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화 아/가/씨au

 

 

 

 

 

 

 

 

 

 

 

 

 

 XXXX년 XX월 XX일

 커다란 대문이 보이자 허크는 황급히 잠에서 깨어났다. 드디어 다 왔나? 허크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운전 수는 더 자라. 하며 덧붙였다. 저택까지 가려면 아직 한 참 남았으니까. 허크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을 보고선 무슨 집안에 가로등이 있냐. 하며 입맛만 쩝 다셨다.



 시간은 늦은 밤, 달이 호수 한가운데 둥둥 떠 있었다.

 짐을 손수 내려주는 운전 수를 보곤 됐다며 짐을 빼앗아 든 허크는 제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노모를 향해 까딱 고개짓을 했다. 노모는 살짝 인상을 썼지만 늦은 밤이어선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끼익끼익. 허크가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에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노모는 조심히 걷지 못하겠냐고 했지만 허크는 원래 걸음걸이가 이런 걸 어쩌라며 되려 큰 소리를 냈다. 쯧! 노모가 혀를 찼다. 커다란 방문 앞에 짐을 내려놓자 노모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은 지금 취침 중이니 중요한 건 내일 말해주마. 네 방은 여기다.”

 

 

 그러며 문 앞에 작은 방을 여는 게 아닌가. 꼭 포대기를 넣어 놓을 만한 공간에 허크는 진짜 여기서 자라고요? 하며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노모는 허크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시끄럽다고 했다.

 

 

“도련님은 아침 6시가 되어야 깨어난다. 조용히 하고 자도록”

 

 

 그게 아침이야? 새벽이지. 허크는 괜히 트집 잡고 싶은 마음을 꾹 다잡고는 다락방에 몸을 뉘었다. 몸만 돌려도 금세 어깨가 부딪칠 것 같은데. 불평은 오래가지 못했다. 몇 시간이나 차를 타고 이동해서 그런지 곧 눈이 감겨왔고, 선잠이 들었을 때 귀를 찌르는 비명이 들렸다.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대체 누구야, 하고 귀를 틀어막을 때쯤 도련님이란 존재가 떠올랐다. 황급히 일어나느라 천장에 머리를 박은 허크는 에이씨,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귀족의 집이란 건 원래 이렇게, 텅 비어 보이나? 허크는 커다란 방치고는 장식물이 없는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커다란 방안에 커다란 침대, 책상, 옷장 두어 개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침대 위에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도련님을 보고서 허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 진정시키기로 마음먹은 듯 어깨를 붙잡았다. 도련님. 분명 사내아이라고 들었건만 손에 잡힌 몸뚱이가 어찌나 작은지 달빛에 얼굴이라도 보지 않았다면 계집아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아니, 얼굴을 봤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어여쁜 얼굴이라 허크는 다 풀어 헤쳐진 가슴팍을 곁눈질로 보고 나서야 아이가 사내아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에일? 에일이야?”

 “이번에 새로 온 하인입니다.”

 “에일 불러와! 에일!”

 “도련님.”

 “창밖에서…죽은 누나가 날 쳐다보고 있어!”



 허크는 조심스레 커튼을 걷었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나무와 호수뿐이었다.



 “누나가 저 호수에 빠져 죽었어…”

 “창밖엔 아무도 없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네.”



 허크의 단호한 말에 겨우 진정했는지 헤기는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이불을 살짝 내리곤 허크를 바라봤다. 커튼을 다시 치고는 방안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헤기가 허크를 불렀다.

 

 

 “어…이름은…”

 “허크라고 합니다.”

 

 

 헤기가 눈을 도르륵 굴리곤 주변을 살폈다. 허크를 위아래로 훑어도 보고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렇게 어두운 공간에서 얼마나 볼 수 있겠냐만은 실루엣만 봐도 자신보다 훨씬 큰 사내인걸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기는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더니 힐끔 곁눈질로 허크를 바라봤다.

 

 

 “허크…저 혼자서 못 자겠어요.”

 

 

 웃음이 터질 뻔했다. 허크는 갑자기 얌전해진 아이를 보며 입 꼬리가 씰룩 올라가는 것을 간신히 무마했다.

