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텅 빈 만창장을 둘러 보며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이제 제가 기억하는 본래의 맴버들은 이곳에 없었다. 멀린도, 퍼시벌도, 록시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새로 바뀌었다. 단, 에그시만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킹스맨 수장의 자리에 앉아. 엄마는 병으로 죽었고, 데이지는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갔다. 가끔 연락이 오는 것도 이제는 없었다. 에그시는 차라리 그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제이비는 마당에 묻어줬다. 차마 박제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록시의 말을 듣고 크지 않을 줄 알았던 제이비는 그보다 훨씬 커 제 허벅지를 누르고 앉곤 했는데 죽었을땐 무척이나 가벼웠다. 무언가의 죽음이란 결국 그런것이다. 아무런 무게감도 가지지 않았다. 짓눌리는 것은 마음 뿐이었다.
얼마 있으면 해리의 기일이었다. 에그시는 단 한번도 해리를 잊은 적은 없으나 이제는 울지 않았다. 매 그의 기일날만 되면 걱정되어 전화 올 사람도 모두 죽었으니 스스로 떨쳐내야 했다. 어쩌면 에그시는 그 작은 관심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처음 이곳에 해리가 자신을 데리고 왔을때가 떠올랐다. 아, 얼마나 헛된 상상인가. 그 상상에 에그시는 몸을 맡겼다. 우주를 떠다니는 것처럼 온몸이 추억속에서 부유했다.
고열에 시달렸다. 에그시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이젠 돌봐줄 사람도, 기댈 사람도 없는 고요한 집안은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울려 퍼졌다.
에그시는 자신의 글씨를 싫어했다. 그냥 평범한 남자애들처럼 엉망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동글동글한 글씨는 제 손과 똑같이 저를 한없이 어리게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쓰고 접은 편지를 서랍에 넣어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아무도 없는 서재에 인사말을 남기고 떠난 에그시는 혹시라도 누가 그 편지를 읽어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아무도 읽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문을 제대로 잠그지 못했다.
그 흔한 창문 하나 없는 하얀 방에 에그시가 서있었다. 헉헉 거리는 숨을 몰아쉬고 넥타이를 풀어 내린 에그시는 커프스단추에 묻은 빨간 얼룩을 대충 닦아내곤 뒤를 돌았다. 발치에 걸리는 시체들을 대충 밀어낸 뒤 문을 열려고 하자 누군가가 발목을 턱 잡았다. 화들짝 놀란 에그시가 고개를 돌리자 귓가에 멀린이 왜 그러냐는 말이 들려왔다. 아니에요. 착각했나 봐요. 에그시는 금세 늘어진 손을 보며 말했다. 저는 언제나 완벽해야 했다.
현 아서. 그러니까 전 멀린이었던 그를 보며 에그시가 급히 인사를 하곤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에그시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 짓을 했다. 그제야 의자에 몸을 기대고 늘어진 에그시가 안경을 벗었다. 얼룩으로 엉망이 된 안경을 벗자 시야가 확 트였다. 아서 역시도 안경을 벗고는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뒀다.
“잘하구 있구나.”
“예전보다는 나아져야죠.”
“그래. 힘들지는 않았고?”
“아서. 저 그래도 아직 이십대라구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는 에그시를 보며 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랬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에그시가 턱을 괴곤 말했다. 해리도, 그 단어를 꺼내자 속이 타는 듯 했다. 바짝 마른 혀를 한번 굴리며 침을 삼킨 에그시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