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과 전혀 상관없는 잡담이지만
12월 히어로 온리전 나가는데...원고 어쩌죠?
걱정입니다...
꽃이 보고 싶어요.
발단은 사소했다. 허크는 다쳐서 시무룩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 헤기에게 선물을 사 오겠다고 했고, 헤기는 꽃이 보고 싶다고 했다. 들판에 널린 게 꽃이었고, 바로 여관에만 나가도 들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봄이나 여름일 때 얘기였고, 지금 콜헨은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곧 있으면 눈이 내리겠는걸. 얼마 전 마렉이 흐린 하늘을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렇지만 허크는 헤기에게 알겠다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대검을 고쳐 들었다. 너무 움직이지는 말고 푹 쉬어. 헤기는 그렇게 심한 부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허크는 고갤 저었다. 작은 부상도 쌓이면 독이 되고 내버려 두면 곪을 것이 분명했다. 허크는 헤기의 작은 상처마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허크의 손이 헤기의 머리 위를 스쳤다. 한 번 더 쓰다듬고 싶은데 이미 많은 접촉을 한 뒤였다. 허크의 시선이 헤기의 얼굴에 머물렀다. 허크는 책이라던가 연극을 즐겨보지 않았다. 당연히 노래도 몰랐다. 그래서 지금 이 감정을 뭐라고 해야 전해지는지 몰랐다. 허크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시선을 거뒀다. 방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지 않은데 안 갈 이유도 없었다.
“다녀오세요.”
헤기의 목소리에 허크는 대답하지 않고서 문을 나섰다.
대답을 해야 했나? 잘 다녀오겠다던가, 알겠다던가. 걱정하지 말라던가. 허크는 전투 내내 미처 헤기에게 대답해주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렇다고 실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에 다들 혀를 찼다. 헤기가 없어서 그렇구만. 누가 중얼거렸다. 허크는 헤기라는 이름만 듣고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기가 뭐? 허크가 묻자 남자가 흠칫 놀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싱겁긴. 허크는 후회와 원망 대신 헤기가 부탁한 꽃을 구해보기로 했다.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콜헨의 겨울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고, 척박한 마물의 땅에는 꽃은커녕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전투는 끝났고, 이제 복귀하는 일만 남았거늘 허크는 제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한 똥강아지마냥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다. 바위틈도, 가파른 절벽아래도, 무너져 내린 신전 아래에도 찾아봤지만 그 흔한 들꽃마저 없었다. 다들 왜 저래? 하는 얼굴로 허크를 바라봤지만 그런 시선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허크는 선착장에 도착해서야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배가 모자라 한 척은 모르반을 경유해 간다는 사실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허크 피곤할 테니 먼저 탈래? 누가 자리를 양보했지만 허크는 굳이 모르반으로 돌아가는 배를 고집했다. 그건 이틀은 늦게 콜헨에 도착해. 누가 말했지만 허크는 괜찮다고 했다. 모르반은 여름이 가장 길었고, 아직 따뜻한 날씨일 것이다. 잘하면 꽃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모르반은 트레저 헌터들이 드나드는 곳이니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다. 얼른 헤기에게 돌아가고 싶지만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모르반으로 가는 배가 넘실넘실 파도를 탔다.
다행히 모르반에서 꽃을 구할 수 있었다. 빨리 배에 다시 타라는 말에 허크는 알겠다며 꽃을 소중하게 들고 왔다. 화려한 꽃도, 향기로운 꽃도 많았지만 결국 허크가 선택한 꽃은 장미였다. 그 무엇보다 새빨간 장미. 허크 주위로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향이 퍼졌다. 다들 웬 꽃이냐고 물었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껏 허크가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주변을 살피고, 굳이 모르반을 경유하는 배를 탄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묻고 싶지도,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허크 역시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샀다.” 는 대답으로 일축했다. 배는 생각보다 빠르게 콜헨에 도착했다. 허크는 다행이라고 했다. 다들 허크 품에 있는 꽃만 아니었어도 그가 많이 피곤했구나하고 생각 했을 것이다. 허크는 가는 도중 꽃이 시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꺾인 꽃은 금방 시든다. 꽃집주인은 하루는 괜찮다고 했지만 콜헨의 바람은 차가웠고,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꽃은 시들다 못해 얼어붙을 것이다. 배에서 훌쩍 내려 빠른 걸음으로 마을에 들어갔다. 배가 도착했단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선착장으로 배웅을 나왔다.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다. 마렉이 말했다. 허크는 대충 흘려듣고는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 다들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왜 그래? 이번엔 허크가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데… 그때였다. 퍽! 누군가 와서 부딪쳤다.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품에 쏙 들어오는 크기와 익숙한 울음소리에 허크가 아이의 몸을 붙잡았다. 다행이 아이는 뒤로 밀려나지 않고서 허크의 품에 안착했다.
“헤기, 왜 울어?”
헤기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허크가 눈가를 문지르며 묻자 헤기가 히끅 울음을 삼키다, 다시 큰 소리로 울었다. “허크가…, 허크가……” 내가 뭘 잘못했던가. 헤기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주던 허크가 기억을 되짚었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혹시 내가 대답해주지 않은 게 그렇게 서러웠나.
“헤기…그만 울어.” 눈 밑이 빨갛게 부어서 더 울면 탈이 나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허크는 어쩔 수없이 꽃을 품안에 넣고는 헤기를 안아들었다. 마을 한가운데서 이러고 있는 것보단 방이 나을지도 모른다. 헤기의 울음이 서서히 멎어갔고, 방에 도착했을 땐 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헤기를 침대에 앉히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허크가 헤기의 눈을 마주보려 애썼다. 딱딱한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헤기가 곧 울음을 그쳤다. 그래도 목소리에는 여전히 물기가 가득했다.
