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크/헤기 생일 합작에 썼던거에요~
딱 이때만큼만 쓸 수 있었음 좋겠다...
혹한기에 몰아치는 바람은 어린 소년이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도 매서웠다.
그것은 비단 ‘혼자여서’ 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가진 것이라곤 이제 이름뿐이었으니. 몸뚱이도 짐이나 다름없었다. 다 타버린 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고, 가족이라고 부르고 싶었던 이들은 시신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미칠 듯한 슬픔과 고독, 분노에 혼자 오열하다가 이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로브 중 제일 깨끗한 것을 골라 걸쳤다.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챙겼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이는 제가 원래 살던 집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쳤다.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돈이 다 떨어졌을 때쯤 에는 용병일을 했다.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으나 그나마 배운 치유술이 도움이 됐다. 헛웃음이 났다. 나의 모든 걸 앗아간 남자가 가르친 것이 지금 저를 살게 하고 있으니.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몸이 아니었으니 용병 보다 제격인 일은 없었기에 헤기는 쓰게 웃으면서도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거처를 옮겼고 방이 없을 땐 마구간에 자리를 빌려 자곤 했다. 불편하긴 했으나 불평을 내뱉을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푸념을 들어줄 상대도 없었기에 고통은 모조리 혼자 감내해야 했다. 원래도 그리했을 일인데 괜스레 서러워서 눈물로 밤을 적신 적도 있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가 하늘에서 툭툭 한 방울씩 떨어져 뺨에 묻은 핏자국과 먼지를 쓸고 내려갔을 때 헤기는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용병일이 으레 그렇듯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었고, 아침에 웃고 떠들던 이도 밤이 되면 사라지곤 했다.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괴로워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헤기는 곧 외로움에 잠식되어 사라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종종 꿈에서 에일을 닮은 무언가가 나와 저를 괴롭히곤 했다. 그건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저와 똑 닮은 호박색의 눈동자에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살아라.’ 헤기에게 그것은 마치 주박과도 같았다. 에일의 모습을 한 악몽은 어느새 현실에서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과 같았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에일은 어느새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네 각오가 부족해서 그래. 너는 그렇게 말했었지. 헤기는 충동적으로 들고 있던 단검으로 제 손목을 찔렀다.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몇 번이나 찌르고, 베고 거미 모양을 한 문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손목을 찌르다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굳은살이 잔뜩 박 흰 손이 제 손목을 잡아챘을 때야 헤기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피가 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모르는 방이었다. 여관의 방 구조는 다 비슷비슷했으나 깔끔하기 그지없는 헤기의 방과 달리 지금의 방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옷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서툰 솜씨로 붕대를 감아 놓은 것을 보니 의원의 솜씨는 아니었다. 아파. 손목을 부여잡고 몸을 숙이고 있자 방문이 꽝!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남자는 아프냐? 하며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가 쟁반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못 걷는 건 아니겠지? 그제야 헤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하자 남자가 애는 애답게 굴라며 헤기를 데려와 테이블 앞에 앉혔다. 고소한 죽 한 그릇이 앞에 놓이니 금세 배가 꼬르륵하며 소리를 냈고 귀까지 빨개진 헤기를 보며 남자가 안 쳐다볼 테니까 식기 전에 먹으라며 몸을 돌렸다. 수저를 들고 깨작깨작 죽을 떠먹던 헤기는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수습하여 나무통에 밀어 넣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내였다. 언뜻 에일을 닮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헤기는 죽 한 그릇을 해치우고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데 남자가 도통 가만있질 않았다. 다 먹었냐? 그럼 네 방에 가. 헤기를 힐끔 보던 남자가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기를 방문 앞에 내버리듯 질질 끌고 간 남자는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 죽지 말고. 무언가 쿵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머물던 마을에 용병단 대장이었다. 아침에 마주치자 대장 얼굴도 못 알아본다고 혼이 났으나 영 혼나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내내 웃고 있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자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물론 묻는다고 하더라도 대답해줄 만한 답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섭섭했다. 그새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남자는 강했고, 용맹했으며 의협심 또한 뛰어났다. 꼭 지쳐 뒤처지는 이를 부축했고, 다쳐 쓰러지는 이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날은 큰 건이 하나 있었다. 다치고 죽는 이 하나 없이 귀환한 이들을 보며 남자는 기분 좋다는 듯 곳곳에 술을 돌렸다. 