍼시벌은 거짓말 참 못해요. 알고 있어요?”
“처음 듣는군.”
이번엔 진심이었다. 방탄유리도 이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뒤에서 몇 번의 폭발음이 들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퍼시벌은 그대로 아무도 없는 빈민가 골목을 달렸다. 누가 튀어나오면 어쩌려고, 에그시의 말은 그대로 무시한 채. 한참을 달리던 차는 서서히 느려졌고, 이내 자리에 멈춰 섰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거짓말을 들킨 이후로 말이 없었다. 이런 침묵에 익숙한 에그시 역시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에그시. 나와……”
“……퍼시벌?”
짧게 끊어진 단어 속에서 에그시는 침묵을 읽었다. 퍼시벌이 망설이고 있었다. 방황하는 눈동자 속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걸까. 함께, 툭 굴러들어온 단어를 애써 끼워 맞추려 에그시는 애썼다.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단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고 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똑. 똑. 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에그시가 화들짝 놀라 퍼시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언제 왔는지, 기척도 없이 다가온 란슬롯이 둘을 보고 싱긋 웃고 있었다. 문을 열고 에그시를 에스코트할 때까지 란슬롯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었을까.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숨은 거칠어졌다. 익숙한 구두였다. 브로그 없는 옥스퍼드. 해리가 항상 제게 말해왔던 것이었다. 에그시. 그리고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에그시는 드디어 제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한 줄 알았다. 바닥으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심장이 추락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에그시의 시선은 란슬롯의 앞에 어깨를 붙잡고 쓰러진 퍼시벌에게 향했다.
란슬롯은 언제나 긴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니면서 들고 다닌다고,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는 에그시의 말에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설마 그 밑에 칼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퍼시벌도 고개를 들어 에그시를 바라봤다. 도망쳐.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말할 것만 같았다. 에그시가 황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 마세요. 퍼시벌은 잘못이 없어요. 에그시의 모습을 바라보던 랜슬롯이 탄식했다.
“에그시 내 앞에서 다른 사람을 감싸지 말아 주겠니.”
“해리. 그는 정말 잘못이 없어요. 오히려 절 지켜줬다구요.”
“에그시.”
“해리 제발.”
“너는…”
잔뜩 찌푸린 미간 사이로 피로가 내려앉았다. 지독한 향수 냄새와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손에선 화약 냄새가 났다. 이 더러운 뒷골목에선 전혀 찾을 수 없는 향이었다.
“정말 나를 미치게 만들어.”
퍼시벌은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석 달쯤 지난 후에야 다시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잘린 팔은 다시 붙일 수 없었다. 대용품으로 마련한 기계 팔이 자꾸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에그시의 신경을 긁었다. 그는 신경질 내는 에그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싫은 사람이다.
결국, 그날 에그시는 정신을 잃었다. 대체 무슨 약이었냐고 물으니 멀린은 그냥 ‘마약’이라고 했지만 에그시는 그것이 그냥 약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멀린의 말에 에그시가 되물었다. 내성이요? 전 약 같은 거 안 하는데? 에그시의 말에 멀린이 몰랐냐는 듯 말했다. 네가 먹는 건 전부 약이 들어가. 에그시가 펄쩍 뛰었다. 지금껏 저에게 마약을 먹인 거예요? 고개를 숙이고 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뱉을 기세로 기침을 하니 멀린이 한숨을 쉬었다.
“너를 위해서였다.”
위해서,요? 에그시가 이를 악물고 대꾸했다. 지금 위해서라고 했어요. 멀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가 말해놓고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절 위해서 록시를 죽였어요? 절 위해서 퍼시벌의 팔을 그렇게 만들었나요? 저를 위해서 마약을 지난 이십 년간 먹이고, 칼을 쥐는 법을 가르치고, 총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나요? 절 위해서?”
멀린! 에그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숙인 에그시가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빼꼼 들었다.
“너무 그를 괴롭히지 말거라.”
해리가 그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하곤 에그시의 앞에 앉았다.
“화났구나.”
그래도 머리를 쓰다듬는 해리의 손을 치울 정도는 아니었다. 에그시는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걸 즐겼다.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릴까.”
해리가 억지로 에그시의 뺨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던 에그시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곤 눈을 꼭 감았다. 해리가 한숨을 쉬며 에그시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니 제가 웃고 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소원을 말해보렴. 에그시.”
