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풀었던 기억상실 소재입니다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기에 잡았을 뿐인데 어깨를 끌어안아 왔다. 어깨를 끌어안길래 나는 녀석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고개를 들었더니 입을 맞췄다. 나중에야 왜 입을 맞췄냐고 하니 손을 잡아주길래 그랬단다. 나는 의아함에 눈을 가늘게 뜨곤 물었다.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냐고, 그러자 너는 나를 빤히 보면서 목적 없이 손을 잡아준 이는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선장의 명령이었다고 말하려다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그걸 알고 있었고,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캡틴!!"
익숙한 목소리가 로우의 귀를 때렸다. 시야를 확보하려고 인상을 쓰고 손과 발에 힘을 주자 온몸이 바다에 빠진 것마냥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캡틴이 일어났어! 펭귄이 소리치자 난생 처음 보는 사슴이 다가와 뺨을 툭툭 두드린다. 정신이 들어? 파란색 코가 로우의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이, 목 안에서부터 바다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더럽게 간지럽고 따갑군. 로우가 부르자 샤치가 달려와 그의 몸을 일으킨다. 겨우 상체만 일으킨 로우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처음 보는 장소, 처음 맡는 냄새, 그러나 익숙한 크루들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가 핑 돌아 몸을 앞으로 숙이자 더 누워있으라며 얘기하는 크루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짧은 머리가 물에 푹 젖어 있었고,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 끝에서 세 개의 금빛 귀걸이가 반짝였다. 이마부터 턱까지 강하게 울리는 두통에 로우가 눈가를 꾹 누르며 입술을 짓이겼다.
"……여기가 어디야."
로우의 말에 베포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캡틴이 바다에 너무 오래 빠져있었나 봐.' 좀 더 일찍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로우는 제가 왜 이런 꼴인지 대충 이해가 됐다. 어떠한 일로 바다에 빠졌고, 그걸 구하는데 늦었단 말이지. 그래서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이어진 말에 샤치와 펭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밀짚모자 루피의 해적선 써니호의 의무실이며, 여기에 온 이유는 캡틴이 애인이 보고 싶다고 여기까지 폴라 탱 호를 끌고 왔다고. 둘은 캡틴이 애인이 생겼다고 했을 때부터 맛이 갔구나 생각했지만, 지금이 더 이상하다고 얘기했다가 한동안 몸과 머리가 바뀌는 경험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 애인이라는 사람이, 펭귄이 마저 얘기하려 입을 떼는 순간 손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누굴 만나러 왔는지조차 모르나 보군."
잠자코 상황을 보고만 있던 조로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크루들을 보며 로우가 눈을 치켜떴다. 롤로노아 조로는 샤본디제도에서 딱 한 번 마주친 게 다였다. 물론 그 이름은 유명했다. 선장만큼이나 유명한 이름이었다.
"기억 못 한다면 그걸로 됐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만 너희 배로 돌아가."
그리 말하며 의무실을 벗어나는 그를 보며 로우는 크루들이 말하는 '애인'이라는 자가 그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아까부터 눈치를 보는 샤치와 펭귄하며 저와 조로를 번갈아 보는 베포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눈치 없는 놈이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로우는 한숨을 쉬며 구석에 세워둔 제 검을 잡았다. 더 누워있어야 한다는 사슴의 말에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어쩌다 제가 타선원과 연인 사이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우에겐 연인이 롤로노아 조로라는 것보다, 지금 상황에 제가 연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복수도 끝마치지 못한 상황에서? 기억을 잃었다면 그걸로 됐다. 상대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 필시 깊은 사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로우는 모자를 눌러쓰며 그만 돌아가자 얘기했다.
"진짜 그냥 가요?!"
샤치가 펄쩍 뛰며 로우에게 물었다. 여기까지 온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뒤에 이어진 말에 로우는 머리가 다시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도대체 나는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거냔 말이다. 사랑에 정신이 팔려 복수도 꿈도 다 잊어버린 팔푼이가 되었단 말이냐? 로우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플라밍고에게 가야지."