용병단의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남자는 헤기를 보며 어린애는 술 말고 주스나 마시라며 잔을 빼앗아 들었다. 주변에서는 헤기도 용병인데 어떠냐며 했지만 남자는 완고했다. 안 돼.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헤기 주변에 있던 이들이 넉살 좋게 말했다. 저래 봬도 널 아끼고 있어. 널 닮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거든. 죽었지만. 술에 취해 주절주절 내뱉은 말에 헤기는 고개를 주억였다. 딱히 무언 갈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죽은 남동생과 닮아서. 퍽 이해되는 사유였다. 헤기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곤 바람을 쐬러 문을 나섰다. 그때 손목이 붙잡혔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통증이 몰려왔고, 손목을 잡은 이는 헤기의 새된 비명소리를 듣고는 살짝 놓았다가 다시 잡고는 제 옆에 앉혔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남자였다. 헤기는 손목을 몇 번 털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었다.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말했지만 헤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이 계속됐다. 용병단 안에서는 하나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침묵을 깬 건 남자였다. 몇 년 전쯤인가 등에 너와 똑같은 문신을 한 여자를 본 적이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오히려 놀란 것은 헤기였다. 손목에 문신은 꼭꼭 숨기고 다녔는데 언제 봤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를 괴물이라 말하며 나를 떠났지. 동쪽으로 갈 거라고 했어. 대륙을 건널 거라고. 그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너도 떠날 거잖냐. 남자의 말에 헤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떠났어야 했다.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는데 당신이 주는 평화에 저도 모르게 남아 있고 싶노라고 대답할 뻔했다. 대신 헤기는 여자의 등은 어떻게 봤냐는 질문으로 화재를 돌렸다. 내일은 쉴 거니까. 너도 나오지 마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숙소로 돌아갔다.
용병단이 쉬는 날이 어디 있겠는가. 모처럼 대장의 죽은 남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내려진 호사를 헤기는 마음껏 누렸다. 오후가 다 되어서 일어난 헤기는 아래에 내려와 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텅 빈 여관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텅 빈 게 아니었다. 다들 숨어서, 무언가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때 여관의 주인이 저벅저벅 다가와 헤기의 입을 막고 제 방으로 올려보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헤기의 눈빛에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방으로 겨우 올라간 헤기는 당장 짐을 싸라는 말에 어째서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안주인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거니까! 당장 짐 싸고 나가! 아니, 마을에서 떠나! 갑작스러운 호통에 헤기는 싫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불안이 엄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헤기는 간신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오열하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대장이 죽었다. 너 때문에. 그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린가.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대장이 죽었다니. 헤기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잖아요. 제가 듣기에도 한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안주인은 헤기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찾아와 너를 아느냐고 물었어. 헤기는 손이 절로 떨렸다. 손목에 거미 문신을 한 검은 머리에 호박색 눈을 한 아이. 짐은 얼마 없었다. 대충 짐을 싸고 안주인이 내어준 뒷길로 걸음을 옮겼다. 대장은 모른다고 했어. 포상금이 1억 골드를 넘었는데도. 그리고 그들은 대장을 죽였어. 내부 고발자가 있었던 모양이야. 마을 바깥으로 이어진 샛길에 헤기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간신히 닦아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쾅!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헤기는 매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을이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고 있었다, 금방 제가 지나온 샛길로도 불길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헤기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처참한 비명이 온 하늘을 찔렀다. 저 때문이었다.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아니면 죽기라도 해야 했는데. 또 잃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헤기의 정신이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밭처럼 흔들거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뺨을 타고 뚝뚝 흐르던 눈물이 호수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던 헤기는 불현듯 지난밤 대장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와 같은 문신을 가진 여자가 동쪽에서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넜다고. 그곳에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 저주를 풀지도 모른다. 배후를 알아내고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 하나 때문에.
에일 너는 내게 지키기 위해 살라고 했지. 증오는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목표를 잃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잘못된 일일까.
