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런 기억도 있었다.

  헤기는 파도에 몸을 실었다. 바다를 건너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족히 한 달은 걸리는 기간을 배에서 보내야 했다. 헤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다시 옛날이었고, 어둠이었고, 혼자였다.


  혹한기에 몰아치는 바람은 어린 소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매서웠다. 생은 얼마나 잔인한가. 헤기는 몇 날 며칠을 무너진 집 앞에 머물렀다. 저를 붙잡아 가려는 이도, 해치려는 이도, 가족도 아무도 없었다. 피가 말라붙고, 시체가 썩어 악취가 몸에 밸 정도로 앉아 있다가 겨우 자리를 옮겼을 땐 겨울이 오고 있었다. 차디찬 강가에서 몸을 씻고 겨우 건진 옷을 걸쳤다. 커. 소매가 한참 남았다. 마른 손목은 스스로가 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 위로 로브를 두르고 대거를 등에 멨다. 제가 들기엔 너무 크고 무거웠지만 버릴 순 없었다. 헤기는 주머니에 단검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은 산골짜기 일은 하나도 모른다는 듯 평화로웠다. 헤기는 들고 있던 보물을 모조리 팔았다. 음식을 사고, 몸에 맞는 옷도 샀다. 보물 상인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원래 제 것이 아닌 물건들이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마차를 빌려 탈 수 있었다. 지붕이 없는 마차였기에 밤길은 추웠다. 헤기는 짚더미에 몸을 푹 기댔다. 하늘은 처음 봐… 저택에 살았을 땐 좁은 창문이나 보고 살았고, 에일과 만난 뒤에는 복수심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헤기는 한참이나 별을 보다가 잠에 빠졌다. 일어났을 땐 늦은 오후였고, 마부는 마침 잘됐다는 듯 헤기를 깨웠다. 마을에 도착했소. 헤기는 골드 조금을 쥐여 주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는 괜찮다고 했지만 헤기가 그러고 싶었다. 남은 건 마을에서 방 하나를 겨우 잡을 정도였다. 좁았지만 그편이 나았다. 전 재산을 모조리 탈탈 써버린 헤기는 마을에서 일을 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천상도련님이었던 헤기가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다. 막노동은 힘이 없었고, 식당에선 실수투성이였다. 가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몸이나 팔아보는 건 어떠냐며 추행하는 이도 있었지만 헤기는 인상만 잔뜩 찌푸리곤 무시했다. 그새 본 건지 헤기는 제가 읽던 책을 살펴보는 식당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금방도 실수했기에 잔뜩 움츠려있던 헤기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것에 고개를 들었다. “마법산가 봐?” 주인은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은 흐음.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마을에 용병단이 있어. 거기 지원해보는 건 어때. 그가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최근 마물이 마을 근처까지 출몰해서 급히 용병을 구하는 모양이야. 그는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주며 말했다. 몸조심하고. 골드 조금과 먹을 걸 받은 헤기가 그에게 꾸벅 인사하며 용병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들은 말로는 그에게 저만한 딸이 있다고 했다. 헤기는 괜히 도리질을 치며 용병단을 찾았다.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왁자지껄 떠들다가 헤기를 보곤 조용해졌다. 여기가…맞는데… 순식간에 조용해진 안을 보곤 헤기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잘못 찾아왔나… 의문을 가지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엉덩이를 툭 쳤다. 꼬마 도련님이 올 곳은 아닌데? 몸을 팔러 왔다면 또 모를까. 으하하하! 조용하던 용병단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헤기가 인상을 쓰자 남자가 농담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싸움을 잘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마법사를 겉으로 보고 판단하는 건 옳지 못하다는 걸 알 텐데요.”

  “마법사가 용병단에 올 일도 없지.”


  그랬다. 마법사는 보통 귀족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마법사에겐 노력 말고도 중요한 게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우려면 돈도 많이 들지. 남자가 덧붙였다. 몰락한 귀족이라면 또 몰라. 근데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던데. 남자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출신이 중요한가요?”

  “음. 아니. 아니지.”

  “그럼 못할 이유도 없잖아요.”

  “우리가 봉사단체는 아니어서. 실력은 봐야 하지 않겠어.”


  마침 용병단의 뿔피리가 울렸다. 남자는 잘됐다는 듯 헤기를 바라봤다. 실력을 보여줄래?