그러자 이번엔 아까보다 더 높이 펭귄이 뛰어오른다. 왜, 왜요? 당황한 목소리에 로우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진다. 제가 분명 오래전부터 복수를 꿈꿔왔다고 얘길 했는데도…
"캡틴 지금 몇 년도인지 알아요?"
샤치와 펭귄이 바뀐 몸과 머리로 설명하려 애쓴다. 캡틴은 목적도 이미 달성했고, 복수도 해냈어요. 밀짚모자 녀석이랑 동맹도 맺었고, 사황 카이도도 쓰러트렸다고요, 캡틴 지금 현상금이 10억이 넘은 건 알아요?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말에 로우의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도플라밍고는 지금 임펠타운에 수감되어 있다고요! 로우는 저벅저벅 걸어가 쵸파의 책상 위에 있는 신문을 펼쳤다. 제가 기억하는 것과 정확히 2년이 지난 후였다. 신문 사이에 있던 현상금 수배서가 로우의 발치에 굴러다녔다. 트라팔가 로우 현상금 10억 2천. 상황이 제법 심각하게 돌아감을 느낀 로우가 의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 저를 반겼다. 괜찮냐는 물음에 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따라 나온 크루들이 대신 고개를 저었다.
나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쵸파가 흔쾌히 그에게 그동안 모은 신문과 항해일지를 보여주었다. 밀짚모자와 하트 해적단이 동맹을 결성했다는 신문부터, 도플라밍고의 칠무해 박탈과 임펠타운 수감, 사황 카이도를 무찔렀다는 기사까지 보고 있으니 두통이 가시질 않았다. 분명 제가 바라던 일이었다. 제가 계획했던 일이 전부 진행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건만 그러지 못했다. 되려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제 안에 응어리진 복수심이 해소되지 못한 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굴었다. 죽음을 각오했다. 만약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사지가 멀쩡하리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봐라, 목이 붙어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다리가 다 붙어있지 않은가.
"캡틴?"
크루의 목소리에 로우가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걱정어린 눈빛에 입안을 꽉 깨물었다. 해결된 일이고, 기억을 찾으면 그만 인 일이다. 더는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기억을 찾아야겠어."
그 말에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돈다. 한동안 써니호에 머물겠다는 말에 염려 말라며 배로 돌아가는 크루들을 보며 로우가 한숨을 푹 내쉰다. 밀짚모자는 '또' 함께 하게 돼서 기쁘다고 얘기하지만 로우에겐 그저 불편하고 번거로운 항해가 될 것이다.
"조로도 잊은 거야?"
순수한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로우에게 꽂힌다. 로우는 창가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조로를 한번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큰일이잖아! 루피가 조로에게 달려가 어깨에 매달린다. 커피를 내온 산지가 혀를 찬다. 그 난리를 쳐놓고 잊어버리냐. 대체 무슨 난리를 쳤는지 로우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나미에게 빌린 항해일지를 하나둘 읽고, 지난 2년간 기사들을 모조리 읽었는데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 입맛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요리사도, 제게 외과 처치를 배웠다는 선의도, 폴라 탱 호에 탔을 때 구조가 많은 도움이 됐다는 조선공의 얘기도 로우에겐 와닿지 않았다.
"한 번 더 바다에 빠져보면 돌아오지 않을까?"
웃으며 말하는 루피에게 나미의 주먹이 날아왔다.
"애초에 너 때문이잖아!!"
그제야 루피와 우솝이 장난치다가 자기와 부딪쳐 바다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화 안 내? 루피의 말에 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루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재미없네.
"원래 나였다면 뭐라고 했을까."