배를 타고 몇 달은 가야 일 년 내내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이곳의 한파만큼은 아니지만, 꽤 추울 거야. 선장의 말을 흘려들은 헤기는 저 멀리 보이는 선착장을 보고 물었다. 저곳에도 용병단이 있나요. 헤기의 물음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용맹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이가 이끄는 용병단이 하나 있지. 기사보다도 더 대단한 이들이야. 남자는 묻지도 않은 것을 잘도 떠들어댔다. 곧 있으면 도착할 것 같으니 헤기에게 짐을 챙기라고 한 남자는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닻을 내려라! 콜헨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커다란 거미가 마을을 풍비박산 내는 모습이었다. ‘무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핑계였고, 헤기는 커다란 흰 거미를 보자마자 손목이 미친 듯이 쑤시는 것을 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흐려졌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저것을 당장 제 눈앞에서 치우길 바랐을 뿐이다. 환영검이 녀석의 머리를 가르고 허공에 사라졌다. 거미의 움직임은 멈췄고, 비로소 손목의 통증도 사라졌다. 그런데 영 개운하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걸 놓친듯한, 그래 거미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거미에게로 가고 있었다. ‘헤기.’ 익숙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기어 나와 헤기를 옭아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자 이번엔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반 토막 난 머리통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금빛이었다. 아름답고, 순수한. 아이가 고개를 들어 헤기를 바라봤다. 헤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그건 아이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미안해. 아제이스. 미안해. 너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 아제이스. 아제이스!!
“헤기!!”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가 저를 깨웠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던 커다란 손이 몸을 감싸 안았다. 순식간에 현실 세계로 끌려 나온 헤기가 가늘게 눈을 떴다. 익숙한 땀 냄새에 손을 뻗어 어깨를 그러쥐자 더욱 저를 끌어안는 탓에 숨이 턱 막혔다. 흙먼지 날리는 전장에서 이렇게 저를 안고 있어도 되는가, 에 대한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어느새 주변은 정리되고 있었고, 부상 입은 자들을 하나둘 옮기고 있었다. 딱딱한 갑주에 이마가 닿자 열이 녹아내렸다. 차가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가 꿈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혹, 지금이 꿈이 아닐까? 입술을 살짝 깨물어도 봤다. 그럴 리가 없는데, 흐린 시야 속에서 그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돌아가서 제대로 치료받고.” 허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어깨를 살짝 잡아 내린 헤기가 품에 파고들었다. 평소였다면 충분히 애교로 볼 수 있는 상황임에도 허크는 묵묵히 헤기의 몸을 품에 안고는 마을로 돌아가는 무리에 합류했다. 점점 가빠지는 숨에 허크가 무어라 속삭였으나 헤기는 듣지 못했다. 귀울림이 심했다. 허크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다.
“죽지 마. 제발.”
2
단순한 악몽이었는지, 주마등이었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선명한 기억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잊지 않았어. 헤기가 중얼거렸다. “무얼?” 허크가 물었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문 앞에서 저를 빤히 쳐다보는 허크를 보며 헤기가 고개를 돌렸다. 엿듣다니 악취미예요. 헤기의 말에 허크가 어깨를 으쓱이며 바로 옆에 앉았다. 침대가 쑥 꺼졌다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같은 방을 쓴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미안해요.”
“미안할 필요까진 없고.”
허크는 헤기의 이마를 쓸어보며 열은 없네. 하며 말했다. 언제 갈아입었는지 편한 옷을 입고는 헤기의 옆에서 떠날 줄 몰라 하는 남자를 보며 헤기가 몸을 틀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많이 놀랐어요? 헤기의 어깨를 감싸 쥔 허크가 조금. 하고 대답했다.