 

 

 “말은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도련님이 그러하다는데 제가 무어라 하겠는가 허크는 조금 성가신 아이라고 생각했다. 침대 한쪽으로 몸을 틀더니 자신의 옆을 툭툭 치는 모습에 허크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장가라도 불러드릴까요?” 허크의 말에 헤기가 고개를 저었다. 비꼬는 말이라는 건 아는지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같이 자요.” 그 당돌한 말에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 꼬마는 모를 것이다. 허크는 순간 말문이 막혀 헤기만 빤히 바라보다가 곧이어 제게 보여주는 작은 등에 한숨을 쉬었다. 다른 말은 듣지 않겠다는 완고한 명령에 허크는 좁은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그래도 다락방보다는 낫네. 제게 등을 돌린 아이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허크는 금세 잠이 들었다. 시간이 늦기도 하고, 많이 피곤하기도 했기에, 때문에 헤기가 잠드는 것을 보지 못한 게 실수였다.









 “일어났어요?”

 

 

 생소한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허크는 커튼을 걷으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헤기와 눈이 마주쳤다. 아, 허크는 아주 잠깐이지만 햇빛을 받고 반짝 빛나는 금색 눈동자가 마치, “언제까지 제 침대에 누워계실 생각인가요?”

 

 

 “죄송합니다.”

 “아뇨. 죄송할 필요까진 없고…정리만 하고 내려오세요.”



 하얀 이불이 펄럭이며 먼지를 일으켰다. 허크는 창문을 열고는 방안을 환기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기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의문이 가득한 눈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는데 소심한 건지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인지 잔뜩 경계가 서려 있었다. "그분이 당신을 추천했다고 하던데요." 허크는 가게를 찾아온 말끔한 인상의 남자를 떠올렸다. 인상만 말끔했지 완전 변태가 따로 없었다. 이런 어린애와 약혼을 하겠다고 하다니. 허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분 이야기 좀 해봐요. 전 한 번도 뵙질 못해서 너무 궁금해요…"

 “그 분은…"

 

 

 허크는 한 시간도 채 만나지 못한 남자에 관해 주절주절 떠들었다. 일이니까, 좋은 말만 해줘야 하는데 입이 말썽이었다. 그래도 웃으니까 낫네. 이곳 날씨는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비가 오고 안개가 끼어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보다. 헤기가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리며 웃는데 바람이 살랑 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햇빛을 머금어 반짝반짝 빛났다. 아름답네, 저도 모르게 떠올린 단어에 허크는 입을 딱 다물었다. 왜 그래요? 헤기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1

 

나는 꽃이기를 바랐다,

그대가 조용히 걸어와 그대 손으로 나를 붙잡아 그대의 것으로 만들기를.

   헤르만 헤세, 연가.

 

 

 




 

 

 

 

 

 




 

 

 “식사는 저와 함께 하실 거예요. 이후 목욕을 하고."

 “목욕도 같이합니까?"

 

 

 

 허크의 말에 헤기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는 둥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크를 바라봤다. 이후 교양으로 음악과 미술수업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선생님이 오셔서 가르쳐주시는데 거기까진 신경 쓰실 필요가 없으세요. 점심시간 이후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듣곤 해요. 헤기의 말에 허크는 귀족이란 한가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저녁식사 이후에는 별관에 가요. 거기엔 따라오시지 않아도 돼요. 따로 시중드는 하녀가 있으니까요. 제 방에서 편히 쉬셔도 돼요. 생각한 것보다 훨씬 한가로운 일정이었다. 허크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하얀 욕조가 하나 있고, 옷걸이와 갖가지 입욕제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있던 헤기가 불쑥 옷을 벗었다. 황급히 옷을 받아든 허크는 옷걸이에 옷을 걸고 헤기가 욕조에 발을 담그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허크? 헤기의 부름에 허크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맙소사. 목욕 시중을 들라는 말이었겠지. 영락없이 함께 욕조에 들어가자는 말로 오해하고 있었다.

 

 향이 좋네. 허크는 입욕제를 풀면서 생각했다.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말투 하나도 조심해야 했기에 허크는 헤기에게 자연스럽게 입이 무거운 사람으로 인식됐다. 다르진 않지만, 허크는 부드러운 수건으로 더 부드러울 것 같은 살결 위를 살살 훑었다. 군살하나 없고, 흉터 하나 없는 몸이었다. 온실 속 화초이라는 게 이런 건가. 어깨를 훑고 등을 쓸어내리다가 드러난 다리 사이에 손이 들어갔을 때 헤기가 물고 있던 사탕을 아득 깨물었다. 아. 작은 소리였지만 코앞에 있는 허크가 듣지 못할 소리는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헤기가 물고 있던 사탕을 빼고는 말했다.

