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크x헤기
마영전 시즌1,2 네타 있습니다
ㅇㅇ
전투 중에 상처를 입었다. 그다지 깊은 상처가 아니라 자각하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아마도 늘 옆에 붙어 상처를 치료해주는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제가 다 치료해줄 수는 없어요! 하고 잔소리를 하다가도 땀을 흘려가며 제 상처를 돌보는 녀석 덕분에 허크는 다른 때 보다 전투에 신중을 가했다. 헤기가 곁에 없으니 바로 이 꼴이라니. 허크는 상처를 대충 지혈한 후 동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별거 아니니까. 괜찮을거야. 아직 돌아가려면 몇밤을 더 보내야 하고, 그때쯤이면 상처도 아물어서. 잊어버리겠지.
"허크 다쳤네요?"
잊어버렸다. 허크는 제 상처를 쓸어보는 헤기를 보고서 그때의 일을 기억해냈다. 작살에 스쳐서. 이제는 피도, 염증도 남지 않은 상처를 쓸어보던 헤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차, 허크 저 역시 그만 입을 다물었다.
모르반의 생활은 순조로웠다. 일은 트레저헌터에서 가끔 맡아오는데 용병단 일을 할 때보다 훨씬 쉬웠고 보수도 좋았으며, 쉬는 날도 많았다. 즉, 헤기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단 소리다. 헤기는 헌터일 대신 마을에 남았다. 아직 여독이 가시지도 않았고 헤기에게 헌터 일은 너무 위험하다는 허크의 판단 때문이었다. 헤기는…,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허크는 그에 응해주지 않았다. 내 말 듣기로 했잖아. 모르반으로 도망쳐 오기전에 헤기와 했던 약속이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말을 들어주기. 헤기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집안이 조용해질지도 모른다.
이곳에 머물 거라면 그 마을의 규칙을 따라야 할 터였고, 허크는 그런 것에 익숙했다. 같이 헌터 일을 하겠다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 이라. 허크는 제 말에 주먹을 꽉 쥐다가, 입술을 말아 깨물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는 헤기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널 잃고 싶지 않아.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안 봐도 뻔했으나 허크에겐 그것이 헤기의 목숨보다 중요치 않았다. "허크가…계속 옆에 있어주면 되잖아요." 헤기는 그렇게 말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고, 그러고 있었지만 일이 늘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허크는 헤기가 최대한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곁에 있는 다고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렇다면 모두를 그렇게 잃지는 않았겠지. 허크의 말에 헤기는 빨갛게 부은 눈으로 허크를 바라보다가, 툭 눈물을 떨궜다.
"강해지면 되잖아요. 저도 강해질게요. 그래서 언젠가는… 허크와 등을 맞대고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될래."
"……그래."
허크는 헤기를 안아주는 것으로 싸움은 끝나는 듯했다.
"역시 저도 헌터를…"
"헤기."
"…그렇지만…허크 맨날 상처를 만들고 오잖아요…제가 바로 옆에 있었다면……"
헤기의 치유술은 이미 아문 상처에는 소용이 없었다. 그랬다면 제 몸이 말끔하게 고쳐졌겠지. 허크는 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만이라도 고마워." 허크는 제가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그래서 아프게 되더라도… 헤기를 위험한 곳에 보낼 순 없었다. 이기심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저는 원래 이런 남자였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필요에 의해서라면 살인도 마다치 않았다.
-
요즘 신나 보이네. 허크가 마을로 뛰어가는 헤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법약을 만들던 엘라한이 말했다.
"밀레드와 친해진 것 같더군."
"밀레드?"
"마을의 여관꼬마."
허크는 씹고 있던 담배를 대충 꺼버리곤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본 엘라한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어떤 꼬만지 확인해봐야겠어. 그런 허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엘라한이 말했다. "헤기 또래의 꼬마야. 연상의 누나를 좋아하는. 약 다 됐으니까 들고 가, 300골드." 허크는 골드 주머니를 던져주고는 약을 받아갔다. 그리고 너희 밤마다 너무 시끄러워. 엘라한의 말에 허크는 머쓱해서 머리를 벅벅 긁다가 헤기를 뒤따라 마을로 향했다. 모르반에 온 지는 꽤 되었으나 마을에 간 것은 손에 꼽았다. 그도 그럴것이 한동안은 집을 보수하고 헌터 일을 한다고 바빴으니까. 헤기는 늘 마을에서 장을 봐오니 꽤 친해진 것 같지만. 커다란 바위틈을 지나 들어간 마을은 소박했다. 마을에 표지판도 없고, 입구도 따로 없었다. 가운데 커다란 단상이 있긴 했다. 헤기는 그 위에 앉아있었다. 어떤 꼬마와 함께. 허크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재잘재잘 떠들던 헤기는 밀레드가 툭툭 치고선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을 때야 허크를 발견했다. 허크는 느긋한 걸음으로 헤기의 밑에 섰다. 돌아가야지. 헤기는 벌써요? 하고 물었다. 오늘 밤에 난 나가봐야 해서. 헤기가 싫은 표정을 지었다. 허크 어제 돌아온 거 알아요? 허크는 미안하다며 헤기에게 손을 뻗었다. 다리를 툭툭 건드리자 헤기가 조금 고민하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읏차. 소리를 내자 헤기가 무거워요? 하고 물었다. 그럴리가. 가는 김에 장이라도 볼까. 헤기는 밀레드에게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로라의 잡화점을 들렸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꼬마는 누구야?"
