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좋아하는 것
2.손안의 여름-명절
3.창문
4.언젠가 보았던 벚꽃-꽃
“버스데이. 레시오가 좋아하는 건 뭐야? 필요한건 없나?”
쓸데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이 화창한 날에 의뢰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인원만 네 명, 무라사키는 파트너 없이 혼자 앉아 있는 버스데이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폰만 톡톡 두드리고 있던 버스데이가 무라사키를 빤히 쳐다보더니, 글세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왜?”
“곧 있음 생일이잖아. 뭐라도 줘야하지 않나 싶어서”
버스데이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선글라스를 톡 다시 올려 쓰곤 대꾸했다.
“그냥 아무거나 주면 되잖아?”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중에서 레시오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물어봤건만, 무라사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레시오라면 뭐든 받을 걸?”
옆에 있던 나이스가 거들었다.
“레시오는 의사니까 돈이 부족할리는 없을거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살 테니까. 무슨 선물을 줘도 똑같다고?”
한술 더 떠 말하는 나이스를 보며 무라사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넌 뭐줄건데, 라고 물으니 마시고 있던 주스를 내려놓으며 하, 하고 콧방귀를 끼던 나이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난 이번에 새로 나온 하마토라 키홀더를,”
“집어치워”
“앗! 무라사키!!”
실랑이를 벌이는 둘을 두고 여전히 폰에 눈을 떼지 못한 버스데이가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누구랑 연락하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무라사키는 나이스에게서 키홀더를 뺏아든 채 버스데이에게 물었다.
“버스데이 그럼 넌 지금껏 뭘 줬는데”
“응? 나?”
“십 년 가까이 봐왔으면 좋아하는 것 정도는 알 거 아냐”
“레시오쨩은 날 좋아하는데?”
자랑스레 가슴에 손까지 얹고 말하는 버스데이를 보며 무라사키가 안경을 벗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이스가 혀를 쯧 찼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버스데이가 슬쩍 뒤로 물러나려 했다. 등에 푹신한 의자가 닿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버스데이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양손을 들어 올려 항복 선언을 했다.
“농담도 못하네. 난…매번 내가 좋아하는 거 줬어. 그날 눈에 들어오는 거랑 케이크. 별 말없이 받던데. 진짜야. 괜한 고민하지 말라고 안경군 그러다 대머리된다.”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버스데이를 보며 무라사키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딸랑 하고 문 닫히는 소리에 안경을 다시 쓰곤 나이스 옆에 앉았다. 거봐, 하고 이미 예상했다는 듯 한 나이스의 목소리에 손에 쥐고 있던 키홀더가 우득 하고 소리를 냈다.
레시오는 오늘 본업으로 바빴다. 평소에도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 유독 그랬다. 버스데이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곤 늦네, 하고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웨어에서 저녁까지 먹고 오는 건데, 대충 먹은 그릇을 치우곤 소파에 누운 버스데이는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농담으로 받아치긴 했지만 레시오가 좋아하는 거! 라고 말하기엔 딱 바로 생각나는 건 없었다. 커피를 좋아하고, 또 정리정돈, 거기까지 생각하곤 버스데이는 하품을 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무라사키에게 한말은 반은 농담이었고 반은 진담이었다. 생일날 필요한 걸 말하라고 해도 말하지 않는걸 보며 그냥 내가 좋아하는걸 줬다. 실망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매해 그냥 눈에 띄는걸 줬다.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버스데이 적어도 방에서 자는 게 어때. 감기 걸린다.”
“아, 왔어”
“TV도 켜놓은 채로…이 집에 전기세는 누가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제 잠들어 버린 건지 눈을 비비고 일어난 버스데이가 시계를 확인했다. 얼마 자지도 않은것 같은데 벌써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레시오 밥은? 하고 물으니 대충 먹었단다. 욕실에 들어간 레시오를 뒤로하고 버스데이는 커피를 탔다. 하는 김에 자신의 것도 머그잔에 달고 진하게, 레시오는 이 밤에 그런 거 먹으면 살찐다고 잔소리 하겠지만 몇 안 되는 레시오의 취향을 맞춰주기 위해서였다.