 

 

 “입안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따끔따끔해."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헤기를 보며 허크가 턱을 붙잡았다. 더 벌려 보세요. 허크의 말에 헤기가 아- 하고 입을 벌렸지만 별 차이는 없었다. 그냥 봐선 모르겠는데. 허크는 손을 닦고는 실례한다며 입안에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었다. 순간 헤기의 눈에 당혹감이 비쳤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여기요? 허크가 이 위를 살짝 문지르며 물었다. 대답도 할 수 없는 헤기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덧니는 아닌 것 같은데. 허크의 손가락이 안쪽을 파고들 때마다 헤기가 눈을 깜빡였다.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오르고, 침도 못 삼킬 정도로 입안을 헤집어 놓고서야 허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손을 뗐다.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다리를 오므리고 저를 쳐다보지 못하는 헤기에게 괜찮아요? 하고 묻자 소스라치게 놀란 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을 다시 앙 문 헤기는 잠깐 나가 있으라며 허크에게 손짓했다.

 

 귀엽긴. 허크는 문틈으로 들려오는 야릇한 신음에 주먹을 꽉 쥐었다.

 

 

 









 

 

 도련님의 그림 솜씨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사과를 그리는데도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는 데 시간을 소비 한만큼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헤기는 자기가 그린 사과, 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걸 보더니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에일은 항상 잘한다고 해줬어요…하지만 전 제가 소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구요…”



 헤기는 묻지도 않은 것을 주절주절 토해냈다. 에일이라는 남자는 아주 잠깐 마주쳤지만, 그렇게 다정하게 보이지는 않던데. 허크는 그래요? 하며 웃음을 삼켰다. 에일은…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저택에서 컸다고 했어요. 헤기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여서 허크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에일은 서자라고 했다. 헤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같을 것이다. 그런 헤기를 증오하고 있었을까? 허크는 알 수 없었다. 헤기와 남자의 자리를 마련해준 건 에일이었다. 헤기가 이용당하고 버려지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옆에서, 아버지가 헤기를, 조부가 헤기를 기르는 꼴을 봤으니 증오도 커졌겠지. 어느새 헤기는 뒤를 돌아 허크를 보고 있었다. 산책 시간이에요. 허크는 일어나는 헤기의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갔다.

 


 저택은 넓었다. 한두 번 둘러본다고 해서 위치를 다 파악할 수는 없었는데 헤기는 용케도 그 좁은 길을 돌아다녔다.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허크는 제 얼굴을 때리는 나뭇가지를 툭 꺾었다. 도련님은 괜찮은가 봐요. 허크가 묻자 그제야 헤기가 뒤를 돌아봤다. 허크의 머리에 나뭇잎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헤기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허크 고개 숙여 봐요. 허크가 고개를 숙이고도 헤기가 까치발을 들어서야 손이 닿았다. 이런 걸 달고 다녀요. 헤기가 웃으며 나뭇잎을 빙글빙글 돌렸다. 허크가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리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과 지저귀는 새, 변성기도 오지 않은 아이의 웃음소리…



 “헤기!!”



 무른 흙을 밟고 넘어지는 헤기의 몸을 붙잡은 허크가 소리쳤다. 안 그래도 그 신발 위험해 보이더라니, 간만에 느낀 위험에 심장이 벌렁벌렁 거렸다. 금방이라도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헤기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그러쥔 채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허크가 잡은 팔에 빨갛게 자국이 남았다. 멍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넘어졌으면 돌에 머리를 부딪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깟 멍이 대수겠는가. 조부가 보면 길길이 뛰며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그건 혼자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허크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련님들은 하나같이 조심성이 없어.” 허크가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허크, 헤기가 허크의 손을 붙잡았다.



 “다른 곳에서 일해 봤나 봐요?”



 아차, 허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아요. 말해 봐요.” 괜찮긴,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천성이 싸움꾼이라 이런 커다란 저택에서 얌전한 척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말투 때문에 쫓겨나서 그닥 좋은 기억은 아닙니다.” 허크는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쥐어짜 간신히 변명했다. 되려 당황한 건 헤기였다. 미,미안해요. 제 손을 놓고 도망치려는 것을 허크가 붙잡았다. 또 넘어지시면 어쩌려구요. 익숙지 않은 존대에 혀가 꼬이는 것 같았다.



 “그…그럼 손잡아 주실래요?”

 “도련님 명령이라면.”

 

 












 “두 시간 후에 와서 노크해주세요.”



