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키타구구au
카이벨라 나옵니다.
2017.07.21 11:39 수정, 대사추가, 브금 추가
07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몇 번이고 이러면 안 되는데 참았어야 했는데 생각했다. 그런데, 허크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헤기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목에는 밧줄로 잔뜩 쓸려 퉁퉁 부어있었고 눈물은 강을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허크가 저벅저벅 다가가자 헤기의 어깨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허크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헤기의 턱을 들어 올렸다. 허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상처가 아물었다. 허크는 그 상처를 먹었다. 하나하나 너무 맛있고, 달았기에 그 자리에서 헤기를 먹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먹지 않았다. 만약 지금 널 먹어버린다면 오늘 죽인 수백의 인간들은 무엇 때문에 희생당했단 말인가. 너 때문이다. 헤기 네가 너무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거다. 허크는 그리 말하려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헤기가 가슴을 헐떡거리며 숨을 토해냈다. 많이 놀란 건지 배를 부여잡고 몸을 둥글게만 헤기가 헛구역질을 했다. 허크는 근처에 있던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렸다. 마셔. 제 말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헤기를 보고선 허크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헤기의 턱을 붙잡고 벌렸다. 찬물을 들이붓자 헤기가 허크의 손목을 붙잡고 발버둥 쳤다. “컥, 헉…” 흥건하게 젖은 헤기가 한기로 몸을 떨었다. 물통을 옆으로 던진 허크가 손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헤기는 허크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허크의 한숨이 길게 늘어졌고, 그의 그림자가 헤기를 덮었다. 마을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시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헤기."
허크의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워서 헤기는 그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 아니지. 헤기는 그의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무서워?"
허크가 잠깐 자리를 비웠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고, 먹을 거는 창고에 있으니 굶지 말라며 머리를 한껏 쓰다듬던 그였다. 결계를 쳐놨으니 마물이 들어오지는 못할 거야. 인간은…겁이 있다면 못 들어오겠지. 허크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헤기에게서 얌전히 있겠다는 대답을 듣고선 걸음을 옮겼다. 허크가 옆을 비운 건 처음이어서 헤기는 마음껏 책을 읽었다. 평소에는 허크가 심심하다며 방해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헤기는 한참이나 책을 읽다가 허기가 지자 읽던 책을 덮어두고 방을 옮겼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거대했던 저택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단 둘밖에 살지 않았다. 자연스레 안 쓰는 방은 먼지가 내려앉았고, 사람이 쓸 만한 방은 몇 개 없었다. 침실과 욕실, 만찬장, 테라스, 홀 정도만 쓸 수 있었다. 허크가 지하실을 따로 쓰긴 했는데 헤기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고, 궁금해 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식료품 창고는 제 방과 정 반대편에 있었다. 커다란 홀을 지나가야 하는데 헤기는 그곳이 싫었다. 가운데 커다란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 중간에는 초상화가 있었다. 반쯤 찢어진 초상화였는데 남은 반쪽짜리 얼굴이 저와 똑 닮아있어서 기분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헤기는 그 초상화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등 뒤에서 들어오는 빛에 고개를 돌렸다. 허크가 벌써 돌아왔나? 아직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마물은 지금 없는 것 같습니다.’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헤기를 안아 들었다. ‘이제 괜찮단다. 저분이 널 지켜줄 거야.’ ‘네?’ ‘마물에게 붙잡혀서…무서웠지.’ 남자는 헤기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헤기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젊은 여자는 가슴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고서 몸을 숙여 헤기를 바라봤다. ‘헤기 케르 맞지?’ ‘…몰라요.’ ‘맞아. 황금빛 눈동자에 손등에 거미문신. 데려가자.’ 여자의 말을 들은 남자가 헤기를 안고서 걸음을 옮겼다. 헤기는 멀어지는 초상화를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싫어! 놔줘요!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물이 무서운 거니?’
