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든 기억을 여기 기록할 것이다. 

이 기억은 빛으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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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꼬마야.”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헤기는 피가 흐르는 이마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항은 짧았다. 상대는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족 모두가 그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얼굴과 옷에는 부모님의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는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이 헤기만을 바라봤다. 저택은 곧 무너질 것이다.


  “네 부모처럼 여기서 죽던가.”


  부모님의 시체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었다. 남자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헤기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니면 내 아래에서 살아남던가.”


  남자는 짐짓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와 같은 금색 눈동자는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하나를 선택해라.”


  선택이라니, 그는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살려줄 테니 제게 복종하라고, 헤기가 아무리 도련님처럼 살아왔다 하더라도 적의와 호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헤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눈앞에서 부모님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당장 뒤에는 피도 마르지 않은 시체가 누워있었고, 그가 불태운 것은 지난 십여 년간 제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집이었다. 그런 원수의 아래에서 살아남으라니? 싫었다. 절대로 싫었다. 비참하게 죽을지언정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버릴 수는 없었다. 헤기가 고개를 돌렸다. 죽여. 헤기의 말에 남자가 눈을 깜빡이더니 헛웃음을 들이켰다.


  “목숨 귀한 줄 모르네.”


  금방 제 부모를 나무 베듯이 죽여 버린 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헤기가 남자를 노려보자 남자는 검을 거두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남자가 말했다. 너를 죽일 생각은 없어. 헤기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헤기의 외침에 남자는 헤기의 손목을 빤히 내려다봤다. 거미문신. 그리곤 다시 헤기의 얼굴을 봤다. 마냥 어린애인 줄 알았더니 꼴에 귀족이라고 죽이라고 한다. 남자는 글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죽여 버려도 되는 일이다.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지도 모른다.


  “불쌍해서.”

  “뭐?”


  헤기가 발끈하여 언성을 높이자 남자는 귀찮다는 듯 하품을 했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남자가 헤기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기세가 몸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헤기의 몸을 받아든 남자가 가볍게 저택을 벗어났다. 어리다곤 하지만 남자애 하나를 안아 든 사람치곤 발걸음이 퍽 가벼웠다. 남자는 타들어 가는 저택을 한참이나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에일이라고 소개했다. 헤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창밖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자신이 살던 곳과는 꽤 떨어져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에일은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헤기가 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처박았다. 대화는 안 되겠군. 에일의 혼잣말에 헤기가 코웃음을 쳤다. 대화라니, 처음부터 대화라는 건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굴었으면서. 헤기는 에일이 방을 나가고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야 고개를 들었다. 창밖에 달이 환하게 떴다. 도망쳐야 했다.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헤기는 창밖으로 몸을 던지지 못했다. 언뜻 봐도 꽤 높이가 있었다. 못 뛰어내려. 다리 한두 개 박살 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높이였다. 까딱하면 죽을 것이다. 헤기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콕 박고 있으니 얼마 후 방문이 열렸다. 에일이 식판을 들고 왔다. 배고프지? 먹어. 헤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까와 다르게 에일은 방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헤기는 천천히 일어나 문고리를 돌렸다. 탁. 잠겨있었다.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언제 잠든 건지 몸이 침대 위에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바로 창밖이 보였다. 아이들이 활기차게 뛰어놀고 있었다. 헤기는 식판이 없어졌음과 동시에 허기를 느꼈다. 그렇다고 원수가 주는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굶어 죽을까. 그러기엔 날이 지나치게 밝았다. 방에는 햇빛이 가득 찼다. 헤기가 어디에 있던 빛이 들어왔다. 얼른 밤이 오기를, 그래서 이 빛이 끊어지길 바랐다. 끼익 문이 열렸다. 배고프지?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헤기가 힐끔 고개를 들자 못 보던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식판을 바로 옆에 가져다주며 식기 전에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헤기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헤기는 냄새만 맡고는 식판을 멀리 치워버렸다. 부모님의 시체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집은 다 불탔을까. 사용인들은 다 죽었을까. 그 많던 병사들은 어디로 갔을까.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이럴 때 그라도 들어온다면 최악이었다. 그리고 최악은 언제나 헤기의 옆에 있었다.


 “너 우냐?”