“허크가…안와서 걱정 했어요…”
“왔잖아?”
“다들 어제 왔는데…허크만 없어서…”
아, 그제야 헤기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라도 다 있는데 헤기만 없다면 사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분명 설명을 해줬을 것이다. 처음엔 장난을 쳤어도 헤기가 울기 시작했다면 분명 장난이라고 말을 했을 것이고.
“다들…흑…허크가 죽었다고…”
“……”
“장난이란 거 알았는데…아는데…”
말을 했어도, 불안하고 서러웠겠지. 헤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허크는 헤기의 눈을 닦아주다가 황급히 품안에 있던 꽃을 꺼냈다. 꽃은 볼품없이 망가져 있었다. 로브와 갑옷 사이에 있기도 했고, 내내 헤기를 안고 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허크는 그래도 그 꽃을 헤기에게 내밀었다. 이게…뭐예요? 헤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꽃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헤기의 안색이 나빠졌다. 꽃, 보고 싶다고 했잖아. 허크의 말에 헤기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눈물을 멈추게 하려던 것이 역효과였다. 오히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헤기를 보며 허크가 당황해서는 가까이 다가갔다. 고작 꽃 때문에. 헤기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참을 달래고 안아준 후에야 헤기는 눈물을 그쳤다.
“마음에 안 들어?”
허크가 묻자 헤기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헤기는 허크가 들판에 핀 잡초를 뽑아 와도 기뻐할 아이였다. 허크가 마음써주고 있다는 것 자체를 기뻐했고, 지금도 못 구해왔다면 그걸로 좋았다. 허크가 제게 원하는 것을 물었을 때, 그 때. 그 순간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냐니, 너무 마음에 들었다. 헤기가 조심스레 허크의 손에서 꽃을 받아 들었다. 새빨간 장미보다 제 눈이 더 빨갛지 않냐는 말에 허크가 인상을 썼다. 썩 못마땅한 모양이다. 헤기는 꽃 속에 코를 파묻고는 향기를 맡았다. 향기롭고, 아름답고, 그 무엇보다 새빨간 장미. 저를 위해 하루나 늦는 배를 타고 모르반을 들려온 그.
허크는 표현에 서툴렀다. 연극이나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었고, 노래를 듣지도 않았다. 가끔 헤기가 연극이 보고 싶다고 하면 함께 로체스트에 가거나, 책을 읽고 나면 그중 한권을 집어 들어 읽은 게 다였다. 그래서 늘 헤기는 허크가 어떤 식으로 제게 사랑을 말할지 너무도 궁금했고, 허크는 티를 내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헤기를 아꼈다.
“마음에 들어?”
“너무요, 솔직히 말하자면……”
헤기가 말끝을 흐렸다. 허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헤기가 장미로 입가를 가렸다. 허크는 판결을 앞둔 죄인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지금 당장…허크에게…”
헤기는 이 꽃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투명한 꽃병에 물을 가득 채워 햇빛이 잘 드는 협탁 위에 올려놓고는 그 앞에서 책을 읽으며 콧노래를 부를지도 모른다. 헤기는 볕이 잘 드는 곳에서 책을 읽다가 곧잘 잠들곤 했다. 기분이 좋으면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버릇인지 본인은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알고서 부끄러워하기도 했고. 허크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평범한 일상. 하얀 와이셔츠와 검은 면바지를 입고, 그 아래엔 와이셔츠보다 더 하얀 발목이 선정적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
“키스…해주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리고 제가 준 꽃. 새빨간 장미가 헤기 옆을 지킬 것이다. 가시는 칼로 곱게 제거해서 헤기를 상처 입힐 일도 없었다. 그건 온전히 헤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 쓰일 것이다. 다만, 꺾인 꽃은 아무리 화병에 넣어놔도 오래가지 못한다. 헤기는 시들어 죽기 전에 꽃을 책 사이에 덮어 놓곤 했다. 이러면 오래가요. 나중에 책을 펴보면 그대로 예쁘게 말라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곤 했지. 그러고 싶었다. 내가 준 것. 네게 준 것. 모든 것들이 오래 가기를. 너와 함께 있기를.
허크는 왜 헤기에게 꽃을 선물해 주었는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달콤한 연인도 아니었고, 그저 같은 방 다른 침대를 쓰는, 어리다면 어리고, 컸다면 다 컸을 아이에게. 왜 하얀 발목이 선정적이라고 생각했을까. 헤기의 콧노래는 그 어느 연극보다 눈부셨고, 헤기가 읽은 책은 꼭 호기심이 들었다. 꽃은 들꽃도 있었고, 겨울에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꽃들도 있었다. 발견하지 못했다면 못한 대로 헤기는 괜찮아할 것이다. 착한 아이니까. 못 찾았어. 라고 한다면 헤기는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하고는 웃어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싫었다. 헤기에게 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네게 어울리는, 동시에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 허크는 새빨간 장미를 선택했다.
“해도 될까…”
내 서툰 사랑의 증표.
“키스…해도 될까.”
헤기가 입을 가리고 있던 꽃을 살며시 내려놨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입술이 꽃처럼 붉었다. 허크는 헤기가 꽃이라고 생각했다. 눈도, 뺨도, 입술도 온통 붉은색이었다.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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