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멸하여 하얗게 물들었던 머릿속에 서서히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깜빡이는 눈동자가 비추는 것은 새빨갛게 물든 손과 커프스도 목이 꿰뚫려 잔인하게 죽은 목사도 아니었다. 순간 해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줄기 빛과 함께 하얀 천을 뒤집어 쓴 아이의 눈은 숲을 닮아 있었다. 해리는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떨어트리고 벌벌 떨리는 다리를 애써 잡아 눌러 무릎을 꿇었다. 분노가 가라앉고 식어있던 무수한 감정들이 밀려 들어왔다. 무고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자신만 살아남아 받게 될 벌에 대한 공포심.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슬픔.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매장시켰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해리는 아직 어렸고,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이 없었다. 사실, 그 어떤 경험을 해도 이 일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어린 아이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울던 해리는 머리위로 느껴지는 작은 무게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아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 이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는 죄인이고, 이 아이는 나를 단죄할 심판자였다. 해리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하얀 천이 스륵 벗겨지자 햇빛을 받아 밝은 금발이 드러났다. 아이는 떨고 있었으나 울지도, 표정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해리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울었다. 타인의 피가 아이의 손을 물들이는 것도 잊은 채 엉엉 울던 해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옵고, 다만, 악에서…구하옵소서.
그리고 해리 하트는 사라졌다. 세상에서 완전히. 금발의 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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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해리는 멀리서 뛰어오는 아이를 양손으로 잡고선 안아 올렸다. 옷이 흙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제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이의 뺨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거 봐요!”
아이가 내민 초록색 풀은 분명 네잎클로버였다.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해리의 품에 안겨 뺨을 비볐다. 이제 저에게도 행운이 올까요? 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를 안고 교회 구석에 딸린 작은 집으로 들어간 해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스튜를 끓여놨으니 얼른 씻고 오세요.” 스튜요?! 하고 고래를 번쩍 들어 소리친 아이가 해리의 품에서 벗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던 해리가 조용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에그시. 조심히 다녀야죠.”
“네. 해리!”
다칠라. 그래도 여전히 요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해리는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는, 에그시는 자신의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뇌파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해리는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저 피 웅덩이 속에 아이의 부모나 형제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끔찍했다. 해리는 에그시를 안고 켄터키를 벗어났다. 그저 멀리 달아나야 한다는 사실밖에 인지하지 못했다. 자신이 발 담그고 있는 조직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막연한 두려움과 이제 다시는 킹스맨 요원으로서 활동하지 못 할 거라는 생각에 해리는 무작정 걸었다. 해킹을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이동 수단은 쓸 수 없었다. 나무는 숲에 숨겨 라는 말은 인간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든 자신을 찾을 것이고 벌을 내릴 것이다. 사실, 벌을 받는 것보다 에그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나의 아이. 나의 에그시. 몸을 숙여 그 발등에 입을 맞추면 그 눈빛이 내 교리가 되었고, 내 눈꺼풀에 그 붉은 입술이 닿았을 때 그것은 세례가 되었다. 해리에게 에그시는 종교이자, 유일한 맹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