 에일이었다. 에일은 황당한 얼굴로 헤기를 바라보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제가 우는 게 퍽 충격적이었나 보다. 헤기는 고개를 돌리는 척 소매에 눈물을 닦아냈다. 수십, 수백 번을 더 욕하고 저주했던 남자에게 동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원인이 누구인데 그가 저를 동정하느냔 말이다.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몸은 생각만큼 따라주지 않았다. 헤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다 코를 훌쩍이고, 이내 어깨를 들썩였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다. 엄마, 아빠… 엄마……아빠아………











 

  “저러다 죽겠어.”


  아제이스가 말했다. 에일은 침대에 누워 색색 숨을 내뱉는 헤기를 보며 인상을 썼다. 벌써 나흘째 빵 한 조각도 먹지 않고 있었다. 물은 강제로라도 마시게 할 수 있었으나 식사는 안 되었다. “그냥 사실대로 말해도 되지 않아?” 아제이스의 말에 에일이 고개를 저었다. 헤기는 우리랑 달라. 아제이스는 콧방귀를 끼었지만, 에일은 완고했다. 헤기는 달랐다. 한낱 실험체는 아니었다. 적어도 에일의 눈에 헤기는 그랬다. 그렇게 애지중지...


  “정신없을 때 뭐라도 먹여 놓자.” 


  에일이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이곳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의원은 보기 힘들었다. 아니, 볼 수도 없었다. 에일이 정기적으로 마을에 내려갈 때 비상약을 사다 놓는 게 다였다. 무슨 약인데? 아제이스가 심드렁하게 묻자 에일 역시 심드렁하게 답했다. 환각제. 아제이스가 마시고 있던 물을 뿜어냈다. 흐르는 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서 에일을 바라봤다. 에일은 컵에 약을 타 헤기를 일으켜 입안에 흘러 넣고 있었다. 미쳤어. 아제이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에일이 아제이스를 한번 바라보더니 잠깐 나가 있어 달라고 말했다. 이유를 말해주면 나가 있을게. 에일은 조금 인상을 쓰더니 말했다.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아제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닫는 소리가 조금 거칠었다.


  “…아빠?”


에일은 이때만큼은 그와 자신이 닮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에일은 그래. 하고는 말했다. 밥을 먹어야지. 그러나 헤기는 에일의 품에 파고들뿐 식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헤기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빠 죽지 마, 아빠, 엄마가 그 남자한테 당했어. 아빠, 가지마. 헤기가 에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가슴팍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헤기, 에일이 다급한 목소리로 헤기를 불렀다.


  “그 사람 누굴까. 왜 그랬을까…왜……”

  “……”

  “날 닮았을까.”


  네가 날 닮은 거겠지. 에일은 답을 주는 대신 빵을 얇게 뜯어 스프와 함께 먹였다. 약한 환각제라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에일은 마을에 내려가서 그 돌팔이를 다시 찾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스프 한 그릇을 몇 시간 만에 겨우 다 비우고 나서야 헤기는 겨우 잠이 들었다. 옷이 눈물이랑 스프로 엉망진창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누워있던 헤기의 손이 딸려왔다. 얼마나 붙잡고 있었으면 옷이 다 늘어났다. 에일은 헤기의 손을 떼는 대신 침대 앞에 앉았다. 호흡이 제법 안정되었다. 색색-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가슴팍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내일이면 조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환영술을 배워.”


  에일의 말에도 헤기는 에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헤기가 에일을 본 건 그 후였다.


  “대련 중에는 언제든 날 죽여도 좋아. 날 죽여서 네 부모의 복수를 해.”


  다들 미쳤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에일은 내가 질 리가 없잖아? 하며 헤기에게 단검을 하나 던져줬다. 저런 비실비실한 꼬맹이한테. 어떤 게 헤기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헤기의 눈에서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다들 에일이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그러다 저 녀석이 진짜 에일을 죽이면 어떡해? 누군가 말했다. 에일은 하하 웃으며 설마, 하고는 헤기를 바라봤다.