 





  형편없었다. 헤기는 사내들 틈에 끼지도 못했다. 뜨겁고, 아프고, 피가 튀는 전장은 처음 봤다. 헤기는 결국 남자의 손에 의해 뒤로 끌려났다. 걸리적거려. 남자가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전투가 끝나고 용병단으로 돌아온 남자가 헤기를 보며 혀를 찼다. 마법 자체가 이런 소규모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그야말로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무슨 사정으로 왔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남자는 알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다른 일도 못 하는 모양인데 거두고 있을까. 라기엔 반발이 심하거나 다른 쪽으로 나쁜 일을 당할 것이다. 처음에는 겁주어 쫓아내려고 했는데 의외로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에 전투에 데려간 것이 실수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화살에 독이 스며있었는지 피부가 죽어가고 있었다. 잘라내야겠는데.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자르면 죽을걸? 도박이었다. 그들은 바들바들 떠는 사내를 내려두곤 잘라야 한다 말아야 한다 다투었다. 내버려 두면 살지도 모른다. 잘라야 산다. 그 중하나가 헤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참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헤기가 조심스레 일어나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용병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헤기의 손에 푸른빛이 돌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물었고, 사내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몸 안에 있는 독은 해독제를 써야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던 용병들이 소리를 질렀다. 대단하잖아 신참! 커다란 손이 헤기의 등을 퍽퍽 쳤다. 칭찬의 의미였지만 헤기는 영 버거워 보였다. 남자는 슬쩍 그 틈에 끼어 부상자를 살폈다. 상처는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치료마법을 쓸 줄 알면 말을 하지. 헤기는 손만 꼼지락거릴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좋아. 합격이야.”

  “…감사합니다.”


  누군가가 사이를 불쑥 끼어들었다. 머물 곳은 정했어? 용병단 건물에도 방이 있는데 어때. 남자가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여관에서 자라. 그 정도 돈은 있지? 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여관에 짐을 놓고 온 차였다. 다른 곳에서 머물 일은 없었다. 북적거리는 것도 싫었고, 땀 냄새나는 남자들 사이는 더 싫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씻지도 않고 피 냄새와 땀 냄새로 가득한 용병단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헤기는 오래 참았다. 단장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이제 가 봐도 좋다는 소리에 헤기는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용병단을 빠져나갔다. 여관으로 돌아와 제 방에 들어가자 힘이 풀렸다. 그대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진 헤기는 낮은 천장을 봤다. 좁아. 좁디좁은 방이었다. 침대 하나만 들어가는데도 꽉 차는 방에 책상을 욱여넣어 놨다. 그래도 창문이 있는 게 어딘가.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들어왔다.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데 힘이 나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헤기는 저도 모르게 단검을 꽉 잡았다. 저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그들은 저렇게 다정한 속삭임을 주지 않는다. 문을 부쉈으면 부쉈지. 헤기는 살짝 고민했다. 대답할까? 하지 말까. 없는 척할까. 아니면 숨을까. 창문으로 뛰어내려도 될까. 여기 몇 층이었지? 2층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죽일까? 또 죽여야 할까? 시간으로 치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았다. “있는 거 알아.” 단장의 목소리였다. 바짝 긴장했던 어깨가 축 내려갔다. 천천히 문을 열자 얼마나 봤다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잤어?”

  “…아뇨…”

  “잘됐네. 밥이나 같이 먹자고.”


  헤기는 쥐고 있던 단검을 뒤로 숨기곤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에 앉자 미리 준비라도 해 논듯 음식이 나왔다. 이 정도면 팁이라도 챙겨줘야 할 텐데 그들은 헤기의 속도 모르고 웃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 “단장이 부탁한 거야. 먹으렴.” 주인아주머니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헤기는 맞은편에 앉은 단장에게 고개를 꾸벅이곤 수저를 들었다. 간만에 먹는 따뜻한 수프가 혀를 녹였다.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크림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지금이 겨울이란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헤기는 저도 모르게 허겁지겁 수프를 비웠다. 갓 구운 따뜻한 빵을 수프에 적셔서 먹고, 구운 감자와 고기를 먹으니 배가 금세 꽉 찼다. 단장은 어느새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봐. 그는 술을 부탁하곤 헤기를 보며 말했다. 헤기는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닦았다. 곧 남자가 부탁한 술과 헤기 몫의 차가 나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어느 가문 사람이야.”