콜헨에 도착한 지 넉 달이 흘렀다. 딱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시간 만큼이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거미를 죽이고 그대로 마을에서 용병일을 하던 헤기는 허크를 만났다. 이곳 사람이라고 하기엔 말투가 제 고향과 닮았고, 그 역시 헤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쪽에서 왔냐는 말에 헤기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사사건건 참견하며 제 옆에 있었다. 허크와의 관계가 발전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방, 같은 공기, 같은 냄새. 헤기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 올 때면 꼭 허크의 침대로 갔다. 처음에는 제가 몽유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끙끙 앓는 저를 보다 못한 허크가 제 침대로 데려가 옆에 눕힌 것이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으면 영감이 이렇게 해줬거든. 하루는 잠에서 깨어나 그를 쳐다보자 그가 멋쩍은 듯 해준 말이었다. 딱히 변명을 듣고 싶어서 쳐다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스워지는 것이다. 자신이 무어라고, 시끄러우면 쫓아내거나 깨우면 될 것을. 헤기는 그가 조금, 에일과 대장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크긴 했으나 과묵하고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제 몸보다 큰 대검을 휘두르며 마족을 척살하지만 그렇게 잔인한 사람도 아니었다. 헤기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제일 많이 바뀐 것은 성격이라고 봐도 무방비했다. 헤기는 저에게 허크가 있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하나둘 세 아려 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알면 무엇하겠는가 또 변하게 될 터인데. 헤기는 제 등을 쓸어내리고 제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에 눈을 살짝 감았다. 이 사람이라면, 하고 생각했었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붙잡지 못하는 곳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에일과 대장 모두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미련은 시야를 가리고 이 땅에 저를 발붙여 놓게 했다. 허크를 올려다본 헤기가 눈을 감았다. 이내 입술이 부딪쳤다. 그답게 입술은 거칠었고,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은 어깨도 아팠다. 입술을 파고 들여는 혀에 살짝 입을 열자 금세 입안을 범했다. 점점 뒤로 밀리는 헤기의 턱을 부여잡고 제 쪽으로 당기고는 이를 훑고 혀를 빨아먹을 듯 쪽쪽 거리던 그가 이제는 완전히 헤기의 몸을 제 품에 가뒀다. 어느새 허크의 밑으로 내려간 헤기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뭄이 난 것처럼 쩍쩍 갈라졌던 입술에서 어느새 진득한 숨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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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크는 복수…같은 거 해본 적 없어요?”
제가 말해놓고도 조금 부끄러워 목소리를 줄인 헤기를 보고 허크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려놨다. 불을 지피지도 않을 거면서 입에만 물고 있는 모습이 조금 웃겼는데 그마저도 저를 위한 거라고 들었을 땐 웃을 수 없었다. 허크의 가슴팍 위로 헤기의 손톱자국이 길게 내려앉았다. 지금 나한테 복수하려고? 허크는 장난스럽게 헤기를 끌어안고는 몸을 간지럽혔다. 상처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기에 헤기는 약간 인상만 썼다.
소리도 없이 비가 내렸다. 눅눅한 옷을 한 겹 입은 듯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헤기는 제 옆에 누운 허크의 탄탄한 몸을 감상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허크의 시선은 헤기의 배에 고정되어 있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는데 죽을 뻔했다. 위치가 좋지 못했다. 다들 그렇게 말했다. 벌써 몇 주 전의 일이었는데도 허크는 그 상처만 보면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 굴면서도 상처에는 위에는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복수해 달라고?” 허크의 손이 배에 닿았다.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배에 닿은 손이 거칠고, 딱딱해서만은 아니었다. 제 배를 뚫어 버린 마족을 향한 살기에 몸이 떨렸다.
“그게 아니라, 그냥…”
“그냥?”
“…제가, 하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배를 후려갈긴 이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지만, 헤기는 다시 끔 눈앞에 목표를 다잡았다. 언제까지고 콜헨에 머물 수는 없었다. 허크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수건 하나 두르지 않고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섬주섬 주운 허크가 말했다. “아서라. 할 게 못 돼.” 눈도 마주치지 않는 허크를 보고 헤기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저릿하게 아팠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해봤다는 거네요? 헤기의 말에 허크는 어깨만 으쓱 올렸다. 내가 떠돌아다닌 마을이 몇 갠데. 그러나 복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헤기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물었다.
“누굴 위해서요?”
번쩍, 하늘이 빛났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곧이어 번개가 내리쳤다. 허크는 헤기를 보며 코웃음을 터트렸다. 번개, 이젠 안 무서워하는구나. 말을 돌리려는 것임을 앎에도 헤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크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헤기에게 다가가 이마를 쓸어 올렸다. 헤기의 오른쪽 이마에는 모르는 상처가 있었다. 오래되어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았지만 허크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마족과의 싸움에서 생긴 게 아니었다. 아주 정교하고, 실력 있는 자가 제압하기 위해서 낸 상처였지.