  헤기가 집에서 배운 건 호신술이 다였다. 헤기의 모든 시간은 가문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부모님은 헤기에게 환영술 같은 것은 익힐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헤기는 거기에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환영술은 전투에 특화된 마법이었고, 헤기는 평생 전투나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아무것도 의문을 품지 않은 것을, 환영술을 배우지 않은 것을 에일과 대련하면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됐다. 에일과 저의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인데 도저히 메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습이나 그가 실수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제 실력이 그를 뛰어넘는 것은 너무 이상적인 말이었다. 에일은 헤기가 휘두르는 검을 가볍게 피했다. “너무 동작이 커! 동작이 크니까 공격 패턴이 훤히 보이잖아. 이래서는 나비 한 마리 못 베!” 에일이 더욱 헤기를 도발했다. “뭐 하냐, 너무 느려서 달팽이가 친구 하자고 하겠다!” 에일의 말에 헤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막 기운을 차린 아이에게 너무하지 않느냐면 에일은 어깨를 으쓱거리곤 말 것이다. 저는 목숨을 걸고 있는 거니까. 헤기가 검을 날렸다. 까딱 고개 짓만으로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한 검이었다. 검이 빙글 돌더니 부메랑처럼 에일에게 되돌아왔다. 에일은 제 이마를 찌를 듯이 날아오는 검을 잡아챘다.


  “회수하는 칼은 너만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

  “그리고”


  검이 헤기의 몸 곳곳을 헤집었다. 팔을 스치고 지나가자 팔 위로 서늘한 감각이 남았다.


  “너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지.”


  헤기가 신음을 내뱉었다. 에일이 헤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검에서 눈을 데지 마. 검이 꼭 있던 손에 있다는 법도 없거든?”


  구경하던 이들 모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일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에일이 헤기를 죽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반대쪽 손으로 옮겨간 검이 헤기의 목을 통과했다. 죽는다. 헤기가 눈을 꼭 감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풉! 하는 소리와 함께 에일이 배를 잡고 몸을 푹 숙이고 있었다. 헤기는 천천히 눈을 뜨곤 제 목을 살폈다. 분명 검이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서늘한 것이 꼭 뱀 피부 같았다.


  “완전 웃긴다. 너. 이거 환영 단검이야.”


  에일이 양손을 펴고선 일반 단검과 환영으로 만든 단검을 보여줬다.


  “자세히 보니 좀 다르지? 환영은 술법자의 정신력에 따라 정교해져. 보통 검은 모든 걸 베지만, 환영검은 배려는 것만 벨 수 있게 컨트롤이 가능하지. 어때, 이해가 돼?”


  이해하고 자시고, 자신의 몸에 생채기가 하나도 없는 것과 옷만 너덜너덜 걸레짝이 된 걸 보면 싫어도 이해하게 되었다. 에일은 시익 웃으며 헤기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검 만드는 연습부터 해봐. 환영술은 케르 가문만의 특기니까 타고났을 거야.”


  뒤돌아가는 에일에게 검을 날려버릴까. 헤기가 에일을 빤히 노려봤다. 뒤통수가 따가울 만도 한데 에일은 한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에일의 말은 즉 본인도 케르 가문 사람이라는 거였고, 그렇다면 대체 왜……


  “이제 싸움 끝났어?”


  에일 이외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헤기는 들고 있던 검을 다치지 않게 뒤로 숨겼다. 연한 금발을 한 아이는 헤기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넌 이름이 뭐야?”

  “…헤기.”

  “헤기? 난 아제이스야. 잘 부탁해. 헤기.”


  아제이스가 헤기의 손을 덥석 잡고 붕붕 위아래로 흔들었다. “부모님의 복수도 힘내!!” 헤기가 멋쩍은 듯 코를 훔쳤다. 네가 날 응원할 때냐. 헤기의 중얼거림에 아제이스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응원해야지. 에일이 질 리가 없으니까.”

  “아. 그래.” 


  울컥해 내뱉은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좀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환영검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신으로서는 에일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찢어진 옷을 대충 갈무리하자 아제이스가 새 옷을 건네주며 말했다.


  “걱정 마. 에일이 헤기를 이기는 일도 없을 거야. 헤기는 에일의 가족이니까.”

  “무…뭐? 가족? 그 자식은 우리 부모님을 죽였어! 난 그 자식을 죽일 거라고!!”