“…지금은 크리스마스 아닌데요.”
“나도 산타는 아니지.”
에그시는 잠깐, 고민하는 듯, 싶더니 힐긋 해리를 훔쳐봤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와 공포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쩜 그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에그시는 퍼시벌을 떠올렸다. 나와 함께, 퍼시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진짜 연민? 동정? 혹은 연모? 거기까지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그날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대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도망가고 싶지 않냐고? 물론 수십 번도 더 생각해봤다. 그러나 말했지 않았던가. 해리 하트는 자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던, 아니던. 도망치려 하면 발목을 으스러뜨릴지도 모른다. 기어서라도 가려고 하면 아예 팔을 잘라 버릴지도 모르지. 퍼시벌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와 함께 도망가지 않을래?
그 말을 들은 순간 에그시는 정말로 록시가 그의 손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 손에 죽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야. 록시.
“저와 함께 도망쳐요.”
에그시는 저를 밀어내고 얼굴을 굳힌 해리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었다. 그는 저에게 모든 것을 해주지만 사랑만은 주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고백이었다. 차마 사랑을 말하지 못한 불쌍한 나를 위한. 그리고 그를 위한.
“그건…들어줄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냥 해본 소리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에그시는 목이 타는듯했고, 결국 그의 입술에 달려들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 에그시의 허리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 그는 에그시의 눈물을 방관했다.
**
우리는 여기서 그의 얘기를 좀 더 할 필요성을 느꼈다. 리 언윈.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자이며, 해리 하트가 사랑했고, 에그시 언윈의 아버지였던 사람. 그리고 해리 하트의 손에 죽은 사람.
에그시에게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많이 없었다. 어머니는 밝은 금발이었고, 아버지는 초록색 눈동자였던 것만 빼면 에그시의 유년기는 모조리 해리의 것이었다. 그럼 해리가 기억하는 리 언윈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에그시는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해리는 에그시의 앞에서 단 한 번도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리에 대한 얘기는 꺼낼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에그시가 리와 해리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조직 내에 둘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해리 역시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에그시가 빨리 알기를 바란 듯 보이기도 했다. 닮았냐고 하면 글쎄, 이건 란슬롯이 해준 이야기였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널 여기 둘 이유가 없지. 그는 그렇게 말하곤 농담이라며 에그시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었지만 에그시는 그러지 못했다. 나 정말 아빠랑 닮았어요?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하지 못한 건 정말 닮았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말은 내뱉는 순간 현실이 되어 에그시를 괴롭혔다. 무섭다고 했더니 정말 무서워 졌다. 슬프다고 했더니 정말 슬퍼졌다. 그래서 에그시는 무섭고 슬프다는 말 대신 기쁘고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 말걸 그랬어. 에그시는 제 목을 조르는 커다란 손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좋아한다고 하니 정말 좋아져 버렸다. 사랑한다고 하니, 좀 더 사랑해버렸다. 이제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목을 졸랐다. 길고 가느다란 목은 놀랍게도 제 손안에 꼭 들어 왔다. 그것은 저항 한번 없이 제 밑에 눌려 있었다. 펄떡펄떡 뛰는 혈관 아래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근육과 뼈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제 손에 모조리 박살나고 말 것이다. 뼈는 부러져 피부를 뚫고 나올 것이고, 근육은 찢어져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도 소년은 저항 한 번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 밀쳐 넘어졌을 때도, 자신이 그 위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를 때도, 커다란 두 손이 목에 닿았을 때도, 서서히 힘을 주고 있는 지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늘어진 몸은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소년은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남자가 소년을 주워온 그날부터.
17년이란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그것은 누구 하나의 사정이 아니었다. 남자도 소년도, 심지어 꿈속의 그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다만 의문인 것은 왜 이제 와서 에그시를 죽이고 싶어 하냐는 것이었다. 답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죽일 것이다. 에그시는 해리 하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노력했었다. 알고 있었다.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서로 사랑하기에 너무나 큰 상처를 줬고, 그 상처가 아물만한 시간을 가졌다.