  차를 마시던 헤기가 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남자는 그것마저 여유롭게 들어주었다. 소매로 입가를 닦은 헤기가 되물었다. 네?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치유술은 고급 마법이야. 평민이 혼자서 익히기엔 무리지. 게다가 너같이 어린애는 더더욱 그렇고.”

  “……”

  “…케르?”


  남자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야 하나, 헤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자는 역시라는 얼굴로 말했다.


  “치유술로 유명한 곳은 케르 가문뿐이니까.”

  “알고……있었어요?”

  “여기서 하루만 꼬박가면 나오는 게 케르 가문 영지야.”

  “……”

  “도련님이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는데…가출이면 얌전히 집에 가야지. 부모님이 걱정한다.”


  헤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은 에일에 의해 모조리 불타 없어지지 않았는가. 부모님도 살해당했고, 그대로 케르 가문은 멸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케르면 이 근방에서 꽤 유명한 가문이었다.


  “하지만…얼마 전에 불이 났잖아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무슨 소리야. 화재가 있었긴 했는데 금세 진압됐어. 사상자는 없었고, 정원이 조금 탄 거 말고는 없었지. 방화범은 잡았다고 들었는데.”

  “……네?”

  “너 떠돌아 다닌 지 얼마나 됐냐. 보니까 머리카락도 푸석푸석하고…”


  남자가 헤기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귀족 도련님이 가출했다고 한 것치고는 애 꼴이 영 좋지 않았다. 그만한 가문에서 아들을 방치 했을 리도 없고.


  “…저는 그냥…”


  헤기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꽉 깨물었다. 대체 뭐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부모님의 죽음을 두 눈으로 봤었다. 무너지는 집 안에 있었던 건 자신이었다. 시체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었고, 발끝에 닿은 건 분명 사람의 피였다. 제게 복수를 해달라고 울부짖는 환영 역시 부모였던 사람들이다. 남자는 그런 헤기를 빤히 보더니 중얼거렸다. “사생아인가…” 참으로 예의 없는 사람이다. 면전에 대놓고 사생아라는 소리를 하다니. 그러나 헤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가문이 저를 찾고 있을 것이다. 내일 이곳을 떠나야 했다. 오늘 일의 보수라고 남자가 쥐여 준 돈은 꽤 많았다. 아마 앞으로도 잘 부탁 한다는 뜻에서 준 것이겠지만. 헤기는 잘 먹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에 남자의 시선이 콕콕 박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사과했지만 헤기는 듣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일 새벽에 떠날 것이다. 헤기는 짐을 꽉꽉 담아 넣었다. 가방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떠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또다시 부랑자 생활을 할지도 모르고, 차디찬 강에 몸을 씻고, 비가 오면 동굴에서 모닥불 하나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계속될 것이다. 계속…헤기는 조금 지쳤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도망 다녀야 하지.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할까. 정말 끝나는 날이 올까. 제가 맘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기야 할까. 가족이라던가, 연인이라던가, 친구라던가 그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오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기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머리 아파. 오늘 밤은 지독한 악몽을 꿀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헤기를 깨운 건 매서운 손길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헤기는 끌려 나왔다. 손이 묶이고, 눈이 가려져서 앞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려는 것도 소용없었다. 천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새벽에 쳐들어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저를 끌고 갈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케르 가문. 헤기는 발버둥을 치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쓸린 맨살이 무척이나 아팠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헤기의 턱을 누군가 들어올렸다. 


  “그냥 보내긴 아까운데.”


  남자의 목소리였다. 단장의 목소리였다. 헤기는 손을 쳐내려고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가 헤기의 턱을 우악스럽게 붙잡고는 눈을 맞추게 했다. 정확히는 혼자 헤기의 얼굴을 뜯어봤다.


  “네 가문에 너를 넘기기로 했어.”

  “……!!!”

  “도망치면 다리 하나는 분질러도 된다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남자가 다리를 붙잡으며 말했기에 헤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볼까.” 남자는 헤기의 몸을 들 처 메고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는 건지, 언제까지 가는 건지, 남자는 한참이나 걷다가 힘들었는지 헤기를 바로 안아 들었다. “이게 편하겠다.” 그러고도 얼마 못 가 헤기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왜 너를 잡았는지 안 궁금해?”

  “……”

  “아, 입을 막아놨지.”


  그제야 헤기의 입을 막은 천을 풀어버린 남자가 대답해보라는 듯 몸을 들썩였다. 헤기는 입술을 구겼다.


  “아니요…”

  “왜! 궁금해해야지.”