로우가 묻자 루피와 나미는 서로 마주 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화를 냈겠지.' '그것도 엄청나게 큰소리로.' '밀짚모자야! 하며' 로우는 턱을 괴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그런가. 내가 그렇게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나. 로우의 시선을 따라간 나미가 아, 하며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조로랑은 얘기 좀 해봤어?"
"상대를 해주지 않더군."
사실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예 무시하면 좋으려만 이름을 부르면 뒤를 돌아보긴 하는데 그것도 잠시뿐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나를 보더니 말없이 자리를 떠나곤 했다. 분명 연인이라면 가장 많은 정보를 공유했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 말대로 잊어버렸으면 됐다는 건가, 아니면 정말 이름뿐인 관계였다는 건가. 이 배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얻었지만 그에 대한 얘기만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롤로노아와 자신에 관해 물어보면 다들 '모른다.'로 일관했다.
"그야 네가 롤로노아 라고 부르니까 그런 거잖아."
-
밀짚모자 일당들이 모두 잠이 든 시간이었다. 오늘 밤은 조로가 불침번이니까 잘해봐! 하는 나미의 말에 로우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술까지 한 병 쥐여주며 엄지를 척 올리는 나미를 보고 있자니 호의를 무시하기에도 껄끄러웠고, 무엇보다 롤로노아와 얘기는 필수 불가결하다.
"조로야."
그리 부르자 어깨가 튄다. 조로는 천천히 뒤를 돌아 로우를 빤히 바라봤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닌 것 같고…' 로우의 손에 든 술병을 보자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얼굴을 한다. 한잔하지. 로우의 말에 조로는 들고 있던 아령을 내려놓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거절할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순순히 옆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좋은 술이네. 조로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미가 줬나? 이 배에서 이렇게 좋은 술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거든. 조로가 입가를 핥으며 로우를 바라봤다.
"그 호칭도 나미가 가르쳐준 거지?"
"…뭐 그렇지."
아하하. 쾌활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로우는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주곤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롤로노아가 아니면 이 배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폴라 탱 호에 돌아가겠다며 연락도 넣어 놓은 참이다.
"내게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내려놓은 술잔 위로 달이 둥둥 떠다녔다. 로우는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입안에서 별처럼 부서지는 말 중에 가장 적당한 것을 골라야 했다. 그는 말이 없고, 나는 기억이 없다.
"우리는 대체 뭐였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크루들을 다 끌고 올 정도로 애정이 깊었으면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듯 굴었다. 양측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며, 얕은 관계도 아니라는 것인데 그는 시종일관 자신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이 배의 선의는 금방 회복될 거라고 얘기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그만둬야지 생각하면 시선 끝에 그가 걸려있었다.
그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나랑 관계가 진짜였느냐, 근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정말 이대로 끝내도 상관없냐는…. 롤로노아가 전부 이해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다만 왜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잊었으면 됐다고 그 말로 끝낼 정도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조로는 잔에 든 술을 모조리 비워냈다.
"꿈이었다고 생각해."
그건 로우가 물어본 것에 대한 답이 아니라 충고에 가까웠다. 그냥 잊어버려라. 이 말 없는 사내가 겨우 입을 열고 한 말이 잊으라는 대답이었다. 조로가 자리에서 벗어날 때까지 로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벅, 저벅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었다. 잊어버리라고? 그의 기억만 깨끗하게 잊을 수 있다면 로우도 그러고 싶었다. 허나 모든 기억의 단서가, 온몸의 신경이 전부 그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가 결정적인 단서라고, 그를 붙잡아야 한다고.
로우는 그저 복수에 관한 기억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다. 지난 2년간 벌어졌던 커다란 사건들, 제 인생을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기억을 모조리 잊어버리다니. 로우의 손안에서 술잔이 부서졌다. "조로야." 입안에서 굴러다니던 이름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불쑥 튀어나왔다. 정말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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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대로 돌아가려고?"