“내가 무섭니?”
헤기가 고개를 들었다.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난 네 부모를 잡아먹었어, 언젠가 너도 잡아먹을 거야.”
허크는 식인을 하는 마물이었다. 언제부터 사람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제일 손쉽게 사냥할 수 있었고, 수도 많았다. 물론 맛도 괜찮았다. 여흥으로 죽이기도 했다. 그들은 재밌었고, 허크는 사냥을 즐겼다. 약한 인간이던, 강한 인간이든 상관없었다. 허크에겐 그 어떤 인간도 너무나 약한 존재였다.
“내가 무서워?”
허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놔주세요! 전 돌아가야 해요!’ 헤기가 발버둥을 치자 여자가 헤기를 달랬다. 넌 지금 마물에게 현혹당해 있는 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그리고 널 가지고 논 마물은 네 부모를 죽였다.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그러나 헤기가 부모를 잃은 건 이제 막 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러나 허크와는 근 십 년을 함께 했다. 어쩌면 앞으로 구십 년은 더 함께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무섭지 않냐고, 증오스럽지 않냐고, 물론 그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나약한 동물에 불과했다. 허크가 저에게 잘해줄수록, 다정할수록, 저를 먹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헤기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꼈다. 멍청하게도, 어리석게도 그랬다.
성에서 벗어나 마을까지 끌려간 헤기는 저를 알아보는 상인의 집에서 지내게 됐다. 밤에 몰래 도망치려고도 해봤는데 금세 붙잡혔다. 그들은 저를 보곤 혀를 찼다.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마물을 하루빨리 죽여야 한다고 했다. 헤기는 허크가 죽는 상상을 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십, 수백 번 그들이 속삭였다. 그는 죽어야 한단다! 네 부모를 죽이고, 결국 너까지 죽일 것이다! 헤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는 제 가족인데요. 그들은 그래선 안 된다고 했다. 네 부모를 죽이고! 너도 죽일 거니까! 그게 이유였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이 불탔다. 저를 구하러 왔다던 주술사는 목숨을 구걸하다 죽었고, 마을 사람들은 불에 타 죽었다. 처음에는 헤기의 부탁으로 마을에는 손대지 않으려고 했다. 헤기가 좋아한 마을이니까. 그런데, 헤기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뒤로 홱 끌려간 헤기가 목에 걸린 밧줄을 쥐며 끙끙 거렸다. 저를 안고 왔던 남자였다. 그는 벌벌 떨면서 헤기를 인질로 잡았다며 허크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어리석은 자의 말로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헤기는 허크의 손에 찢겨나가는 인간들을 보며 귀를 틀어막고 몸을 숙였다. 한 마을이 불타 사라지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헤기는 사람이 불타는 소리를 듣고서 엉엉 울었다. 목에 밧줄 역시 불타 사라졌다. 불꽃은 오직 헤기만 태우지 않았다.
“저는…허크가……”
그런데. 수십 수백의 인간을 죽인 건 당신이면서. 그러면서, 고작 저 하나 때문에 마을을 불태운 건 당신이면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는 거잖아.
“무서워요…”
당연한 일이다. 헤기는 인간의 아이였다. 마물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10년 이상 함께한 것이 마물이어도 그렇다. 하물며 허크는 인간을 먹고 살해하는 마물이었다. 무섭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부모를 죽이기도 했고, 언젠가 저를 죽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마을을 모두 불태웠다. 얼마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던 상인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유는 고작 나 때문이었다. 헤기를 숨겼으니까. 헤기를 데려갔으니까. 허크에게 큰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서워도 어쩔 수 없어.”
“……”
“거처를 옮기자. 다음은 사람들이랑 멀리 떨어진 곳이 좋겠어.”