  헤기가 다시 목석처럼 입을 다물자 남자는 포기했다는 듯 혼자 지껄이기 시작했다.


  “천만 골드야! 널 데려가면 천만 골드를 받기로 했어.”


  어느새 목소리가 높아진 남자가 신나서 떠들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말이 우는 소리와 마부의 목소리, 남자가 말하는 지명. 모두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남자는 반대쪽 의자에 헤기를 눕혀 두고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천만 골드면 용병일 따위 하지 않아도 돼. 가게를 차려도 되고, 몇 년은 놀고먹고 다시 일해도 되고,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

  “이 기회를 차버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이해하겠지. 헤기.”


  못해요. 이해하지 못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한구석으로는 이해했다. 이런 생활 따위 더 이상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저와 닮았다. 남자는. 헤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둠이었고, 혼자였고, 빛은 없었다.

 





  마차가 멈췄을 때 헤기는 정신을 차렸다. 손과 발은 풀려있었고, 눈을 가린 천도 없었다. 마차 밖은 밝았다. 아침은 아니었다. 횃불을 든 사내들이 마차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를 등지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 헤기는 주변을 살폈다. 제 짐이 있었다. 그것을 메고 반대쪽 문을 열었다. 행운인지 우연인지 문은 열렸고, 헤기는 반대쪽 숲으로 몸을 피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횃불이 탁탁 타들어 가는 소리와 남자가 사내들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풀리지 않았나? 약속된 대금을 못 받았나? 그러나 헤기는 그들이 실랑이하는 이유를 영원히 알지 못했다. 숲으로 들어가고, 들어가고, 또 들어갔을 때 헤기는 커다란 나무뿌리 밑에 몸을 숨겼다.

  가방에 식량이 떨어져 갈 때쯤 헤기는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밤에는 추위와 늑대 울음소리에 몸을 떨었고, 낮에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몸을 웅크렸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근처를 지나가던 사냥꾼들에 의해 다음 마을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헤기는 그 마을에서 씻고 마차를 빌려 탔다. 아주 오랫동안 마차에서의 생활을 했다. 말에 먹이와 물을 주면서 일을 도왔다. 하루, 이틀, 나흘, 일주일, 보름, 한 달을 넘게 마차에서 생활하자 몸이 쑤셨다. 허리도 아팠고, 두통은 심해졌다. 불편하긴 했으나 불평을 내뱉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푸념을 들어줄 상대도 없었기에 고통은 모조리 혼자 감내해야 했다. 원래도 그랬을 일인데 괜스레 서러워 눈물로 밤을 적신 적도 있었다.

  얼마나 마차에 몸을 실었을까. 꽤 멀리 왔다. 새로 도착한 마을에선 케르 가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불안해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헤기는 저를 붙잡는 사람들에게 웃어주며 마을을 떠났다. 떠났다? 헤기는 도망쳤다. 도망치고, 도망치다 돈이 다 떨어졌을 때쯤에는 용병일을 했다. 에일에게 배운 치유술이 유일하게 도움이 됐다. 헛웃음이 났다. 저는 결국 에일에게서 벗어나지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저의 모든 걸 빼앗아간 남자가 가르친 것이 지금 저를 살게 하고 있었다.


  ‘비……’


  헤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저 대신 울어주기라도 하는 듯 비를 쏟아냈다. 용병일이 으레 그렇듯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었고, 헤기는 이번 마을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 그제 정이라도 들어버린 것인지. 헤기는 불에 타, 하늘로 올라가는 시꺼먼 연기를 보곤 눈을 감았다. 뺨에 붙은 핏자국이 비와 함께 닦여나갔다.