 탁. 문이 닫혔다. 헤기는 저를 두고 커다란 별채로 들어갔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허크가 그 안에 일까지 알 리가 없었다. 할 일도 없는데, 저택까지 왔다갔다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두 시간이라, 예절교육이라도 받는 걸까? 매일 두 시간씩 기다리기에 허크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별채 안을 보려고 했지만, 창문이 없었다. 무슨 이런 곳이 다 있어. 헤기가 악몽을 꾸는 것도 조금씩 이해가 되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겉에만 봐도 나무에 온통 먹칠해놔 새까만 건물이었다. 꼭 불에 탄 것 같이 그랬다. 기분 나쁜 집이야. 허크는 근처 연못가에 돌을 던지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어렴풋이 두 시간 정도 지났을 때야 노크를 했는데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안에 시녀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았나? 별 생각 없이 문을 여는데 열렸다. 아주 간단하게. 조금의 힘도 들이지 않고,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긴 복도가 있었는데 그 끝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마!”


 노모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세 명의 시선이 허크에게 박혔다. 목을 빳빳하게 들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헤기와 반대편에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조부, 그리고 노모가 허크의 앞을 막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뱀에도 허크는 콧방귀를 꼈다. 가짜. 허크는 단번에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들어오지 말라니, 허크는 제게 달려드는 노모를 밀치고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헤기가 허크에게 소리쳤다.



 “나가! 당장!!”



 우뚝 걸음을 멈춘 허크는 헤기를 쳐다보다가, 이미 제게 시선을 거둔 조부를 한번 쳐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눈가가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운 게 틀림없는데 오지 말란다. 허크는 한숨을 한 번 쉬더니 말했다. “두 시간 지나서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헤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자니 조부가 입을 열었다. “나가라.”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헤기가 비틀비틀 허크에게 걸어왔다. 얼마나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걸음 하나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허크에게 몸을 맡긴 헤기가 말했다. 빨리, 나가요.











 

 “예절 교육이라구요?”



 허크의 물음에 헤기는 답하지 않았다.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때린 게 교육이라고 하는 겁니까. 허크가 혀를 찼다. 소파에 엎드려 누운 헤기가 고개만 옆으로 돌려 말했다.



 “익숙하니까…”

 “익숙하다고 아프지 않은건 아니잖아요.”



 허크의 말대꾸에도 화를 낼 기운이 없었다. 약을 발라주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이러고 내일 그분은 어떻게 만나시려고 그럽니까. 허크의 말에 헤기는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별로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걸요.”

 “약혼하실 사이잖아요.”

 “말뿐인 약혼이지, 그 사람도 절 안 좋아할걸요.”

 “그렇지 않습니다.”

 “…허크가 뭘 안다고 그래요.”

 “적어도 도련님보다는 제가 그분과 많이 만났으니까요.”

 “……”

 “도련님 얘기를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헤기가 몸을 일으켜 허크를 바라봤다.



 “절 딱 한 번 봐놓고 사랑한다고 그러던가요?”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있는 법이니까…”

 “허크도 그런 걸 믿는 사람이었어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잔뜩 비꼬는 말에도 허크는 화 한번 내지 않았다. 제게 무릎을 보이고 앉은 헤기를 보며 허크가 말했다. “나도 첫눈에 반한 사람이 있으니까.” 허크의 말에 헤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부럽네요.”

 “……”

 “…첫눈에 반할 수 있어서…부러워.”

 

 

 

 






 

 

2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설렜고, 갑자기 시커먼 밤이었고, 너는 하아얀 대낮이었다.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남자가 먼저 찾아온 건 헤기가 아니라 허크였다. 그럴 테지, 허크는 남자가 하는 행동을 빤히 바라보다가 남자 몫으로 내어온 복숭아를 크게 한입 베어 먹었다. 남자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다. 거울을 보고 옷을 다듬더니 허크에게 어떻냐고 물었다. 어떻냐고 해도…애초에 내가 왜 사내새끼 꼬라지까지 봐줘야 하는데? 허크의 말에 남자는 넉살 좋은 사람처럼 웃었다. 속에는 이무기가 또아리를 틀고 있을지도 모르는 새끼가, 혀가 참 길었다. 허크는 저 혀가 헤기의 입안을 강간하는 상상을 했다. 남자는 저만큼은 아니었지만 컸다. 어깨도 넓었고, 나름 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우리 도련님은 한 입 거리도 되지 않겠지. 허크는 헤기가 입은 옷을 보았다. 돈이 썩어나게 많은 집이라고 했다. 과연 그랬다. 헤기는 평생 이런 천으로 몸을 두르고 살았을 것이다. 하얀 몸은 그 증거였다. 그 하얀 몸이 저 아래 무참히 짓눌려 뚫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상상. 털 하나 없이 매끈한 다리를 타고 올라가 둔부를 잡아 벌리고 입으로, 또 성기로 무참히 범하겠지, 범해지겠지. 자위하나 제대로 못 하는 꼬맹이를.