허크가 헤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짐짝처럼 어깨에 들쳐 메고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허크의 화가 사그라지는 것처럼. 헤기는 허크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며 울었다.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허크가 살인을 했다. 자기 때문에. 여흥도 아니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슬펐다. 이건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일까. 그럼 대체 무엇이 슬픈 것이지. 사람들이 죽은 것? 허크가 살인을 한 것? 아니었다. 알지 못했다. 헤기는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08
아주 깊은 숲속에 집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은 꼭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헤기는 거기서 며칠을 앓아누웠다. 인기척이라곤 없는 숲속이었다. 가끔 동물 소리가 들렸지만, 집 가까이는 오지 않았다. 허크는 종일 헤기 옆에 붙어 간호했다. 허크 걸음으로 마을은 한달음에 갈 수 있겠지. 헤기는 허크가 끓인 죽을 먹고는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허크는 예전처럼 집에 자주 있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또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헤기가 집을 나가는 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자신이 있다는 건가. 집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나왔건만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기에 금세 포기했다. 매일매일 조금씩 더 멀리 나오고 있었지만 울창한 숲에는 나무만 빽빽하게 들어서 있을 뿐 사람은커녕 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헤기는 겨우 도착한 개울가에서 얼굴을 씻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허크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슬슬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돌아갈 길이 천 리인데, 허크를 부를까. 아니면 기다릴까. 밤이 늦으면 찾으러 오겠지. 헤기는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사람…”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었다. 붉은 입술이 헤기를 보더니 천천히 열리고, 그리고…
“허크 안 돼요!”
커다란 그림자가 헤기 앞을 막아섰다. 헤기에게 손을 뻗으려던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바지춤에서 칼을 뽑았다. 제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등을 헤기가 붙잡았다. 안 돼요, 그 사람은 아무 짓도 안 했어요. 헤기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허크를 꽉 붙잡은 손이 얼마나 필사적인지 손등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헤기 눈 감아.”
“허크!”
허크의 커다란 손이 헤기의 얼굴을 가렸다. 허크는 그녀를 죽일 셈이다. 헤기를 봤으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였을까. 그때 그녀의 앞에 커다란 매가 날아와 허크를 막았다. 그 매는 사람보다 컸고, 날개를 펼치자 허크와 비슷한 덩치를 자랑했다. 푸드덕거리던 날개가 접히고 모습이 변하자 허크가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놨다.
원래는 붉은 머리였어. 저 아저씨랑 같이 살면서 하얗게 새버렸지 뭐야. 그녀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별로 자랑할 만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허크가 말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얼굴은 젊을 때랑 그대로인걸. 난 그에게 감사하고 있어.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소식이 없길래 죽은 줄 알았어. 아저씨.”
허크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헤기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옆에서 차만 홀짝였다.
“피차일반이야. 네가 백 년을 시작할 줄은 몰랐어.”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네. 헤기는 허크를 힐끔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카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매에서 사람으로 변했다. 허크와 친분이 있는 듯했다. 헤기는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요즘 책을 읽지 못해서 머리가 깡통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카이 옆에서 깔깔 웃던 여자가 헤기를 보며 물었다. 얼마나 됐어? 보아하니 아직 어린데? 거처를 옮기고 나서는 해를 헤아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직 한참 남았다는 것만 알았다.
“십삼 년.”
허크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헤기는 그럼 이제 열 여 덞 살인가. 하고 나이를 가늠했다.
“꼬맹아 그거 아니?”
그녀는 꼭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나 삼백 살 넘었다.”
헤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녀는 허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안 가르쳐줬어? 나쁜 사람이네~ 아, 사람은 아니지만. 남자가 과묵한 데 비해 그녀는 말이 많았다.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그렇다며, 이해해 달라고 했었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지만 여자. 너, 살기를 숨기는 게 어때.”
허크가 손으로 헤기 앞을 막았다. 그녀는 허크를 한번 바라보더니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너처럼 눈치 빠른 녀석은 정말 싫어.”
“아저씨도 좀 말려.”
“……벨라.”