“버스데이…늦은 밤에 그런 걸 먹으면 몸에 좋지 않아.”
“네, 네”
버릇은 개 못 준다고, 보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한 레시오를 보며 버스데이가 쳐다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건지 타블렛을 붙잡고 한참이나 미동도 없던 레시오가 왜, 하고 버스데이를 불렀다. 티 났어? 버스데이가 머그잔을 내려놓곤 웃었다.
“아냐 그…좀 있으면 레시오쨩 생일이잖아? 필요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없어”
시선도 주지 않고 대답한 레시오를 보며 괜한 오기가 생긴 버스데이가 레시오, 하고 불렀다. 돌아오는 건 역시 왜하는 대답뿐이었다. 이쪽을 보라고, 레시오의 손에 있던 타블렛을 밀고서 얼굴을 들이민 버스데이를 보고 그제야 레시오가 피곤한 얼굴로 왜, 버스데이. 하고 물었다.
“필요한거 없어? 갖고 싶은 건?”
버스데이에겐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데이는 뭐든 다 사줄 것처럼, 한참이나 어린 아이에게 하듯이 그렇게 눈을 맞췄다.
“버스데이 난 네가 주는 거라면…”
거기까지 말하고 레시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럼 좋아하는 건?”
버스데이가 재차 물었다. 레시오는 버스데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마주치는 보랏빛 시선에 레시오는 한숨을 쉬며 버스데이가 들고 있던 타블렛을 다시 빼앗아 들었다.
“네가 내 차에 음식물을 넣지 않았으면 좋겠군”
“……”
“방도 좀 깨끗이 쓰고”
“그만…”
“잠은 방에서 자고”
“레시오쨩!”
밤에 그렇게 소리치면 안 돼 버스데이, 레시오가 타박하자 버스데이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소파에선 자지 말라고 내가 말했잖아”
“알았어!”
한참을 아무말도 없던 버스데이가 레시오, 하고 불렀다.
“…그럼 이번에도 내가 주고 싶은 선물 준다?”
“좋을데로”
역시 고민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어 무라사키, 하며 한숨을 내쉰 버스데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밤”
“너도”
벽장을 한참이나 뒤지던 버스데이가 찾았다! 하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커피를 약간 쏟은 레시오가 짜증을 냈지만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온 버스데이가 상자를 열고 옷을 꺼냈다.
“불꽃놀이가자! 오늘 해변에서 불꽃놀이 한 대!”
“버스데이 오늘은...”
레시오는 퇴근하고 오면서 꽉 막혔던 도로를 생각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지 버스데이는 한참이나 가면 안돼? 응? 하고 레시오를 보챘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날인데”
그랬다. 일 년에 딱 한번. 8월의 가장 더운 날.
“내년이면 난 못 갈지도 모르는데”
사실 반쯤 레시오는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버스데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거기다 자신이 저 말에 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약점은 약점이었다. 레시오는 한숨을 푹 쉬곤 몇 시에, 하고 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버스데이가 금방 전 풀죽은 목소리는 거짓말이라는 듯 활짝 웃으며 축제 일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설명하자면 일 년에 몇 번 없는 명절이었다. 귀성객들로 붐비는 건 요코하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이 되면 줄어들까, 생각했지만 뉴스를 보며 레시오는 차키를 집어넣었다. 걸어가자. 하는 목소리에 버스데이가 다리 아픈데, 하는 것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서,
이렇게 명절을 보내는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이유는 버스데이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처음엔 자신의 집으로도 데려가 봤다. 철이 없었다.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부러웠을 것이다. 부모님이 그리웠겠지, 레시오는 밤새 숨죽여 우는 버스데이를 모른 척 해야 했다. 그는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았으니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지만 아마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것이다. 버스데이가 스스로 말해주기를 기다렸으나 그의 입에선 단 한 번도 부모님의 얘길 해준 적이 없었다. 그의 조부모님은 그가 성인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울지 못하는 그의 눈을 보며 레시오는 다시는 버스데이를 혼자 두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축제는 화려했다. 거리에는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섰고, 사람들은 붐볐다. 최대한이면 피하고 싶었는데, 레시오는 인상를 쓰며 버스데이의 뒤를 쫓았다. 레시오쨩 여기, 하고 부르는 소리에 싫어도 대답을 해야했다.