  헤기가 버럭 소리쳤다. 아제이스는 시선을 돌렸다. 


  “으응, 그치만 헤기…에일은……” 


  아제이스가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방긋 웃었다.


  “아니야, 어쨌건 파이팅!”

  “…갑자기 말을 돌리지 말고……”

  “아제이스!!”


  헤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옆에서 아제이스를 찾았다. 소년은 당황한 듯 아제이스를 불렀고, 소년의 품에는 얼마 전 봤던 여자가 몸을 덜덜 떨며 쓰러져 있었다. 에일을 불러와! 소년이 소리쳤다. 아제이스가 에일을 부르기도 전에 에일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바닥을 기는 여자에게 다가간 에일이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다들 떨어져!” 아제이스가 헤기를 뒤로 숨겼다. 에일이 여자의 배를 꾹 눌렀다. 곧 마법 반응이 일었다. 여자의 호흡이 돌아왔다.


  “내 피를 옮겨서 진정시켰으니 괜찮아. 리아, 독방에 있는 침대 좀 정리해줘.”

  “응.”


  다들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헤기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에일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었다. 에일은 여자를 들어 옮겼다. 그때 여자의 무릎에 거미문신이 보였다. 저건 케르 가문을 상징하는 문신이었다. 자신도 손목에 문신이 있었다. 어째서, 설마. 헤기가 손목을 그러쥐었다. 아제이스가 한 가족이란 말이 설마…









 

  ‘헤기…갚아줘…우리의…억울한 죽음을’ 환영이다. 헤기는 그들을 보자마자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뿌리칠 수 없었다. 제 뺨을 감싸오는 손은 차갑고 음성은 싸늘했지만 흘린 피는 진짜였다.


  “기다려 주세요, 반드시 복수를…”


  ‘아니, 넌 할 수 없어.’ 환영이 녹아내렸다. 이제는 익숙한 금발에 눈앞에 하얗게 점멸했다. 단지 그 목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헤기는 에일의 가족이니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헤기가 이마를 그러쥐었다.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손목에 문신이 미친 듯이 아팠기에 헤기는 한참이나 침대에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젠장.”


  에일은 대련을 해준다곤 했지만 자리를 비우는 날이 더 많았다. 듣기론 에일이 제일 연장자라 마을에서 물자를 조달해온다고 했다. 때문에 혼자서 연습할 때가 더 많았다. 이제 환영검을 만드는 건 익숙해졌다. 환영을 유지하는 것도 괜찮았다. 조절이 힘들었지만. 헤기는 에일의 얼굴을 그려둔 표적만 빗나가는 검을 보고는 혀를 찼다. 대체 뭐가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건지.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에일과 대련한 건 단 삼일 뿐이었고, 그 삼일에도 상대가 되지 못해 긴 시간 상대해주지 않았다.


  “실력이 꽤 늘었네?”


  헤기의 검을 막아낸 에일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환영술뿐만 아니라 검술에서도 에일이 한참 위였다. 몇 번이고 부딪친 검은 챙챙 소리를 내더니 손에서 튕겨 나갔다. 틈을 주지 않고 헤기의 멱살을 붙잡은 에일이 헤기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누워있던 헤기가 에일을 노려봤다. 에일은 터덜터덜 뒤돌아가 근처에 앉았다. “왜? 꼭 무기로만 공격해야 한다는 법 있어?” 자신도 에일이 자는 사이 기습이라도 해볼까 생각했기에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너 칼 없으면 멍멍이한테도 물려 죽겠네.”


  연신 키득거리며 웃는 에일을 보곤 헤기가 벌떡 일어났다.


  “처, 처음 배우는 거라 방심한 거야!! 내가 마음먹으면 너 같은 건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어!”

  “알겠으니 네가 던진 칼들이나 치워.”


  리아가 보면 또 화낸다? 에일은 투덜거리면서도 주섬주섬 칼을 집어 드는 헤기를 보며 말했다. 넌 나보다 리아가 더 무섭지? 헤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헤기, 날 죽인 후에는 말야.”


  칼을 나무통에 모아 넣던 헤기가 고개를 돌렸다. 겨우 관심을 끈 모양이다.


  “지키기 위해서 살아.”

  “…무슨 소리야.”