"밀레드요?"
"나이는?"
"저랑 같아요!"
"좋은 친구가 생겼네."
"…질투하지 말아요…"
"친구한테도 질투를 하나?"
허크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헤기가 허크의 미간을 꾹 누르며 말했다.
"이번에는 언제 돌아와요?"
헤기가 허크의 팔뚝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상처가 있던 자리다. 허크는 상처를 만지던 헤기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두 밤만 자고 돌아올게. 헤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거짓말, 사막의 시간으로 두 밤이잖아요? 허크의 입장에선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어린 연인의 불만 섞인 애교에 시익 웃고는 말했다.
"좋은 친구 사귀었잖아?"
"거봐 질투하잖아!"
붙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가까이 다가온 허크가 헤기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곤 고개를 숙였다.
"잘 자."
"…다치지 말구요."
입술에서 단맛이 났다.
모르반에서의 생활은 순조로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헤기 또래의 아이는 헤기의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바로 근처에 사는 마법사는 능력이 뛰어났다. 바다는 풍요로워 먹을 것이 넘쳐났고, 낮에는 황금빛 모래사장을, 밤에는 은하수를 만들었다. 달이 높게 뜨는 날에는 헤기를 생각했다. 평화로웠다. 마족도 의뢰가 아니면 볼 일이 없었으니까. 에린을 이야기 하는 사람도 없었고, 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다. 법황청에 쫓기는 일도 없었고, 과거의 기억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적응되지 않았지만 점점 그 평화로움에 젖어 들어갔다. 용병단, 콜헨, 기사단 그 모든 것을 잊고 계속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다. 헤기, 너와 함께.
"헤기가 초승달 섬으로 갔다는 게 무슨 말이야."
허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엘라한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이제 막 의뢰를 완수하고 집으로 돌아온 허크를 반겨주는 건 제 연인이 아닌 싸늘한 침대였다. 헤기를 찾으러 온 집안을 다 뒤졌다. 저랑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지, 빨래통을 거꾸로 뒤집고 나서야 허크는 헤기의 마법서와 로브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엘라한에게 도움을 청한다고 했으니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허크는 뒤집어쓴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서 엘라한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그는 깨어있었고, 헤기를 찾자 그가 말했다. "아직도 안 돌아왔나?" 허크는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아직도, 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을. 허나 엘라한이 헤기의 뒷 꽁무니만 쫓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아까 밀레드와 초승달 섬을 간다고 했는데. 트레저헌터에 의뢰를 받아서…, 그길로 길드에 쳐들어가자 아히르가 당황한 듯 허크를 바라봤고, 트리스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허크의 손을 떨쳐냈다. 내가 헤기에게 의뢰를 줬다고? 그럴리가. 자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헤기에게는 의뢰를 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트리스탄의 말이 맞았다. 처음 길드에 들어왔을 때 조건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헤기에 관한 거였다. 트리스탄은 헤기의 능력을 듣고는 아쉽다는 듯 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바에는 한마리라도 잡는 게 나았다. 게다가 밀레드나 헤기같이 아직 어린 녀석들에게는 의뢰를 시키지 않는다고…… 허크가 아히르를 돌아봤다.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숨을 곳을 찾는 게 눈에 거슬렸다. 그건 에실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녀는 허크의 시선을 따라 아히르를 쳐다봤다. 설마, 아히르. 너ㅡ, 허크가 벌떡 일어나자 그가 트리스탄의 뒤에 숨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저번에도 헤기 잘 다녀왔다고!!
"…저번에도?"
"그, 그래! 헤기에게 의뢰한 건 아니었어. 밀레드에게 했지."