 

 

 “헤기랑 잘 거냐?"

 “뭐?"

 “섹스할 거냐고."

 

 

 허크가 묻자 남자는 조금 고민하는 듯 문 앞을 서성거리다니 말했다. “계획에 필요하면." “그래?” 허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 봐도 되지? 허크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준비나 도와줘. 허크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름다우시네요. 남자의 말에 허크는 우웩 헛구역질을 했다. 남자가 허크를 노려봤지만 허크는 뭐 어떻냐는 듯이 귀만 후벼 팠다. 헤기는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보였는데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어깨를 감싼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를 더듬자 헤기의 몸이 바짝 굳었다. 남자는 곁눈질로 허크에게 얼른 나가지 않고 뭐하냐고 물었지만 허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섹스는 안 할 거라며. 허크가 말하자 남자가 눈에 힘을 줬다. 계획에 필요 하면 할 거야. 아 그랬지, 허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뭐하는 거야, 남자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버릇이 없군요. 평소에도 저런가요? 당장 바꿔드릴 수도 있습니다. 남자의 말에 헤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것보다 이것 좀… 다리 사이로 손이 불쑥 들어오자 눈에 띄게 당황한 헤기가 큰 소리를 냈다. 남자는 헤기의 입을 막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우리 관계가 얼른 진행돼야 당주님도 신경을 덜 쓰실 겁니다.

 

 

 “하지만…"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잖아요."

 

 

 남자가 헤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잘근잘근 씹고 빨더니 빨간 멍자국이 남았다. 정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구요. 남자의 말이 다 끝나자마자 허크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티타임 끝났습니다. 말에 묘하게 가시가 있었다. 헤기는 손으로 목을 가리곤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는 헤기가 나가고 허크랑 둘만 남았을 때 멱살을 잡아챘다.

 

 

 “대체 뭐하자는 건데?! 일을 다 말아먹을 속셈이냐?"

 “난 도련님에게 가봐야 하는데."

 “허크!!"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니까 혹시 저 영악한 꼬마가 눈치챌까 초조했을 뿐이야."

 “영악? 물러터진 복숭아 같아서 좆만 찔러 넣어줘도 좋다고 질질 쌀 것 같던데?"

 “…그만 간다."

 “허크 명심해. 너뿐만 아니라 네놈 가게 사람들 목숨까지 달린 일이야."

 “알고 있어."

 “엉뚱한 생각하지 마."

 

 










 

 

 허크 저 당장 목욕할 거니까 준비해주세요. 헤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목걸이와 팔찌를 집어던지 듯 침대 위로 던진 헤기가 옷을 벗었다. 하얀 몸에는 여전히 흔적하나 없었다, 없어야 했다. 목에 남은 멍자국에 허크가 손을 뻗었다. 손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헤기가 목을 감싸고 뒤돌아 허크를 올려다봤다. 눈물을 잔뜩 머금은 얼굴이었다. 허크, 말해줘요. 헤기가 소리쳤다. 비가 툭툭 내리기 시작하며 창문을 때렸다. 호수 위로 안개가 짙게 깔렸다. 어른이 된다는 거, 약혼한다는 건 다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아파요? 헤기의 물음은 물음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을 묻는 게 아니었다. 하얀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가르쳐 주세요…"

 

 

 

 당신 어른이잖아! 헤기의 외침에 허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촉, 떨어진 입술에 헤기가 눈을 크게 뜨고는 허크를 바라봤다. 눈 감고. 헤기는 말 잘 듣는 인형마냥 눈을 감았다. 입 벌리고.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아까 남자가 헤기를 입으로 강간하는 상상과 똑같이 입안을 헤집어 놓았다. 뒤로 살짝 물러서는 헤기의 뒤통수를 단단히 잡고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작은 손이 가슴팍에 닿았다. 밀어내려는 양손을 한 손으로 제압한 허크가 고개를 들었다. 침과 눈물로 범벅된 입술이 퉁퉁 부어올랐다.