제법 친해진 나미가 조로와 로우를 노골적으로 번갈아 보며 말했다. 로우는 어쩔 수 없지 않냐며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건, 그렇지. 기억이 돌아오면 연락해. 고개를 끄덕인 로우는 조로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서 써니호를 떠났다 .
"조로 진짜 괜찮아?"
루피는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폴라 탱 호를 보며 조로에게 물었다. 어쩔 수 없지. 조로는 그 말로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캡틴 진짜 괜찮아요?"
폴라 탱 호로 돌아오기 무섭게 날아드는 질문에 로우는 손으로 크루들을 물리고는 선장실로 들어갔다.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연인이느니, 사랑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저와 어울리지 않았다. 한 번도 꿈꿔본 적도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 로우에겐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이 전부 복수와 악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며 그게 삶의 목적인 것마냥 굴었다. 나와 함께한 이들은 모조리 죽음을 면치 못했다. 만약 복수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로우는 제 목숨은 물론 크루들의 목숨마저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플라밍고는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모든 걸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여야 했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을 여유 따윈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다른 배의 선원이 아니었던가. 만약 진심으로 자신이 그를 사랑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 배에 태웠을 것이다. 자기가 아는 트라팔가 로우는 그런 사람이니까. 원하는 건 가져야 했고, 내 손에 들어온 건 나를 떠나선 안 되었다. 부서지고 망가지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내 손을 떠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나는 무언갈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란 말이다.
로우는 익숙한 방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제 방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데 곳곳에 모르는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술과 두 개의 잔. 책상 위에 올려놓은 투명한 유리관 안에 비브르카드. 누구 것인지 뻔한 물건들. 문신이 잔뜩 새겨진 손이 책장 위를 헤맸다. 지난 2년간 자신이 쓴 항해일지에서 제일 최근 부분을 펼쳐보자 온통 그 사내의 얘기가 가득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항해일지보다는 연애편지에 가까운 문장을 읽어보자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항해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사소하고 간지러운 얘기들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그리 소리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펜 끝으로 쭉 그려진 몇 개의 온점 위로 그리움이 쭉 번져있었다. 로우는 자신이 여기 앉아 이 글을 쓰는 상상을 했다. 한순간의 장난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진지한 글이었다.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작게 소용돌이치더니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안에서 깊은 애정과 배신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고 동시에 나쁜 예감이 로우를 덮쳤다.
롤로노아 조로를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면 사지를 절단시켜서라도 진심을 듣고 말 거라는 나쁜 예감.
만약 우리가 이대로 각자의 배에 올라타 아주 먼 바다로 떠났다고 해, 로우의 말에 조로는 눈을 깜빡였다. 굳이 그런 생각까지 해야 하냐는 얼굴이었다. 로우는 일단 들어보라며 조로의 맨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때 만약 내가 위험하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넌 어쩔 거냐. 조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루피에게 구하러 가자고 하겠지. 아니 루피가 먼저 구하러 가자고 할걸. 로우가 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로우를 보며 조로가 물었다.
'만약 내가 위험하다면 넌 어쩔 건데?'
'…널 위험하게 만든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버리겠지.'
그건 좀 무섭네. 조로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널 억지로 끌고 와서라도 내 배에 태우겠다.'
너를 위험에 빠트린 밀짚모자와도 작별해야지. 이어진 말에 조로가 코웃음을 쳤다. 날 데려가는 건 날 이기고 나서 하라고. 수마睡魔에 푹 잠긴 목소리가 로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남들보다 좀 더 높은 체온이 귀에 닿았다 떨어진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로우는 읽고 있던 책을 가슴 위로 내려두곤 조로를 바라봤다. 그는 눈을 감은 채였고, 색색 내쉬는 숨소리와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은 그가 잠들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다고? 당연하잖아, 나는 이배의 선장이자 선의니까. 내가 생각이 많은 게 아니라……. 로우는 가슴 위에 있던 책을 바닥에 툭 던지고는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난 로우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크루들이 드디어 캡틴이 깨어났다며 환호성을 질렀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모두 나쁜 꿈이었나? 대체 어디서부터가 꿈이지? 로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캡틴! 크루들이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이틀 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책상 앞에서 쓰러져 있었다며 얘길 한다. 로우는 손사래를 치며 물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캡틴!!!"