  “증오는 일시적인 감정이야. 목표를 잃으면 순식간에 사라지지.”

  “……”

  “그런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고. 가문의 비법에는 환영술만 있는 게 아니야. 지난번에 네가 본 치료마법도 가문의 힘 중 일부지.”

  “…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힘을 배워라, 헤기. 그래야 끝까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

  “…뭐야 그게.”

  “가령 자기 자신이라도 좋아.”

  “살인자가 하는 설교라니…웃기지도 않아!!”


  그 후로도 헤기는 끈질기게 에일에게 덤볐다. 기습은 하지 말아야지 했던 것이 에일의 설교 후에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에일은 헤기의 폭언을 잘도 견뎌냈다. 손목을 붙잡고, 뒷덜미를 끌어당기고, 비가 오는 날에도, 바람에 이불보가 날아가는 날에도, 너무 추워 밖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는 안에서 대련을 했다. 그때마다 리아가 둘에게 핀잔을 했다. 에일은 웃으며 넘겼지만 헤기는 리아의 말은 곧잘 들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질수록 악몽은 심해졌다. 헤기는 애써 그들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헤기는 외로움을 많이 탔고, 사랑을 원했다. 동정이라도 좋았고, 악의여도 괜찮았다. 젠장 헤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일과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스러워진다. 이곳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게, 어쩌면 나도.


  “헤기! 조심해!”


  그 사람들의 가족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하고.


  “상관말고 비켜!”


  돌부리를 밟고 넘어지려는 헤기를 에일이 붙잡았다. 왜 그토록 저를 살리려고 하는 것일까. 왜 저를 걱정하는 것일까. 부모님은 망설임 없이 죽였으면서 대체 왜! 헤기는 제 안에 있는 불안과 걱정을 안다. 혹시나, 설마. 에일이 저와 닮은 이유가. 같은 눈동자 색인 이유가 그저 우연이길 바랄 뿐이다. 에일의 등 뒤로 선명하게 나타나는 환영검에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벌떡 일어났다. 헤기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사라져!’ 그리고 환영검은 헤기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졌다.


  “너…”


  에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헤기를 바라봤다. 사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고, 받아치려면 받아칠 수도 있었다.


  “시…실수야!”


  헤기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자긴 천재라는 둥 환영검은 식은 죽 먹기라는 둥. 다들 믿지 않는 얼굴로 헤기를 바라봤지만, 에일은 인정했다. 위험했고, 죽을 수도 있었다. 제게 반격의 의지가 없었다면.


  “당신, 치료마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 나한테 치료마법을 가르쳐. 죽이는 건 그다음이야.”


  제법 그럴싸한 핑계였고, 필요한 일이었다. 죽이는 건 일단 보류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저 역시 녀석과 같은 살인자가 되는 건 사절이었다. 에일은 헤기를 빤히 보더니 피식 웃고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헤기가 대번 짜증을 냈지만 괜찮았다.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뭐?”


  이제는 마주 보고 앉아도 화가 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의 대화도 평범했다. 에일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니 저와 같은 아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저와 같은 케르가문의 아이들이었다. 헤기는 조심스레 에일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자세한 건 들을 수 없었다.


  “환영술을 배우다 보면 환영 같은 게 보이게 되기도 해?”


  에일은 무슨 소리야? 하며 아니라고 했다. 전혀 그런 거 없는데? 왜? 헤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에일은 뒤따라오지 않았다. 부모님과 아제이스의 모습을 한 악몽은 현실에게서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부모의 원수에게 복수는커녕 제자 노릇이나 하고 있다는 듯이 저를 질책했다. ‘헤기 갚아줘…우리의 억울한 죽음을…’ 귀가 아니라 머리에서 울렸다. 손목이 욱신거리며 헤기에게 현실을 자각시켰다.


  “…알고 있으니까 시간을 줘요……”


  아제이스의 모습을 한 환영이 점점 모습을 바꿨다. 저를 재촉이라도 하는 듯. 어서 빨리 에일을 죽이라는 듯. 그 환영은 어느샌가 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헤기는 손목을 붙잡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욱신, 욱신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치유마법은 소용없었다. 헤기는 환영에게서 도망치듯 뒤돌아 뛰어갔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거지, 나를 닮은 환영은, 나의 망설임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거지.