에그시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보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는 해리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마음 같아서는 저 작은 머리통을 열어 꺼내보고 싶었다. 17년 동안 해리는 에그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저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와 동시에 사랑받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걸릴까. 삼분? 오분? 그리고 에그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싹 마른 입술이 안타까워서 저도 모르게 키스해주고 싶다고, 지금 당장이라도 저 입술을 삼키고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해리. 아파요…”
그리고 우습게도 해리는 그 목소리에 조르던 손을 놓았다. 오, 젠장. 욕설을 내뱉은 해리가 손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제발, 에그시. 해리가 자리를 벗어나려는 것을 에그시가 손을 뻗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작은 일련의 동작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해리는 한참을 그렇게 잡혀 있어야 했다.
“에그시…넌 너무 날 과소평가 하는 구나.”
“해리…”
“난 네 부모를 죽인 사람이야. 널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에그시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웃는 것도 같았다.
“해리 저…아빠랑 많이 닮았어요?”
해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절…사랑해요? 전 해리를 존나 사랑하는데…”
말로 내뱉는 순간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랑, 한때는 그 순수하고 고결한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을 제 곁에 두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던 젊은 시절의 자신이 있었다. 전대 보스는 그것을 보고 ‘작은 실험’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새들은 새장 안에 두면 날아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지. 이빨을 가진 짐승은 결국 주인을 물어뜯을 것이고, 그리고 우습게도 사람은 새장 안에 둔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가졌다고 다른 누구를 물어뜯는 비이성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 똑똑하니까. 똑똑하니까 너는 실패할게다. 동물은 굴복시킬 수 있지만 사람은 그게 아니거든.
어떤 식으로든 널 벗어나려 할게야.
에그시를 곁에 두고 싶었다. 자신은 에그시를 사랑했다. 에그시가 리를 닮았던 아니던 17년을 같이 보내게 되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에그시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사랑을 말해서는 안 되었다. 사랑하게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랑은 참혹하게도 외나무다리에 서 있었다. 해리는 고개를 들어 에그시를 마주봤다. 이제는 그 눈물을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못하게 됐다. 대신 해리는 방관의 대신으로 거절을 선물했다.
“넌…정말 리와 너무 닮았어.”
그리고 에그시를 과소평가 한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리는 커다란 창틀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에그시를 보며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다가가면 에그시가 뛰어내릴 것만 같았다. 왜 진즉 철장을 설치하지 않은건지, 왜 안에 경호를 붙이지 않은건지 후회했으나 그것은 이제 소용없었다. 에그시는 새도, 개도 아니었다. 똑똑하니까. 그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에그시. 좋은 말로 할 때 내려와.”
하얀 잠옷을 입고, 이제는 기게 자란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커다란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그것이 에그시를 밀쳐낼까 두려웠다. “해리는 절 사랑하지 않잖아요?” 엉뚱한 대답이었으나 그것이 얼마 전에 있던 일의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리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동시에 에그시의 한 발이 뒤로 물러나 허공에 머물렀다. 젠장, 에그시.
“하지만 난 네 부모를 죽이고, 네 미래도 과거도 모두 부쉈단다. 그런 내게 널 사랑할 자격은...”
“그래서예요. 절 해리 없이는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은 고백이었다. 그 어떤 사랑의 말보다 절절하고, 안타까운.
“해리가 절 사랑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겠어요. 당신의 약점이 되는 건 사절이야.”
그리고 에그시가 몸을 돌렸을 때. 해리가 소리쳤다.
“사랑한다. 에그시.”
만약, 아주 만약 저의 부모를 죽이고 미래도 과거도 모두 망쳐버린 자가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인다면, 그런다면. 그 옛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매번, 너를 보며 그 사람을 상상하곤 했었다.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닮지 않은 너를 보며 괴로워했었다. 왜 너는 그를 닮지 않은 것일까. 해리는 차라리 에그시가 저에게 도망갔으면 하고 바랐다. 아주 멀리, 제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해리는 에그시가 주는 유혹과 그에 가해질 독점욕이 두려웠다.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넌...넌 내게 정말 기적 같은 아이란다.”
결국 해리 하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에그시는 그 고백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해리 저 아빠랑 닮았어요?”
“…아니…전혀 닮지 않았어.”
그러자 에그시가 다시 몸을 돌려 해리를 마주보며 웃었다.
“그럼 됐어요.”
그리고 에그시가 뛰어내렸다.
우습게도 해리의 예상은 적중했다. 결국 에그시는 해리 하트를 무참히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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