카이의 부름에 벨라가 몸을 뒤로 뺐다. 허크의 뒤로 숨은 헤기가 겨우 고개만 내밀고 그들을 쳐다봤다. 장난도 못 치겠네. 벨라는 투덜거리며 뜨거운 차를 한입에 마셨다.
“안 해쳐. 아까는 필요한 먹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주인 있다는 거 알았으면 손도 안 댔어.”
그녀가 머리카락을 한 손가락에 빙빙 꼬며 말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꼭 마물처럼 빛났다.
“게다가 난 어린 애보다는 좀 더 연륜이 있는 편이 취향이라. 안 그래 아저씨?”
벨라가 카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카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벨라씨는 인간이잖아요…?”
헤기의 물음에 둘 다 헤기를 바라봤다. 정말 말 안 해줬어? 카이의 물음에 허크가 고개만 주억거렸다. 큰일이네 진짜. 헤기야, 꼬맹아. 너 내가 인간으로 보여? 헤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하하 웃었다.
“…인간은 맞지. 인간이었지. 아저씨와 함께한 지 삼백 년이 흘렀지만, 인간은 맞아.”
“무슨…”
“아니, 이걸 인간이라고 불러도 될까.”
09
맛없는 인간. 그건 마물 사이에서도 나름 인기가 있었다. 정말 맛없어서 머리카락 하나만 먹어도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인간. 그래서 차라리 찢어 죽이는 편이 나은 인간. 벨라는 그런 인간이었다. 아직 마물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던 시절. 인간은 무력하게 죽어 나갔고, 벨라는 단지 맛없는 인간이란 이유로 마물을 퇴치할 도구로 쓰였다. 머리카락은 늘 짧았고, 피부는 창백했다. 눈물 역시 마물에겐 독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몰골을 보고서 마물이라고 수군덕거렸다. 누구 덕에 이 마을이 살아남고 있는데! 그러나 그녀는 화낼 힘도 없었다. 맛없는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벨라가 살던 시대는 그랬다. 고작 몇 백 년 전이었건만 벨라는 아직도 그 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거기서 저를 구해준 게 아저씨였지. 그녀는 간만에 마신 술에 취했는지 주절주절 잘도 이야기했다.
“취했어.”
카이가 제 옷을 덮어주며 벨라의 잔을 뺏어 들었다. 순순히 잔을 내어준 벨라가 탁자 위에 몸을 숙이곤 눈을 감았다.
“…그래서 백 년을 계약했다고? 아저씨가?”
허크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카이는 대답 대신 술잔을 비웠다.
“인간을 용서했다고…”
허크가 중얼거렸다. 카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간을 용서한 게 아니야.”
“……”
“벨라를…”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헤기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삼백 년…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인간에게도 마물에게도.
“벨라가 나 때문에 인간이길 포기했어. 사실 내가 그렇게 만든 거지만.”
인간과 백 년을 시작한 마물은 모두 비슷한 길을 걷는다. 그리고 끝은 늘 같았다.
카이는 인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중한 건 모조리 빼앗기고, 믿었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저를 배신하거나 떠났다. 인간은 재미없고, 시시하고 약한 존재였다. 더는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인간도 마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난 것이 벨라였다. 나는 인간도 마물도 믿지 않아. 모조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카이는 그녀가 맛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래서 죽일 예정이었다. 인간에게는 실험당하고, 마물에게는 독이 되는 인간이었다. 죽이는 것이 그녀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인간은…마물과 함께하면 죽지 않아. 불멸은 아니지만, 보통 인간보다 오래 살지.”
‘인간도 마물도 다 죽여 버릴 거야.’ 벨라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인간도! 마물도! 전부! 그 대찬 목소리에 홀렸는지도 모른다. 새빨간 머리카락이나 새빨간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걸 수도 있다. 카이는 그녀를 살려주기로 했다.