 

 복숭아…맛…, 헤기가 제 입술을 두드리더니 허크의 목에 팔을 감고 다시 입을 맞췄다. 아까완 다르게 먼저 혀를 섞어왔다. 서툴러, 허크는 헤기를 힘으로 밀어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남자가 남긴 흔적 위로 입을 맞췄다. 깨물고 빨고, 핥고 남자의 흔적은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굴었다. 헤기는 허크의 어깨를 꽉 붙잡고 새된 신음만 흘렸을 뿐 밀어내지는 않았다. 목에 커다란 멍자국이 남았다. 조부가 보면 화내시겠지. 헤기는 제 위에 올라와 옷을 벗는 허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싫어요…"

 “아플 거야."

 “괜찮으니까……"

 

 

 헤기의 가슴팍을 훑고 내려온 허크가 속옷을 잡아 내렸다. 찢기듯 끌어내려 간 속옷이 침대 아래로 툭 떨어지고 하얀 둔부가 드러났다. 욕조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말 하얗군. 허크가 허벅지를 더듬고 올라가자 헤기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어떻게 했어?” 허크의 물음에 헤기는 잠깐 무얼 묻는 건지 고민하다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헤기의 말에 허크가 피식 웃었다. 가만히 있었는데 그런 소리를 낸다고? 허크는 헤기의 성기를 붙잡고 훑었다. 이미 젖어서 손안에서 질척거렸다.


 “아, 흐으…” 헤기가 허리를 바들바들 떨며 신음을 내질렀다. 물러터진 복숭아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정해주고 싶었다. 터지진 않았다고, 제게 딱 알맞다고.









 

 “하, 아! 잠깐! 너무, 빠, 빨라!" 헤기의 성기를 손으로 만져주던 허크가 웃었다. 이 정도로 죽는소릴 내면 안 되지. 손이 떨어지자 아쉬운 듯 고개를 든 헤기는 허크가 바지를 벗는 것을 보고는 딸꾹! 숨을 삼켰다. 제 한쪽 허벅다리만 한 성기가 헤기의 성기 위에 달라붙었다. 허크가 한 손으로 헤기의 성기와 제 걸 딱 붙잡았다. 뜨겁고, 끈적끈적 한 것이 다리 사이에서 움직였다. 하악, 앗! 허크가 귀두 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허, 허크으…, 허크…”

 

 

 헤기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허크를 불렀다.

 

 

 “싸, 쌀 것 같아…그……

 “뭘?” 성에 아예 무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헤기는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허크가 자극을 주자 금세 목을 뒤로 젖히고 울었다. “화, 화장실 보내줘요, 허크, 읏!” 헤기가 사정을 하며 울었다.


 “그러게, 화장실 보내달라고, 힉! 했는데……” 배 위로 뚝뚝 떨어지는 미지근한 것에 헤기가 눈 둘 곳을 몰라 하자 허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런거 아니야. 헤기. 잘 봐. 손으로 훑어 하얀 정액을 보여주자 헤기가 손가락 사이로 허크를 빼꼼 쳐다봤다. 이제 이걸 네 안에 쌀 거야.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헤기가 놀라 이불을 움켜쥐었지만 소용없었다. 정액이 묻은 손가락이 안을 침범하자 긴장했는지 힘이 꾹 들어갔다. 헤기 긴장 풀어. 끊어먹겠다. 허크가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아마 농담인 것도 모를 것이다. 헤기는 고개만 끄덕이고 힘은 전혀 풀지 않았다. 뭐 어떠랴, 천천히 가르칠 것이다.  다리를 더 벌리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헤기가 순종적이라는 것이다. 여느 도련님들과는 다르게.


 구멍에 성기를 맞추고 꾹 누르고 들어가자 헤기가 이불을 쥐어뜯었다. 아무리 풀어도 아플 것이다. 제 팔뚝만 한 것이 아래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겠지. 허크는 좁은 아래를 억지로 밀고 들어갔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헤기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목을 뒤로 꺾으며 몸부림쳤다. 아프면 소리 질러도 돼. 어차피 이 저택엔 너와 나뿐이야. 허크의 말에 헤기가 하악, 소리를 내뱉자 그 틈 사이로 입술을 겹쳤다. 달디 단 사탕을 빨아 먹는 것 같았다. 헤기도 눈을 감았다. 키스를 하니 고통이 덜어졌는지 아니면 신경을 돌리려고 한 것인지 맞물린 입술 사이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톱 상합니다…”