"아히르!"
"그런데 밀레드가 말하더라고 헤기가 엄청 강하다고, 초승달 섬의 생명체들은 기이하게 거대한 거 알 거야. 헤기가 혼자 다 처치했다고 했어."
"그게 언제쯤이지?"
"…너희들이 여기 오고 나서 며칠 안 됐을 거야."
모르반에 처음 도착한 후 허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집을 구해놓고 장기의뢰를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보수가 워낙 세다보니, 빨리 헤기를 편하게 해주고도 싶었고. 허크는 아히르가 헤기에게 의뢰를 했다는 것보다 지금껏 헤기가 저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초승달섬은 아직 허크가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허크가 딱 싫어하는 지형이었다. 덥고,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곳이었다.
헤기를 발견한건 선착장에서였다. 헤기는 허크를 보고선 어쩔 줄 몰라 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들키지 말아야 할 걸 들켰다는 얼굴이었다. 허크는 심기가 뒤틀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는 헤기의 앞에 섰다. 헤기는 잘 입지도 않던 옷을 꺼내 입고 있었다. 그 옷은, 카단과 싸우고 나서 찢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뺨에 상처가 있다. 허크가 손을 뻗자 헤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아 파? 허크가 뺨을 쓸어내리자 그제야 상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헤기가 상처를 치유했다.
"헤기."
"…그, 허크…"
"다른데는 다치지 않았고?"
"……네……"
"그럼 됐어. 돌아가자."
폭풍 전야 같았다. 앞서가는 허크의 등을 빤히 쳐다보던 헤기가 뒤를 따랐다. "헤기."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밀레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헤기를 바라봤다. 괜찮은거야? 밀레드의 물음에 헤기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도 그럴게 저 남자, 밀레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함이 들렸다. 헤기!!! 허크의 부름에 헤기는 밀레드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달려갔다.
집에 돌아가자 깨끗한 옷과 수건을 받아들고 욕실로 밀려 들어갔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긴장이 풀렸다. 허크…화 많이 났을까. 머리카락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위험한 일을 하는 걸 반대했으니까. 하지만 초승달 섬은 허크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괴상한 부족들과 거대한 벌들이 나왔을 뿐 콜헨에 있을 때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었다. 콜헨, 이라. 헤기는 제 손등을 바라봤다. 이제는 어떤 문양이었는지, 어떤 의미였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낙인이 있었다. 에일,. 헤기의 인생에 있어서 에일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지금 여기서 웃고 떠들어도 되는 걸까. 에일은 행복해지라고 말했지만. 다 잊고. 다 떨쳐버리라고 했지만. 헤기는 반쯤 얼굴을 물에 담갔다가 일어났다. 어느새 물이 차게 식어있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허크가 떠넘겨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고소한 냄새가 났다. 허크는 어디서 씻고 나왔는지 말끔한 모양새였다. 옷도 갈아입고 있었고. 오래 걸렸네. 허크가 의자를 당겨주며 물었다. 헤기는 자연스레 앞에 앉고는 수저를 들었다. 생각할게 많아서…… 허크는 묻지 않았지만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부드러운 빵을 찢어 삼키고 따뜻한 수프가 허기를 잠재우자 피로가 몰려왔다. 달이 바다 위로 둥둥 떠다녔다. 졸음이 몰려왔으나 허크의 뒷모습을 보자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식기를 치우고 헤기를 안아든 허크가 침실로 들어갔다. 다정한, 평소대로의 허크였다.
방금까진.
반쯤 감긴 눈이 저절로 떠졌다. 헤기의 발목을 움켜쥔 허크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뭐해요? 헤기가 살짝 발을 빼려고 하자 허크가 꾹 누르더니 헤기의 몸을 가볍게 뒤집었다. 매끈한 종아리를 타고 내려와 발바닥과 이어지는 얇은 근육을 매만졌다. 탄력있고, 튼튼한 근육이었다. 허크는 단검을 칼집에서 빼낸 후 수건을 준비했다. 허크… 헤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만히 있어. 내가 실수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어.”
“허크!!”
“한쪽만 자를 거야. 나 없어도 일단 걸어는 다녀야 하지 않겠어. 대신 위험한 짓은 다신 못하게…”
퍽! 남은 한쪽 발이 허크의 턱에 부딪혔다. 그 틈을 타 발목을 빼내고 바로 누운 헤기가 침대머리에 바싹 붙었다. 허크, 오늘 좀 이상해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달빛 하나에 의지한 채 허크의 표정을 살피던 헤기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초승달 섬에 가서 그래요? 거긴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라…”
“위험하지 않은게 문제가 아니야!”