 









  “어디 갔었어 헤기! 도망가야 해! 따라와!”


  아제이스가 헤기를 붙들고 달렸다. 불타오르고 있는 집은 오래전 저택과 닮아 있었다. 에일이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제이스! 무슨 일이야! 왜 도망가는지 설명이라도 좀 해!” 헤기는 아제이스가 환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게 끔찍한 악몽일지도 모른다. 아제이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아제이스가 말했다.


  “…케르 가문의 병사들이야.”

  “뭐? 그럼 나는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날 구하러 왔을지도…”


  헤기의 얼굴에서 화색이 돈 건 잠깐이었다. 아제이스가 목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었다. 아제이스의 얼굴은 곤란한 빛이 띄었다.


  “…에일 때문에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까 얘기할게. 가문이 우릴 찾는 이유야.”

  “…아제이스 너도…”

  “그래. 나도 케르 가문의 아이야. 여기 있는 대부분이 각인을 가졌어. 왜냐면 이 각인은 마물을 심어두었다는 표식이니까.”


  머리가 새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뭐?”


  아제이스가 헤기의 손목을 붙잡고 계속 뛰었다. “사람의 몸속에서 길러낸 마물은 굉장히 강력해진대. 그래서 케르 가문의 일부 주술사들은 마물을 얻기 위해 아이들을 기르기 시작했던 거야.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에일이 가문석을 훔쳐 우리를 데리고 빠져나온 거지. 하지만 우리는 부모가 한 짓의 실상을 알고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어.” 아제이스가 숨이 찼는지 잠깐 멈춰섰다. “진짜 부모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둘은 다시 걸었다. 헤기는 아제이스에게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잠깐,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거야?”

  “네 부모님을 죽인 이유도 그들이 우릴 모두 처리하려 해서였어. 그리고 거기서 너를 발견했던 거고.”

  “증거도 없이 그런 황당한 소릴 해봤자!”

  “헤기! 위험해!!”


  아제이스가 헤기의 앞을 막아섰다. 아제이스의 말에 너무 집중해 주변을 둘러싸던 기척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아제이스가 마법을 맞고 쓰러졌다. “멈춰! 헤기는 귀한 실험체라고 말했잖나!” 남자가 헤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


  “헤기…도망가…”


  아제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제이스를 혼자 두고 갈 순 없었다. 헤기가 아제이스를 부축하려고 하자 아제이스가 그를 쳐냈다. 팔을 뿌리치고 제게서 멀리 떨어트렸다. 아제이스!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던 아제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헤기. 사실 난 가족이란 게 뭔지 잘 몰라……”


  언젠가 에일이 헤기에게 진짜 동생이라고 했을 때, 그때 아제이스는 헤기가 싫었다. 미치도록 싫었다. 우리 모두를 지켜주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헤기를 살리려고 하는 에일이 싫었다. ‘아제이스 헤기를 데리고 도망쳐.’ 아제이스는 여전히 헤기가 싫었다. 그리고 에일도 싫었고, 너무 싫었지만.


  “하지만…에일이 말한 가족의 의미가 진짜라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너희를 지킬게.’

  “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거야. 왜냐하면 헤기는…우리의 가족이니까.” 쩌억. 아제이스의 얼굴이 갈라졌다. 피가 쏟아졌고, 하얀 피부를 뚫고 나온 다리가 꿈틀거렸다. 뒤로 넘어진 헤기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봤다. ‘헤기…도망가…’ 목소리는 분명 아제이스였는데 형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거미였다. 아주 커다란 거미. 책에서나 봤던 마물이 눈앞에 있었다.


  “저런,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군.”


  유일하게 얼굴이 보이던 사내가 ‘아제이스’ 였던 것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것은 반항도 하지 못하고 꿈틀거리다가 이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미 주워들은 모양인데, 왜 아이들을 마물로 만드는지 아나?”


  설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는 없다.


  “길러진 숙주들은 나중에 마물이 되더라도 가문 사람을 공격하지 않거든. 어때 쓸만하지?”