 베개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 끝이 하얗게 되었다. 허크는 헤기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 제 어깨를 붙잡게 했다. 곱게 다듬어진 손톱이 어깨를 마구 긁었지만 상관없었다. 제가 남길 자국이 더 컸으니까. 안에는 아직 절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헤기가 고개를 저었다. 더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혀가 풀려서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시러허어… 

 울음과 신음이 뒤섞였다. 허크는 못 알아들은 척 허리를 붙잡고 서서히 밀어붙였다. 살과 살이 마찰하는 부위가 적나라한 소리를 냈다. 꽉 다물려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몸이 서서히 열리는 건 흔하게 맛 볼 수 있는 쾌감이 아니었다. 허크의 다부진 허리에 다리를 감은 헤기가 허벅지를 벌벌 떨었다. 지금껏 저택에서만 살아온 헤기가 맛볼 수 있는 쾌락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한 아이였다. 누군가 가르치지 않은 것들. 스스로 알아도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허크, 허크, 허크으… 헤기가 쉼 없이 허크의 이름을 불렀다. 헤기는 허크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무서워?” 허크의 물음에 헤기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끄덕였다.

 괜찮아. 허크가 헤기의 팔을 붙잡아 내리곤 손을 잡았다. 깍지를 꽉 끼고서. 그리고 입을 맞췄다. 사랑해, 라고 말을 할까. 찰나의 순간이었다. “사랑해요.” 헤기가 말했다. 사랑해. 눈물을 줄줄 흘리며 헤기가 쉼 없이 말했다. 허크, 당신을 사랑해요. 대답을 해야 하는데, 허크는 성기를 빼고는 헤기의 몸을 뒤집었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헤기는 다시 들어오는 성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엉덩이와 배가 철퍽, 부딪쳤다. 아! 헤기의 손을 한 손으로 결박한 허크가 몸을 숙였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다음날 헤기는 목까지 단추를 꼭꼭 잠그고 스카프를 했다. 감기가 심하게 걸렸나 봐. 목이 다 쉬었어. 헤기는 노모에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실제로 목은 다 쉬어 있었고, 그건 감기 탓이 아니었지만 헤기는 지난밤에 있던 일을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럼 오늘은 낭독을 하지 못하시겠군요. 안주인께는 그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모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헤기는 허크를 힐끔 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은 더 오래 있을 수 있겠네요. 우리.


 고작 일주일만의 변화였다.







 교양으로 춤과 피아노를 배워요. 헤기는 조금 수줍은 듯 말하고는 허크를 힐끔 쳐다봤다. 피아노 하나 치는데 무슨 방이 쓸데없이 넓어? 허크의 뒷말은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지난밤 이후로 허크도 헤기에게 존대를 쓰지 않았다. 원래도 그런 성격도 아니었지만 헤기가 하지 말라고 하니 허크도 굳이 존대를 쓸 이유가 없었다. 방음실이거든요. 헤기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 뚜껑을 열었다. 피아노를 배우는 것 치고는 손끝이 부드럽던데. 허크가 삐딱하게 서서 물으니 헤기의 얼굴이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끔, 진짜 가끔 하는 거리니깐요. 헤기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두드렸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건반 위를 걸어 다니던 손가락을 가만히 보고 있던 허크는 방을 살펴봤다.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방이었다. 방음이 된다고 했지. 허크가 말하자 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부께서 시끄러운 걸 싫어하시거든요.



 “시끄럽진 않은데.”



 삐끗, 손가락이 미끄러진 헤기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허크를 올려다봤다.



 “내가 음악에는 조예가 없거든. 그런 내가 들어도 나쁘지 않아.”

 “…고마워요.”

 “아름다워.”



 헤기의 손을 잡아챈 허크가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미끄러진 음색이 무색하게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몸을 숙여 제 손가락을 깨물고 핥은 허크가 새빨간 눈으로 헤기를 바라봤다.

 

 

 

 

 

 

 “흑…”



 새까만 그랜드 피아노 아래로 하얀 다리가 흔들렸다. 방음, 이라고 했지. 허크가 헤기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거 엄청 위험한 발언인 거 알아, 도련님?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헤기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고, 거기에 발정한 것은 허크 뿐이었다. 아마 다른 누구와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타고났네. 도련님.”