“먹어”
입안에 푹 쑤셔 넣은 사탕에 레시오가 버스데이를 노려봤다.
“딸기를 살까 사과를 살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 개 다 샀어. 하나는 레시오쨩 줄게”
달디 단 사과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단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밤에 단 걸 먹으면 좋지 않을게 뻔했다. 레시오는 볼 안에 사탕을 넣고 굴리는 버스데이를 보며 자신의 사탕을 깨물었다.
“내가 쏘는거야.”
빵, 하고 손가락질을 한 버스데이를 보며 레시오가 투덜거렸다. 겨우 사탕가지고, 분명 들렸을 텐데 모르는 척 하는 버스데이의 뒤를 따라 걸었다.
입안의 사탕의 녹아 사라질 때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가자, 버스데이가 레시오의 손을 붙들었다. 입안에 막대가 툭 떨어졌다. 레시오는 버스데이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사실 버스데이도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밤의 거리는 낯설었고, 사람들의 소음으로 인해 서로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나무 밑에 자리를 펴고 앉은 버스데이가 레시오를 끌어내렸다. 별로 앉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자 버스데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레시오쨩은 이래서 안 돼 하곤 말했다.
“레시오쨩은 키가 커서 서있으면 다른 사람한테 민폐야.”
“네가 작은건 아니고?”
“난 평균이거든”
한참을 일본남자의 평균키를 설명하며 네가 너무 큰 거라고 소리치던 버스데이가 입을 다물었다. 시야가 밝아졌다. 눈앞에서 올라가는 한줄기 빛이 버스데이의 시선을 강탈했다.
“시작한다.”
조용한 한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펑 하고 터지는 폭죽이 눈 안에 들어왔다. 레시오는 힐끔 버스데이를 쳐다봤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걸 보면 역시 잘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둘에게 명절이라던 가 휴가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긴 휴일. 그것뿐이었다. 버스데이가 하고 있는 심부름센터는 이런 때에도 일이 들어오곤 하니까. 휴일도 아니었다.
“레시오쨩. 사람이 죽으면 달에 간다고 하더라”
갑작스레 말을 꺼낸 버스데이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내려오는 게 오늘이래. 그래서 축제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커다란 폭죽소리에도 불구하고 버스데이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레시오의 귀에 박혔다. 이쪽을 돌아본 버스데이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거라고, 항상 그래왔듯이.
“레시오쨩 내가 죽으면.....”
“버스데이”
“미안 똑같은 레퍼토리라 지겨웠지?”
폭죽이 큰 소리를 내며 주변을 밝혔다. 다시 고개를 돌린 버스데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나는 가족이라곤 레시오쨩 하나 밖에 없잖아...”
레시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이, 버스데이 어깨를 잡은 손이 억셌다. 버스데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레시오를 돌아봤다. 뭐, 숨이 멈췄다. 입안에 사과향이 가득 퍼졌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폭죽이 하늘에서 잠깐 빛을 잃었다가 이내 모든 걸 태워버릴듯한 굉음과 함께 터졌다. 점점 사그라지는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버스데이가 팔로 입을 가렸다.
“가족이란 걸 알면 혼자 두려고 하지 마”
“....미안해”
선글라스가 있어서 다행이다. 밤이라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버스데이는 뻗어오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물밀듯 빠져나가는 인파속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꽉 잡은 손. 버스데이는 손끝의 열에 데인 듯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벚꽃이 활짝 핀 봄에, 찌는듯한 더위의 여름에 그리고 다가올 가을과 겨울에도 계속될 열이었다. 아마, 아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될지도 몰랐다. 손안에 잡힌 여름, 닿은 손끝의 열.
“버스데이 병원에선 금연이야. 게다가 거기는 위험하니까 내려오는게 어때”
아슬아슬 하게 창틀에 기대앉은 버스데이가 담배를 그대로 입에 물고서 레시오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또 무엇이 불만인지 레시오는 한숨을 내쉬며 그 옆으로 다가갔다.