“…허크.”
“헤기……, 나는… 제발…”
허크가 이마를 그러쥐었다.
“허크……모르반에 오고 나서부터 이상했어요. 콜헨에 있을 땐 걱정하긴 했어도 제가 전투에 나가는 걸 막진 않았어요. 허크 마음대로 절 조종하려 들지 않았는데…”
잉켈스와의 전투에서도, 마수를 만나러 갔을 때도, 드래곤과 맞붙었을 때도 카단과 대립했을 때도 그랬다. 허크는 옆에서 도와주긴 했으나 전투를 말리진 않았다. 모든 게 끝났을 때 저를 모르반으로 데려온 것도 허크였다. 모르반은 좋은 곳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 소금냄새가 나는 바닷가. 저와 같은 또래의 친구도 있었고 여관 주인도 친절했다. 음식들도 혀를 자극했고, 삭막한 콜헨과는 비교가 됐다. 게다가 그 누구도 여신에 대하여, 에린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적응되지 않았지만 점점 그 평화로움에 젖어 들어갔다. 용병단, 콜헨, 기사단 그 모든 것을 잊고 계속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었다. 허크 당신과 함께. 그러지 못한다는 걸 가장 잘 알면서도 헛된 소망을 꿈꿨다.
날이 가면 갈수록 악몽이 심해졌다. 허크가 없는 날이면 더 했다. 혼자 지새는 밤은 끔찍했다. 모두가 손가락질했다. 도망쳤다고 비난했다. 네가 다시 시작했다면 엘리스가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네가 막았다면 드윈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불쌍한 기사들! 불쌍한 무녀들! 너 하나만 희생한다면. 저 하나만 희생해본다면.
“헤기……”
“우리 역시…그냥 콜헨에 돌아갈까요?”
“……그건 안 돼.”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그래서 운명을 바꾸면…”
“바뀌지 않아…”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허크는 늘 그랬다. 해보기도 전에 포기했지. 엘리스를 구할 수 없을 거라고 했고, 드윈이 죽을 거라고 했다. 나서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후회한 게 몇 번째던가. 알고 있다면 미리 알려주면 좋잖아. 그 말에 허크는 알아도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신, 꼭.
“헤기. 알잖아.”
이미 시간을 되돌아온 사람처럼 굴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허크는 꼭 미래를 아는 사람처럼 굴었으니까. 하지만 말이 되지 않잖아. 당신이 이 공간 속에서 미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면 그 너머에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 설마 세계가 모두 시간을 되풀이 했다는 미친 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야 저 강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걸까.
알면서 모른 척 했다. 저는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혹시나, 싶었다. 되돌리고 싶었다. 당신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구해낸다면. 당신 역시 구원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나는 네가 다시…내가 모르는 사이 영웅의 길에 들어서 버릴까 봐.”
“…….”
“그래서 내가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갈까 봐. 그게… 무서운 거야.”
바로 앞까지 다가온 허크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허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헤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랬기에 안아줄 수 있었으리라. 칼이 툭 떨어졌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크가 무서워하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헤기는, 제 부재가 허크에게 공포로 인식될 거란 생각자체를 하지 않았다. 같은 처지니까, 연민 때문에, 동정 때문에 저에게 잘해주는 것이라고.
“널 어떻게 붙잡아 둬야 할지 모르겠어.”
착각을 했어.
“허크 우리 그냥…”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밤을 함께 지새우는 것이 단순히 연민이라고,
“다 잊고…”
잊을 수 있을까. 헤기는 잊자고 하면서도 여전히 콜헨을 생각한다. 차가운 바람과 짐승의 울음소리.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
허크는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일까. 어떻게 허크의 외로움을 달래야 할까. 어쩌면 이미 허크는, 영웅의 길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니었을까. 수많은 추측 위로 허크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있어. 헤기.”
“……”
“다 잊고……여기서 살자.”
허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 잊을 순 없었다. 허크는 고아라는 것만 빼면 살아오면서 커다란 굴곡 없이 살아왔다. 인생 자체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크게 비극적인 일도 없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진. 잃고 싶지 않았다.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 참상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이번엔 헤기가 죽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헤기가 그들 대신 죽을 수도 있었다. 공백이 생기면 채워 넣어야 하고, 균열이 생기면 메꿔 넣어야 하듯이. 그들이 살면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 만약 그게 헤기가 된다면.
“그래요…저도 사랑해요.”
달이 기울어졌다. 그들의 방에는 빛 하나 들지 않았다. 온전한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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