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셒~
키리츠구가 죽었다.
빗소리가 텅 빈 도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된 시로는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인데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진 천장에 시로는 눈을 비볐다. 새빨갛게 부은 눈은 이제 따끔거리다 못해 아팠다. 그 아픈 통증마저도 슬펐다. 어째서. 시로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속이 텅 비었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원인도 알고 있었고, 그것은 평생 채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오는 커다란 공허는 그 구멍을 채우며 온몸을 잠식해갔다. 차라리 외로움도 공허도 느끼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한 것들, 저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새들이 우는 소리에 시로가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이었다. 비도 거의 다 그쳐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물론 남자는 빈말로도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없었으나 시로는 남자가 좋았다. 아름다웠다.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를 가져다 놓아도 남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아는 것도 많았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았다. 비록 하지는 않았지만. 시로는 아직 적은 삶을 살아왔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하고 있었다.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하나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홀연히 떠났다. 어디가도 눈에 띠는 외모였으나 후유키시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마냥, 시로는 그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썩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잡종 중의 잡종이로다. 뭘 그렇게 쳐다보느냐. 새끼잡종.”
시로는 저보다 훨씬 큰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쩍 벌렸다. 해를 등지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반짝반짝 거리는 금발과 제 뺨을 문지르는 하얗고 커다란 손은 그가 꽤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잡종이라고 자신을 부르며 뺨을 쓰다듬거나 꼬집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 웃긴지 몸이 흔들리도록 웃어재꼈다.
“폐허 속에서 핀 꽃 인줄 알았더니, 잡초일 줄이야.”
혀 차는 소리에 시로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으나 상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남자는 눈높이를 맞춰 몸을 숙였다. 바짝 다가온 얼굴에 빨간 눈동자가 번뜩였다.
“근데 무얼 그리 바리바리 들고 있느냐?”
남자가 시로의 품에 있던 종이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돌려달라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뿐히 한 손으로 막은 남자는 내부를 들여다 보고는 시익 미소 지었다.
“네놈. 요리는 할 줄 아느냐.”
“조, 조금....”
“뭐. 좋다. 빨리 네놈 집으로 안내 하거라.”
빨리. 남자가 엄하게 말하며 등을 떠밀었다. 안내하라는 말에 시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뗐다.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남자의 말이 언령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저절로 발이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으나 지금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말도 나오지 않았으니 시로는 남자가 키리츠구가 말한 마법사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으나 그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거실에 앉아 차를 내오라고 했고, TV를 틀었으며 잠시 후 나에게 뭐하냐는 듯이 물었다.
“손님이 오면 그에 걸 맞는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우지도 못한건가.”
결코 아니었다. 첫 번째로 당신은 손님이 아니야. 라고 하려 했으나 남자가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자 시로는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말이야 쉽지 시로는 아직 어렸다. 싱크대도 의자가 없으면 한참 커서 시로는 낑낑 거리며 채소와 고기를 손질해야 했다. 그것을 보다 못했는지 어느새 뒤로 다가온 남자가 칼을 빼앗아 들었다.
“잘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맹세코 그런 적이 없다. 시로가 무어라 반박하려고 하자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들고 손을 뻗었다. 등 뒤에서 나타난 길고 탄탄한 팔이 시로를 지탱했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가슴팍에 기댔으나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바짝 다가와 시로와 밀착했다. 하얗고 길죽한 손가락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남자는 익숙하게 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올렸다.
“위험하니까 조금 떨어져 있거라.”
고개를 쑥 내밀고 들여다보는 시로를 보고 남자가 살짝 웃었다. 기름이 튀는 게 걱정이었는지 커다란 손으로 시로의 얼굴을 가렸다. 남자는 시로에게 계란을 풀라고 시켰다. 시로는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믹싱볼에 계란을 풀었다. 남자는 냉장고에 남은 우유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것을 믹싱볼에 부었고, 시로가 쳐다보자 시익 웃으며 섞으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더 부드러워 지느니라. 술을 넣어도 좋지만 네놈에겐 우유가 더 좋을 것 같구나.”
어디서 찾았는지 네모난 팬을 들고 계란을 지지기 시작한 남자를 보고 시로의 입이 다물어 질줄 몰랐다. 나무젓가락으로 살살 끝을 들어 올려 다시 한 번 계란 물을 넣고, 그것을 반복하던 남자는 다 됐다며 제 머리색보다 한참 연한 계란말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먹기 좋게 썰었다. 그 사이 하얀 연기를 내뿜는 냄비를 보며 남자가 접시를 시로에게 주며 상을 차려 놓으라고 했다. 그래도 명색에 손님인데 이제 제가 하겠다는 시로에게 남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웃는 것 같기도 했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 어린 시로에게 남자의 표정을 읽는 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시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자가 손사레를 쳤다. 마지막으로 고기 조림이 상위에 올라오자 꽤 먹음직스러운 점심이 완성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시로의 인사와 함께 시작한 식사는 말소리 하나 없었다. 워낙 그러한 것에 익숙한 지라 시로는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식사가 끝내고 그릇을 치운 후 차를 내왔을 때에도 남자는 원래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인 것마냥 앉아 있었다. 물론 시로는 남자가 가든 가지 않던 별 상관이 없었다. 그저 키리츠구가 조금 더 늦게 들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남자는 차를 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잡종.”
“네, 네?”
“어설픈 존대는 집어 치워라. 편하게 말하도록.”
이름도 모르는데. 시로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집에 다른 잡종은 없느냐? 네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것 같은데?”
“아버지가....”
“네놈에게 부모도 있었나?”
남자가 목을 젖히고 집이 떠나가라 웃었다. 곱게 접힌 눈꺼풀 사이로 새빨간 눈과 마주치자 시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재미없는 것.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로는 고개를 들고서 남자가 하는 양을 보고만 있었다. 남자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시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점점 힘이 들어가자 그제야 시로가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아파! 시로의 소리를 듣고서야 남자가 손을 땠다.
“내일 다시 올 테니. 오늘 배운 것을 연습해 놓도록.”
그리고 남자는 거짓말처럼 점심시간이 되자 집에 찾아왔다. 시로는 남자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대신 남자가 먼저 시로에게 말을 걸었다.
“아침에 안보이던데 여태껏 자고 있었느냐?”
그 말은 즉 아침에도 왔다는 소리인데 시로는 바짝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옆으로 도망쳤지만 남자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의자에서 넘어질세라 어깨가 붙잡힌 시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침에는 도장에서 수련을 해....요.”
어색하게 이어진 문장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하고 물었다. 무슨 수련을 하느냐는 말에 시로는 그냥 기초체력..훈련. 남자가 미간을 짠뜩 찌푸렸다. 네놈 같이 어린잡종이 무슨 체력훈련을 한다고. 남자는 가끔, 아니 만난지 하루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였다. 자신 외에는 모든 것을 하찮게 말하면서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사실 점심이라기에도 이른 시간이라 시로는 시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저...형은 일 안해요?”
시로의 ‘형’이란 호칭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흐음, 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시로를 내려다봤다. 새빨간 눈동자가 마치 보석을 박아 놓은 듯 반짝거렸다.
“왕 노릇도 하려니 지치더구나.”
역시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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