크루들의 비명이 함선 내에서 메아리쳤다.
다행히도 기억은 모두 돌아온 채였다. 그럼 왜 비명을 질렀는데? 여태껏 조용했던 크루 하나가 묻자 다들 눈물 콧물을 주렁주렁 달며 열변을 토한다. 캡틴이 롤로노아 뿐만 아니라 우리까지 잊은 줄 알았지! 다 큰 어른들이 그러고 있으니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로우는 지난 열흘간의 기억을 모조리 되짚어봤다. 변함없는 밀짚모자 녀석들과 달리 쌀쌀한 연인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제야 그가 했던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원래 그런 성격이란 걸 알았지만 실제론 더더욱 가혹했고, 로우는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없었다. 만약 조로가 똑같이 모든 걸 잊었다면 자신은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로우는 차마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난 너를 택했을까?
비브르 카드를 쫓아가자 익숙한 배가 정박해 있었다. 혼자 다녀오겠다며 크루들을 물리곤 밀짚모자의 배에 올라탔다. 배를 지키고 있던 이는 검을 잡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로는 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흉흉한 기운이 천천히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까지 다가온 그는 검 위에 올려둔 조로의 손을 붙잡았다.
"기억이 돌아왔나 보군."
검에서 손을 뗀 조로가 입술을 달싹인다.
"…토라오."
"난 널 용서할 수가 없다. 조로야."
로우가 이를 악물었다. 조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로우를 부추겼다. 지금 듣고 싶은 건 네 고요한 숨소리도, 요동치는 심장 소리도 아니었다. 침묵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고 우리를 더 불온하게 만들 것이다. 변명이라도 해. 로우가 입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라니,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거냐.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은 한 손으로 어깨를 붙잡자 그의 몸은 저항도 없이 품으로 끌려왔다. 이렇게 쉽게 돌아올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만약 나였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비비자 그의 손이 내 허리께를 잡아 왔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자 너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입을 연다.
"너는 그 배의 선장이고, 너만 보고 따라오는 크루들이 있잖아."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에 로우가 조로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낸다.
"그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단 말이다. 로우는 제 밑에서 휘둘리는 이들의 노고를 모를 만큼 무심한 선장이 아니었다. 고집스럽고 억척스런 제 말을 들어주는 이들의 얼굴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금방 그 말은 네가 지나쳤어.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깊은 애정과 배신감이 묻어 있었다. 한번도 본적 없는, 감정을 모조리 드러낸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미안하다, 간신히 내뱉은 사과의 말에도 로우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란 듯이.
"조로야, 나한테 진심이었나?"
"전부 진심이었어, 꿈이라고 말한 것도…"
"유감이구나, 꿈에서 깨어난 지 오래다."
전부 진심이었다고, 모든 게 사랑이었다고 말하면서 잊었으면 그대로 잊고 살라니, 이토록 비참한 기분은 오랜만이라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를 잊은 자신도.
멱살을 잡고 입술을 부딪치자 어렴풋이 피 냄새가 났다.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물어뜯자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밀어 넣어 입안을 헤집었다. 잠깐, 뒤로 물러나려는 몸을 꽉 붙들고 살짝 떨어진 입술을 잡아먹을 듯 굴었다. 찐득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시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언제나 죽이는 건 쉬웠지, 살리는 건 항상 어려웠다. 사람이든 감정이던, 그러니 다시는 제 감정을 속이지 않기를, 다시는 포기하지 않기를, 너는 분명 한번 포기하고 나면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어서.
"…약속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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