  종종 꿈에서 에일을 닮은 무언가가 나와 저를 괴롭히곤 했다. 그건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저와 똑 닮은 호박색의 눈동자에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 ‘살아라.’ 헤기에게 그것은 마치 주박과도 같았다. 에일의 모습을 한 악몽은 어느새 현실에서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과 같았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에일은 어느새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네 각오가 부족해서 그래. 너는 그렇게 말했었지. 헤기는 충동적으로 들고 있던 단검으로 제 손목을 찔렀다.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몇 번이나 찌르고, 베고 거미 모양을 한 문신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손목을 찌르다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굳은살이 잔뜩 박 흰 손이 제 손목을 잡아챘을 때야 헤기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피가 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모르는 방이었다. 여관의 방 구조는 다 비슷비슷했으나 깔끔하기 그지없는 헤기의 방과 달리 지금의 방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옷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손목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서툰 솜씨로 붕대를 감아 놓은 것을 보니 의원의 솜씨는 아니었다. 아파. 손목을 부여잡고 몸을 숙이고 있자 방문이 꽝!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남자는 아프냐? 하며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가 쟁반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못 걷는 건 아니겠지? 그제야 헤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하자 남자가 애는 애답게 굴라며 헤기를 데려와 테이블 앞에 앉혔다. 고소한 죽 한 그릇이 앞에 놓이니 금세 배가 꼬르륵하며 소리를 냈고 귀까지 빨개진 헤기를 보며 남자가 안 쳐다볼 테니까 식기 전에 먹으라며 몸을 돌렸다. 수저를 들고 깨작깨작 죽을 떠먹던 헤기는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수습하여 나무통에 밀어 넣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내였다. 언뜻 에일을 닮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헤기는 죽 한 그릇을 해치우고도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은데 남자가 도통 가만있질 않았다. 다 먹었냐? 그럼 네 방에 가. 헤기를 힐끔 보던 남자가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기를 방문 앞에 내버리듯 질질 끌고 간 남자는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 죽지 말고. 무언가 쿵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머물던 마을에 용병단 대장이었다. 아침에 마주치자 대장 얼굴도 못 알아본다고 혼이 났으나 영 혼나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내내 웃고 있었다. 남자는 왜 자신이 자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물론 묻는다고 하더라도 대답해줄 만한 답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섭섭했다. 그새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남자는 강했고, 용맹했으며 의협심 또한 뛰어났다. 꼭 지쳐 뒤처지는 이를 부축했고, 다쳐 쓰러지는 이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날은 큰 건이 하나 있었다. 다치고 죽는 이 하나 없이 귀환한 이들을 보며 남자는 기분 좋다는 듯 곳곳에 술을 돌렸다. 용병단의 분위기는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남자는 헤기를 보며 어린애는 술 말고 주스나 마시라며 잔을 빼앗아 들었다. 주변에서는 헤기도 용병인데 어떠냐며 했지만 남자는 완고했다. 안 돼.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헤기 주변에 있던 이들이 넉살 좋게 말했다. 저래 봬도 널 아끼고 있어. 널 닮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거든. 죽었지만. 술에 취해 주절주절 내뱉은 말에 헤기는 고개를 주억였다. 딱히 무언 갈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죽은 남동생과 닮아서. 퍽 이해되는 사유였다. 헤기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곤 바람을 쐬러 문을 나섰다. 그때 손목이 붙잡혔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통증이 몰려왔고, 손목을 잡은 이는 헤기의 새된 비명소리를 듣고는 살짝 놓았다가 다시 잡고는 제 옆에 앉혔다. 미안해. 많이 놀랐어? 남자였다. 헤기는 손목을 몇 번 털더니 괜찮다고 말했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었다.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말했지만 헤기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침묵이 계속됐다. 용병단 안에서는 하나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침묵을 깬 건 남자였다. 몇 년 전쯤인가 등에 너와 똑같은 문신을 한 여자를 본 적이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오히려 놀란 것은 헤기였다. 손목에 문신은 꼭꼭 숨기고 다녔는데 언제 봤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를 괴물이라 말하며 나를 떠났지. 동쪽으로 갈 거라고 했어. 대륙을 건널 거라고. 그곳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너도 떠날 거잖냐. 남자의 말에 헤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떠났어야 했다. 진작 이곳을 떠났어야 했는데 당신이 주는 평화에 저도 모르게 남아 있고 싶노라고 대답할 뻔했다. 대신 헤기는 여자의 등은 어떻게 봤냐는 질문으로 화재를 돌렸다. 내일은 쉴 거니까. 너도 나오지 마라.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숙소로 돌아갔다.