“레시오쨩 여기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버스데이의 손끝을 따라 창밖을 내려다본 레시오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내 손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만 해줘”
“농담이야. 농담”
담배를 입에 문 버스데이가 시익 웃었다. 아무것도 나지 않는 담배향이지만 하얀 연기가 피어오를 때마다 불쾌했다. 백보양보해서 향이 없는 걸로 피운다고 하지만 몸에 해로운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는 환자였다. 아무리 스트레스 때문이라지만 봐주기 힘들었다.
“버스데이”
“이것만”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에 레시오가 졌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서로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버스데이가 레시오를 힐끗 쳐다봤다. 혹시라도 떨어질 세라 꽉 잡은 옷깃에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간신히 가렸다. 담배가 손가락에 닿을 정도로 짧아졌을 때 버스데이는 창틀에서 내려왔다.
금세 날이 저물었다.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파고들어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창문을 닫은 레시오가 버스데이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몸이 식었어.”
“난 원래 몸이 차잖아”
레시오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버스데이가 대꾸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쓴 레시오가 버스데이의 손에서 옷을 잡아 뺐다.
“잠깐 따뜻한거라도 사올테니까 얌전히 있어”
“괜찮은데”
“의사가 하는 말은 좀 들어..”
“네, 네”
담요를 어깨에 둘러쓴 버스데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침대에 풀썩 누웠다. 병실 문이 닫히기 전 레시오가 잠깐 멈춰 섰다.
“버스데이 병실 탈출은 그 녀석들만으로도 충분해.”
“알겠다니까”
“약속이야.”
“그럼, 내가 여기서 나가면 또 무서운 누군가가 따라올지도 모르니까”
버스데이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문이 닫혔다. 걱정도 많아요, 혼잣말을 중얼거린 버스데이가 창밖을 내다봤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년 벚꽃 예쁘겠지. 보고 싶다."
버스데이가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창밖에는 메마른 벚꽃나무 가지가 눈의 무게에 버티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직 날짜는 12월이었고 벚꽃이 피려면 적어도 넉 달은 지나야 했다. 레시오는 버스데이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병세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하지 못 했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레시오 자신도, 버스데이도 그랬다. 조용한 병실 안에 가습기 소리만 덜덜 울렸다. 그만 가봐야 할 시간이 되어 일어나려는 것을 버스데이가 붙잡았다. 정확히는 레시오가 멈춰 섰다.
"네가 보여준다고 했으니까 기대하고 있어"
그것은 아주 오래전 아직 버스데이의 병이 얌전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자신이 먼저 죽을 것을 염두에 두여 부탁을 했었 을때 자신이 해줬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 말에 거짓은 없었다.
"...당연하지 이번엔 여행이라도 갈까."
레시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운 버스데이가 진짜?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응, 둘이서. 레시오는 돌아본 버스데이의 머리를 헝클며 웃었다.
"그 정도 능력은 되니까."
"과연 닥터,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그 전에 다 나으면"
버스데이의 어깨가 움찔하곤 튀었다. 레시오쨩, 하는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도 잠깐, 레시오는 단호하게 안 돼 하고 그의 머리를 꾹 눌러내렸다.
"네 병이 낫지 않으면 벚꽃은커녕 눈 구경도 못할 줄 알아"
"치사해"
"치사해도 안 돼"
"과보호"
"....꽃 사 올게"
무릎에 얼굴을 묻은 버스데이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미간을 잔뜩 구긴 채로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레시오가 눈에 들어왔다. 어쩔 수 없지. 기지개를 쭉 핀 버스데이가 시익 웃었다.
"장미꽃?"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말하곤 병실을 나간 레시오를 뒤로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짧아도 넉 달, 그 안에 괜찮아져야겠지, 나를 위해서도 레시오를 위해서도.
버스데이는 그날. 그 언젠가 레시오가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 벚꽃도 꽃도 단풍도 눈도 모두 보여줄게, 나는 그러기 위해 네 옆에 있는 거니까. 마치 고백과도 같은 그 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야말로, 너와 함께 꽃을 봐주기 위해 살아 있는 거였다. 너는 내가 아니면 안 되는듯하니.
내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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