  자신은 실험체가 아니었다. 실험체일 리가 없다. 그렇게 애지중지… 헤기는 제게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고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에일이 저를 살린 이유가, 부모를 무참히 살해한 이유가, 환영이 보이는 이유가. 진실이 이런 것이라고… 헤기를 붙잡으려던 사내들이 뒤로 물러섰다. 피투성이로 대거를 들은 에일이 헤기를 바라봤다.


  “당신이 불러들였나. 로드박사.”

  “날 살려둔 게 위험하다는 거 알고 있었잖나. 에일. 가문석과 너를 포기하기로 했어. 대신 헤기를 받아갈 거다.” 


  로드 박사라고 불린 이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에일이 헤기를 돌아봤다.


  “정신 차려 헤기. 열심히 가르쳐놨더니만 한심하게 이런대서 죽을 셈이야?”


  그러나 헤기의 시선은 여전히 아제이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에일은 헤기를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대로 들 처 멨다. 그들은 헤기 때문에 쉽게 공격하지 못했다. 에일의 환영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헤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벅찼다. 힘들었다. 머리로는 그렇구나, 이해를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니, 한편으로는 머리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 부모님이 제게 마물을 심어놨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부모님의 그 어떤 곳에서도 거미문신을 본 적이 없다. 그냥…모든게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뭐가 난 천재니까 야. 아무것도 못 한 주제에. 아제이스. 아제이스…미안해. 미안해 아제이스.

 

  절벽을 내려가다 미끄러진 둘이 엉망으로 굴렀다. 에일이 곧바로 일어나 헤기를 부축했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어?” 헤기의 얼굴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도망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일이 이를 악물었다.


  “제길, 잡히겠어…”


  헤기가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가자.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헤기가 에일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에일의 표정은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헤기.” 헤기는 그 목소리가 너무 낯설다고 생각했다. 지난 석 달 동안 지겹도록 들어온 목소리인데 너무 멀리 있었다. 헤기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예감이었다. 무섭도록 정확한.


  “받고,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에일이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산에서 벗어나 갈 수 있어. 헤기의 손에 대거를 꽉 쥐여줬다. 그건 헤기에겐 너무 크고 무거웠으나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거. 케르 가문의 가문석이야. 몸에 지니고 있으면 마물화 되는 걸 막을 수 있어. 몸에 심어진 마물의 힘을 꺼내 쓸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해.”

  “에일…” 제 목에 손 수 걸어주는 목걸이는 너무 컸다.

  “지금 나 혼자 도망치란 거야?”

  “그래. 할 수 있겠지?”

  “우…웃기지 마!”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당신이 뭔데 나보고 도망쳐라 마라야! 게다가 난 널 죽이려고 했어! 그런데 이런 건…뭔가 이상하잖아! 어째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헤기는 에일의 입에서 듣고 싶었다. 설마, 당신…


  “날……”

  “넌 내 하나 남은 가족이니까.”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헤기 잘 들어.”


  듣고 싶지 않았다. 또 설교할 생각이잖아.


  “살아남아야 해. 너만은 꼭.”

  “…같이…”

  “살아 있다 보면 언젠가는…”


  에일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복할 날이 올 거야.”


  다른 말이 있잖아.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왜.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헤기는 마물로 변하는 에일을 보며 몸을 떨었다. 피가 터지고, 남자들이 다가와 헤기를 잡아끌었다. 가만히 둬도 저항하지 못하는 헤기를 결박하고 목에 구속구를 채웠다. 헤기는 환영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 자신이 한심해서 죽은 이들이 저를 저주하는 거라고.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저것이 무엇의 환영인지.






 

  얼마나 오랜 시간 잔 것인지 몸이 찌뿌둥했다. 한기가 느껴져 몸을 웅크리던 헤기는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렴풋이 예상하였지만 살아남은 것은 저 하나뿐이었다. 헤기는 피투성이 손을 내려다보곤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무거워… 기억이 엉망진창이었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몸속의 마물도 가문의 정체도 부모님의 의도도. 아무것도 몰랐다면. 헤기는 에일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했다.


  “멍청이…”


  생애, 저를 위해 목숨을 걸어줄 사람은 이제 나타나지 않겠지.








 

  “너 그 실력으로 용병은 무리겠다.”


  헤기는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소원했고, 소원은 기적처럼, 혹은 인연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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