  용병단이 쉬는 날이 어디 있겠는가. 모처럼 대장의 죽은 남동생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내려진 호사를 헤기는 마음껏 누렸다. 오후가 다 되어서 일어난 헤기는 아래에 내려와 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텅 빈 여관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텅 빈 게 아니었다. 다들 숨어서, 무언가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때 여관의 주인이 저벅저벅 다가와 헤기의 입을 막고 제 방으로 올려보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헤기의 눈빛에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방으로 겨우 올라간 헤기는 당장 짐을 싸라는 말에 어째서냐고 소리쳤다. 그러자 안주인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너를 위해서 말하는 거니까! 당장 짐 싸고 나가! 아니, 마을에서 떠나! 갑작스러운 호통에 헤기는 싫다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불안이 엄습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헤기는 간신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오열하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대장이 죽었다. 너 때문에. 그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린가. 단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대장이 죽었다니. 헤기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장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잖아요. 제가 듣기에도 한심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안주인은 헤기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찾아와 너를 아느냐고 물었어. 헤기는 손이 절로 떨렸다. 손목에 거미 문신을 한 검은 머리에 호박색 눈을 한 아이. 짐은 얼마 없었다. 대충 짐을 싸고 안주인이 내어준 뒷길로 걸음을 옮겼다. 대장은 모른다고 했어. 포상금이 1억 골드를 넘었는데도. 그리고 그들은 대장을 죽였어. 내부 고발자가 있었던 모양이야. 마을 바깥으로 이어진 샛길에 헤기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간신히 닦아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쾅!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헤기는 매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마을이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고 있었다, 금방 제가 지나온 샛길로도 불길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은 헤기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처참한 비명이 온 하늘을 찔렀다. 저 때문이었다. 진작 떠났어야 했는데, 아니면 죽기라도 해야 했는데. 또 잃었다. 갈피를 잡지 못한 헤기의 정신이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밭처럼 흔들거렸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뺨을 타고 뚝뚝 흐르던 눈물이 호수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던 헤기는 불현듯 지난밤 대장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와 같은 문신을 가진 여자가 동쪽에서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넜다고. 그곳에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제 저주를 풀지도 모른다. 배후를 알아내고 복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 하나 때문에.

 



  에일 너는 내게 지키기 위해 살라고 했지. 증오는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목표를 잃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잘못된 일일까.

 



  배를 타고 몇 달은 가야 일 년 내내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마을이 있다고 했다. 이곳의 한파만큼은 아니지만, 꽤 추울 거야. 선장의 말을 흘려들은 헤기는 저 멀리 보이는 선착장을 보고 물었다. 저곳에도 용병단이 있나요. 헤기의 물음에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용맹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이가 이끄는 용병단이 하나 있지. 기사보다도 더 대단한 이들이야. 남자는 묻지도 않은 것을 잘도 떠들어댔다. 곧 있으면 도착할 것 같으니 헤기에게 짐을 챙기라고 한 남자는 선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닻을 내려라! 콜헨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커다란 거미가 마을을 풍비박산 내는 모습이었다. ‘무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핑계였고, 헤기는 커다란 흰 거미를 보자마자 손목이 미친 듯이 쑤시는 것을 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극심한 통증에 눈앞이 흐려졌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저것을 당장 제 눈앞에서 치우길 바랐을 뿐이다. 환영검이 녀석의 머리를 가르고 허공에 사라졌다. 거미의 움직임은 멈췄고, 비로소 손목의 통증도 사라졌다. 그런데 영 개운하지 않았다. 아주 중요한 걸 놓친듯한, 그래 거미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거미에게로 가고 있었다. ‘헤기.’ 익숙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기어 나와 헤기를 옭아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러자 이번엔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반 토막 난 머리통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금빛이었다. 아름답고, 순수한. 아이가 고개를 들어 헤기를 바라봤다. 헤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보다 이내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그건 아이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미안해. 아제이스. 미안해. 너를 죽이려던 게 아니었어. 아제이스. 아제이스!!

 



  “야, 꼬맹아.”


  커다란 손이 헤기를 붙잡아 흔들었다. 아파. 헤기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헤기의 찡그린 표정을 보곤 조금 당황한 듯 손을 떼고는 수건을 건넸다. 땀 닦아. 헤기는 수건을 받아들고는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이건 그 언젠가의 재현이었다. 헤기는 남자의 등에서 많은 이들을 겹쳐봤다. 아파. 헤기가 손목을 붙잡고 끙끙 앓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벅저벅 다가온 남자는 수건을 들고 헤기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몸도 닦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 남자의 말에 헤기가 수건을 뺏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얼른 씻고 내려가 봐. 티이가 찾더라.”


  그게 누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다시 말했다.


  “네가 어제 구해준 무녀.”





'2D > 마영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크헤기 회고록 3  (0) 2017.04.15
허크헤기 Love me do  (0) 2017.04.08
허크헤기 회고록 1  (0) 2017.03.14
허크헤기 Don't touch me, Plz  (0) 2017.03.05
허크헤기 독  (0) 2017.03.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