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자신을 특별히 불행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쌍한 삶을 살았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까지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끔, 만화영화에 나오는 히어로들을 보고 있자면 부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게도, 저런 히어로들 같은 힘이 있었다면, 그게 아니라면 히어로가 내 앞에 나타나 줬다면. 그러나 에그시는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는 아이는 아니었고, 그건 가족의 탓이 컸다. 그런 에그시의 앞에 결국 나타나 버린 것이다. 자신을 밑바닥에서 끌어올려 줄, 인생을 바꿔줄, 바꿀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 말해준 사람. 그런 사람의 손에 죽는다면, 그로 인해 다른 누군갈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히어로가 아니겠는가? 에그시는 총을 들고 있는 해리를 보며 웃었다. 입술을 깨무는 그를 보며 양팔을 벌리고 다가갔다. “어서요. 해리.” 에그시의 말에 해리가 고개를 들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슬픔, 비참함, 고독, 애정.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느 때보다 깊게 가라앉은 갈색 눈동자엔 온전히 자신만 담겨있었다.
총알은 단 한발. 스피커에서 울리는 소음에 해리가 욕을 내질렀다. 금방이라도 스피커를 향해 총을 쏠 것 같던 그는 다시금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그시를 돌아봤다. 시간은 오 분. 이제는 삼 분이죠. 에그시가 해리의 품에 안기며 속삭였다. 그가 이토록 떨었던 적이 있었는가. 교회의 사람을 모두 학살한 후에도, 멀쩡하게 살아 돌아와 자신을 안았을 때도, 단 한 번도 떨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등을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은 에그시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벌벌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갤러해드가. 에그시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해리가 대답했다. “난 네 앞에선 갤러해드가 될 수 없단다.” 특히, 지금은. 순간 그의 말 뜯을 이해하지 못한 에그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리를 쳐다봤다. 뺨에 닿은 옅은 숨결과 그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타고 흘렀다. 이런 해리. 지금 당신 우는 거예요? 그의 양 뺨을 잡고 얼굴을 살핀 에그시가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해리.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그 순간에도 사랑받고 있단 생각에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해리. 리스크가 너무 커요.”
상대가 거짓말을 하던, 아니던. 전 세계와 저 하나의 목숨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어려도, 신입이라도 그 정도를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아마 당신도,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있다면 그러한 선택을 했으리라.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이지. 단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불쌍한 삶을 산 에그시 언윈. 해리 하트를 만나 이제야 행복을 찾았나 싶었으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조금만 더 일찍 당신을 찾을걸. 자신이 가진 행복이 전부라 믿으며 살아왔던 지난 이십 년보다 당신과 함께했던 지난 반년이 훨씬 가치 있었다고, 그 절절한 고백과 함께 에그시가 해리의 손을 잡고 총구를 이마에 놓았다.
“슈트는 안 돼요. 한발이니까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잔인하구나.”
“해리…”
“……미안하다.”
“그거면 됐어요.”
탕. 단 하나의 총성이 울렸다.
“곧 따라가마.”
**
세상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러한 짓을 하고 협박을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에그시가 정말 죽어야 했는지. 정말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었는지. 해리는 알지 못했다. 그저 오늘도 신문의 헤드라인에는 커다란 스캔들만이 세계가 평화로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멀린의 유감이라는 말도, 랜슬롯의 위로의 말도 해리에겐 닿지 않았다. 에그시가 죽었다. 배후도 모르고, 복수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에그시가 세상을 구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에그시는 착한 아이였다. 마지막까지 저를 안심시켜 주려고 웃고 있었던 것으로 모자라 끝까지 제 마음을 숨기고 떠났다. 때문에 해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은 나그네의 누더기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킹스맨으로 돌아가기엔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다음 후보생이 에그시의 자리에 앉아 있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자리가. 갤러해드라는 이름이. 네가 없는데 무슨 소용일까. 해리는 차라리 그 순간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었다. 차라리 함께 죽고 싶었다. 자신이 이토록 무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에그시의 머리가 아니라 제 입에 총을 욱여넣고 총구를 당겼으리라. 그래, 만약 에그시가 거기서 제 마음을 말했더라면, 살고 싶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해리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실핏줄이 터져 불거진 눈에선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