 허크가 몸을 숙여 제 품에 헤기를 가뒀다. 허리를 치대다가도 아래에서 콱 조여 오는 느낌에 도저히 천천히 할 수가 없었다. 헤기, 허크는 이제는 익숙한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제야 헤기가 고개를 돌려 저를 봤다.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군. 허크는 눈썰미가 좋았다. 보석이나 골동품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랬다. 헤기는 그중에서도 좀 특별하지. 정을 나누고 키스를 하고, 밤을 함께 지새워서? 그런 이유도 있지만 헤기는 그간 제가 봐오고, 기르고 가르친 그 어느 아이보다 영특했고, 순수했으며, 탐이 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용이고 뭐고, 다 걷어차고 그 새끼도 죽여 버리고 제가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아직 식구들이 있으니까. 저를 거두고 보살핀 이들을 버릴 순 없지 않은가. 허크는 헤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허리를 콱 붙잡았다. 흑, 아흐…, 안에 사정하고 빠져나오려는 성기를 놓치기 싫다는 듯 헤기가 아래를 꽉 조였다. 진짜 타고났다니까, 그 말의 뜻을 헤기가 알기는 할까. 허크는 검은 피아노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제 흔적을 보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헤기가 남자와 산책을 하는 동안 허크는 뒤에서 둘의 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너와 이야기하는 아이는 한 시간도 전에 나와 몸을 섞었어. 안에는 아직도…, 남자가 허크에게 말했다. 목이 마른 데 물을 좀 가져오지. 능구렁이 같은 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헤기도 저와 관계를 다른 이에게 들키고 싶어 하지는 않았으니. 그러니까, 허크는 길을 가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언제까지 버티실 생각입니까? 빨리 나가셔야죠. 당신의 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꼭 당신이랑 몸을 섞어야 하나요?”

 “의례 같은 거죠! 조부의 눈을 피하기 좋지 않습니까?”

 “전혀요! 그보다 이것 좀 놔주세요.”

 “싫은데?”


 

 남자가 막무가내로 헤기의 손목을 붙잡고 턱을 훑었다. 셔츠를 풀어헤치려는 손길에 헤기가 몸부림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한 손에 제압당한 헤기는 제 뒷덜미를 깨무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허크! 도와줘요!”



 남자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 떼어 논 허크가 물을 건넸다. 남자는 쳇, 하며 넥타이를 고쳐 맸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는 남자의 물음에 허크는 어깨만 으쓱하고는 헤기에게 말했다. 가실까요? 헤기는 남자가 아닌 허크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왔다.

 

 

 

 

 







 

 “허크 제 몸 어때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옷을 벗은 헤기가 물었다. 하얀 나신 위로 얼룩덜룩 제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어떻느냐고 말하기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순수한 감상을 원하는 건지… 지금 제 몸의 상태를 보고 따지려는 것인지 구분 가지 않았다. 헤기가 한 발자국 다가와 허크를 올려다봤다.



 “다들 저보고 시체 같다고 했어요. 하얗고, 창백하고, 생기 하나 없다고.”

 “…그렇지 않아.”

 “허크가 그렇지 않게 만들어줬죠.”



 헤기의 손에 이끌린 허크가 침대에 앉았다. 고작 도련님에게 밀릴 몸이 아니었는데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겨우 시선이 같아졌다.



 “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요. 약혼…취소할 거야…”

 “헤기…”

 “저랑 같이 도망쳐요…”



 헤기의 눈동자는 결코 해가 아니었다. 우리는 평생 어둠 속에서 살게 될 거야. 허크의 말에 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도 빛나는 건 있는 법이지. 달과 별처럼… 너는 어둠을 밝히려는… 길 잃은 별처럼 빛날 것이고…,



 “안 돼.”

 “허크…”



 허크는 평생을 어두운 곳에서 살아왔다. 좋게 포장할 수도 없는 삶이었다. 이 의뢰만 끝나면 그런 어둠 속에서 살지 않겠지. 그건 자신의 삶만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피도 이어지지 않는 식구들… 제가 도망친다면 평생을 노예처럼 살 것이다. 헤기, 너만 희생시키면…. 너만…….


 차라리 내가 혼자였다면,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저 백작이었다면. 허크는 부질없는 ‘만약’이라는 상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했다.



 “허크…제가 걱정돼요?”

 “……응…”

 “저는 허크가 더 걱정돼…”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 허크는 그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봤다. 결코, 공포에 질린 눈이 아니었다. 지금도, 헤기는 확신에 찬 두 눈으로 허크를 바라봤다. 허크가 저를 버릴 리 없다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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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ㄴ면 뒷편을 쓰겟죠?

연성빵(?) 으로 피아노에서 떡치는거...였는데 길어졌어..수습불가...ㅋㅋㅋㅠㅠ;

ㅇdam ㄹevine -Lost Stars 가사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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