“너는 누굴 위해선데?”
“제가 먼저,”
“에일?”
침묵은 독이었다. 허크는 입술을 꾹 다문 헤기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곤 말했다. 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다정하다고 말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헤기는 그저 입을 꽉 다물었다. 허크의 표정이 살벌해서 입을 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헤기. 나는…”
“……”
“네가 무얼 하던 상관 안 해. 나는 무조건 네 편이니까.”
“……,”
“하지만 날 떠나지만 마라.”
허크가 헤기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자자. 이제.
허크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다. 그 맹목적인 사랑에 헤기는 가끔 제가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가, 생각했다. 저를 위해 희생했던 이들을 한구석에 묻어 놓고서 이런 생활을 해도 되는가.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번 맛본 행복은 벗어나고 싶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떠나고 싶지 않아. 이곳에 남고 싶어.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그러나 헤기는 모두를 버릴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악몽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허크는 제게 사랑을 퍼부었다. 그 어느 것도 버틸 수가 없었다.
당신의 사랑은 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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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헤기는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시야가
다시 한 번 흐려졌다. “헤기!!” 몸이 크게 흔들렸다. 허크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귓가에 번쩍였다. 제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는 허크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헤기가 입술을 달싹이자 허크가 고개를 저었다.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분명 퇴각하는 중이었다. 허크가 제게 잠깐 눈을 감고 있으라고 말했다. 잠들면 안 돼. 위험하니까. 무엇이 위험한지 알 수 없었다.
“헤기. 기습이야. 나는 가봐야 해.”
가지 말아요. 헤기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건 허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야만 해. 그래야 모두를. 그리고 너를 살리는 일일 테니까. 허크가 헤기의 손을 잡고는 입을 맞췄다. 금방 돌아올게. 다른 이에게 헤기를 품에서 넘겨준 허크가 등에 있는 검을 한 번 쥐었다가 뒤를 돌아봤다. “허크.” 헤기가 마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앞이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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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이라도 꿨어?”
땀에 젖은 옷을 벗겨주며 묻는 허크를 보며 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크,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꿈. 헤기의 말에 허크가 크게 웃었다. 네가 가는 것보다 낫지.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서 헤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몸이 축축 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허크가 입을 열었다. 그도 유난히 말이 많았다. 위험했던 적이 있었지. 허크의 말에 헤기는 아, 하며 배를 쓸어보았다. 제가 다쳐서 허크가 난리 쳤던 때요? 헤기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허크가 어. 하며 대답했다. 그때 너 정말 죽을 뻔했어. 안 죽었잖아요. 헤기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꼬집은 허크가 물수건으로 팔을 들어 몸을 닦아줬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 다는데 뭐냐. 허크가 핀잔을 했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던 헤기는 허크의 잔소리를 들으며 눈을 꼭 감았다. 차가운 물수건이 닿는 것보다 허크가 붙잡은 팔이 너무 뜨거워서 열이 영 가라앉지 않았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던데.”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허크가 피식 웃었다. 옮기시려고? 허크가 헤기의 몸을 일으켜 입을 맞췄을 때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허크? 헤기가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왜 울어요? 허크는 말이 없었다. 헤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입안에 텁텁해졌다. 모래라도 씹은 듯, 공기도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습하고, 더러운 공기가 방안을, 아니 제 몸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허크. 도망쳐요. 그러나 허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두 눈을 꼭 감고 제 손만 붙잡고 있었다. 그때, 당신이 내 손을 붙잡았을 때 너무 많은 감정이 내게 흘러들어와 나는 어쩔 줄 몰랐고, 그저 무너지는 천장에 당신이 죽지 않도록 머리를 품에 끌어안는 게 최선이었어. 천장이 무너져 죽는 줄 알았던 헤기는 아무것도 저희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었다. 새파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저를 끌어안는 품은 뜨겁고, 피비린내가 났다.
