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셒~
최근 고민이 생겼다.
마트에서 돼지고기와 닭고기 사이에서 갈등하던 시로는 둘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쉰 뒤 닭고기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집에 오븐이 가던가. 안 쓴지 오래된 것 같은데. 야채코너에서 샐러리와 양상추를 집어든 시로가 당근 앞에서 망설였다. 분명 저번에 요리하고 남은 게 있을 것 같은데. 잠깐 고민하던 시로는 당근마저 장바구니 앞에 담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입맛마저 깐깐한 집의 한 동거인 때문에 장을 보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리니 한숨만 나왔다. 게다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야. 시로는 계산대 앞에서 종이봉투를 펼 쳐 식재료를 차곡차곡 담은 다음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안정의 다섯 시. 집에 가서 요리를 시작하면 충분히 일곱 시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녀왔어.”
처음부터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기에 시로는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내려두곤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여름의 태양은 길었기에 아직도 밖은 밝았고, 시로가 돌아온 시간도 평소보다 빨랐으나 거실에 태평하게 누워있던 동거인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시로를 한번 팩 돌아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그 시선에 익숙해진 시로는 그를 무시하곤 냉장고를 열었다. 아, 냉장고에는 아직 당근이 반 토막이나 남아 있잖아. 남은 것을 꺼내고 새로 사온 당근을 야채실에 채워 넣은 시로가 나머지 재료도 정리하곤 쌀을 씻었다. 내일은 주말인 것을 감안해 꽤 많은 양을 씻었더니 어느새 다가온 길가메쉬가 시로를 보지도 않고서 핀잔을 늘어놓았다.
“하루 종일 하얀 쌀밥만 먹을 샘이냐?”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많은 양의 밥을 하는지 아느냐고, 내가 뭣 때문에 식재료 코너에서 돼지고기랑 닭고기 사이를 방황했는지 아느냐고 당장에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알 턱이 없는 상대를 배려해 시로는 무시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특히 길가메쉬에게는 더더욱.
“재료는 항상 최고급만 사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번에는 재료를 가지고 잔소리를 해왔다. 처음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조금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짜증이 났었고, 세 번째에는 돈을 줄 것도 아니면서 요구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코앞에 내밀어진 골드카드는 진짜여서 시로는 침만 꿀꺽 삼켰다. 받지 않으려고 한 것을 지금 짐에게 싸구려를 먹이겠다는 것이냐? 며 눈을 부릎뜨길래 받기는 했지만 말이지. 사실 마트나 골목시장에서 사는 재료들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최고급이라고 쓰여 진 걸 사와서 요리를 해도 잔소리. 눈에 봐서 좋은걸 사와도 잔소리. 어떻게 해도 잔소리밖에 하지 않는 길가메쉬를 보며 사실 반쯤은 포기했다. 그렇다고 지가 안 먹을 것도 아니고, 밥을 해주면 꼬박꼬박 앞에 앉는걸.
생각해보니 그것도 이상했다. 지가 사람이야 뭐야, 왜 매번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해? 라는 말에 네놈 마력이 짐을 따라오지 못해서다. 라는 대답만 들었으니 시로는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긴 있는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발언에는 더더욱 그랬다.
손에서 쌀들이 마찰해 뽀도독 소리를 냈다. 둘의 침묵 사이에 어느새 예열을 끝낸 오븐이 땡! 하며 소리를 냈다. 시로는 축축하게 젖은 손을 대충 털어내곤 냉장고를 가리키며 말했다.
“냉장고에 닭 재워둔 것 좀 꺼내서 오븐에 돌려줄래?”
꿈쩍도 안하고 내려다보는 시선에 “길가메쉬 부탁해.” 라고 말하니 그제야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고 해서, 여차 하면 입에 넣어 달라 할 기세였다. 익숙하게 온도를 올리고, 시간을 조절한 길가메쉬가 됐느냐? 하며 뚱하게 물었다.
“응. 고마워.”
시로는 쌀을 안치고, 앞치마에 대충 손을 닦은 후 샐러리와 당근은 채 썰었다. 드레싱은 전에 사 놓은걸 쓰면 되고, 당근은 살짝 데쳐서 양배추로 장식한 그릇위에 올렸다. 그세 국이 끓었는지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두부와 감자를 넣은 된장국의 간을 살짝 보고 뚜껑을 닫은 시로가 아직 멀었냐고 타박하는 길가메쉬를 옆으로 밀고 손을 씻었다.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 준비를 한 것이지만 시로는 딱히 길가메쉬에게 별 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물론 맛있다거나 잘 먹었다거나 한마디만 해준다면 기쁘겠지만,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로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반찬투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오늘도 식사가 끝나자마자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길가메쉬를 보고 시로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애초에 동거할 생각조차 없었던 시로는 뻔뻔하게 제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길가메쉬를 보고 헛기침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주절주절 말이 많던 그도 상을 두고 앉은 자리에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시로는 차라리 그가 적이었다면 할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다. 비록 비아냥이긴 해도. 그러나 시로의 노력이 무참하게도 길가메쉬는 식사시간이 아니면 제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서 어색할 틈도 없었고, 친해질 틈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시로는 꽉 닫혀 틈하나 보이지 않는 길가메쉬의 방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길가메쉬는 밥먹는데 잔소리만 하지 않으면 별 탈없는 동거인은 맞았다. 돈도 주겠다. 못할건 뭐 있냐. 시로는 그런 생각으로 기합을 넣었으나 금세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등줄시로 소름이 돋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