“그건 아마 우리가 인간이 죽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 것 같아.”
카이가 술잔을 기울였다. 밤이 늦었다. 허크는 헤기에게 자도 된다고 했지만 헤기는 카이의 이야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 몇백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벨라와 함께 할 거야.”
날이 밝고, 벨라가 깨어나면 다시 올게. 카이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찾을 게 있다고 했었다. 잠든 헤기를 벨라 옆에 눕힌 허크가 한참이나 둘을 바라봤다. 인간, 삼백 년. 카이가 숨기는 게 있다. 고작 마음 따위로 인간이 마물과 함께 몇백 년을 산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 걸 믿을 리가 없잖아. 헤기는 믿을지 몰라도…
아침에 눈을 뜨니 허크가 아닌 벨라가 보였다. 일어났니? 그녀는 자상한 얼굴로 헤기에게 물 한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나도 금방 일어났어. 아무도 없더라. 헤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크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으니까요. 헤기 역시 식탁에 앉았다. 갓 차려 놓은 듯 따뜻한 스프가 있었다. 마법이야. 그녀가 말했다. 마물들이 쓰는 힘. 나도 쓸 수 있다? 볼래? 그녀가 검을 꺼내 들려고 하자 헤기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헤기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녀가 살짝 빈정댔다. 날 못 믿는 구나.
“…그럼 벨라 씨는 자길 죽이려 했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믿을 수 있어요?”
“못 믿지.”
둘은 식사를 끝내고 근처를 산책했다. 헤기가 나가기 싫다는 걸 벨라가 억지로 끌고 나왔다. 먹고 가만히 있으면 소 된다. 벨라의 으름장에 헤기는 차라리 소가 될게요. 하고 말했다가 힘에 이기지 못하고 주변을 걸었다. 그녀는 혼자서 신나게 떠들어댔다.
“지난 백 년간은 사람과 이야기할 일이 없었거든.”
“그래요? 그럼 어디서 지냈어요?”
“마을에서. 아저씨가 영 힘이 없어서 마을에서 지내는 게 편했어.”
헤기가 네? 하고 되물었다. 마을에 있었으면서 사람과 이야기 하지 않았다니, 아니 그럴 수도 있지만 그녀 성격이면 금세 친구를 만들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는 헤기의 짧은 대답에 시익 웃었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모조리 죽였거든.”
10
“먹어요.”
“벨라, 네가…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어.”
카이의 얼굴이 잔뜩 흐려졌다. 벨라가 들고 있던 사람의 머리를 툭 던졌다.
“그럼 나를 먹던가.”
“벨라.”
“아니면 내가 다음 마을 사람을 죽이는 걸 보고 계세요. 아저씨가 인간을 먹지 않겠다면 난 계속 인간을 죽일 테니까.”
누가 인간이고, 누가 마물인가. 카이는 새하얗게 변한 벨라의 머리카락이 다시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만해! 카이가 소리치자 벨라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곧 울것 같은 표정이었다. 벨라와 함께한게 근 이백년. 그녀의 표정 하나만으로도 무슨 말을 할지, 무슨 감정을 느낄지 알 수 있었다.
“제발 먹어요. 그대로 굶어 죽겠다는 미련한 소리 좀 하지 말고! 아니면 차라리, 나를 먹던가!”
“……”
“약속했잖아! 백 년이 지나면 나를 죽여주기로! 날 지금껏 억지로 살려둔 게 누군데!!”
거짓말을 했어.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 인간이고 마물이고 전부 증오한다던 당신이 나에게 인간이 사랑스럽다고 말했어. 그 무엇보다 증오스러운 생명체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봤어. 나는 이제 당신을 증오해.
“겁쟁이.”
11
허크와 함께 한다는 건 그런 의미야. 알겠니 헤기?
헤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르겠어요. 알고 싶지 않아요, 허크는 저를 먹을 거예요. 반드시.
그녀가 웃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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