“…허크”
배에 통증이 있었다. 아까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했던 통증이 저를 현실로 끌고 나왔다. 모든 게 꿈이었어. 다행이다. 헤기는 애써 웃으며 허크를 바라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허크. 헤기가 다시 한 번 부르자 그가 대답했다. 응.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어서 그가 어떤 얼굴인지 알 수 있었지만 헤기는 직접 보길 원했다. 얼굴 보고 싶어요. 헤기의 말에 허크는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눈, 보면 안 돼요? 한 글자 한 글자 말하는 것에도 힘에 겨워 피가 섞인 마른 숨을 토해내자 허크가 눈을 떴다. 새빨간 눈동자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평생 우는 얼굴은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헤기는 제 배를 붙잡은 커다란 손 위로 제 손을 올려놓았다. 뜨겁기보단 따뜻했다. 사람의 품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사실 아직 번개 무서워해요…”
“…그래.”
헤기는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복수 같은 거, 다 잊었어. 당신 때문에. 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일도, 저에게 누군갈 지키기 위해 살라고 했는데. 그거 당신이었나 봐. 악몽도 자주 꿨는데, 당신이 안아준 후부턴 괜찮았어요.
“그때도 사실, 무서웠는데…당신이 있어서…무섭지 않았어.”
“응. 알아. 알고 있어. 헤기 말하지 마.”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죽지 마.”
“응. 안죽을게요…안아주세요…”
“응. 약속이야…”
3
헤기가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보름 뒤였다. 여름의 습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 살랑 흔들며 이마를 간지럽혔고, 뺨을 스치며 땀을 훔쳤다. 겨우 눈을 뜬 헤기는 제 옆에 잠들어 있는 허크를 바라봤다. 긴 꿈을 꿨어요. 헤기의 말에 허크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래 잤으니까. 목소리는 착 감겨 있었다. 눈물을 머금은 것도 같았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당신 탓이야. 헤기가 눈을 감았다. 허크는 조금 불안한 듯 몸을 일으켜 헤기를 내려다봤다. 다시 감긴 눈을 영영 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에 이름을 부르자 헤기가 대답했다. 당신이 날 꿈에서 붙잡고 있었어. 환영은 종종 무언가를 속삭이곤 했다. 그러나 헤기는, 듣지 않았다, 듣지…못했다. 그보다 더욱 선명한 환영이 눈앞에서 울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나 때문에, 운다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기뻤고,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주지 않았지.
“근데 그러는 거예요…마지막 이라고 일어나 달라고.”
“응…?”
“내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지막 생일이 될 거라고…”
“……”
“허크. 생일 축하해요…선물은…준비하지 못했지만.”
허크가 고개를 저었다. 뻗은 두 팔을 붙잡고 품에 끌어안고는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꿈에서, 내가 우는 거 많이 봤어? 허크의 말에 헤기는 작게 웃으며 등을 쓸어내렸다. 대답 없는 긍정에 허크 역시 웃었다. 다행이다. 그럼 이상해보이지는 않겠네. 마른 입술 사이로 눈물이 스며들었다. 나도 준비 못했어. 허크의 말에 헤기가 웃어보였다. 저는 허크랑 있는 게 선물인데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잘도 말을 이었다. 이제 깨어난 주제에, 쭉 걱정시켰던 주제에. 그러면서도 깨어나서 너무 고맙다고.
“나도 그래. 나도…네가 있어서…”
“네.”
“최고의 선물이야…헤기.”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한다.”
사랑하는 당신, 나는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평생 그들에게 속죄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헤기는 죽음의 끝에서 환영을 보았다. 그 환영은 무언가를 속삭이곤 했으나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헤기에겐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선명하게,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지 마. 헤기는 허크의 사랑을 독이라고 했다. 죽지 마라. 얼굴위로 뚝뚝 떨어지는 저 눈물조차. 그리고 나는 그 독을 마시는 거미야. 당신만이 유일하게 나를 살게 해. 당신의 옆에 있다면 손목의 통증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환영 역시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하지만 당신이 없다면 비오는 날 잠들지 못하겠지.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겠지. 나는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고 말라갈 것이다. 그러니까 내 사랑, 당신의 독을 마시게 해줘요.
출처: http://ararararararrrrr.tistory.com/8 허크/헤기 생일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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