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왕난을 진짜 형제라고 믿는 것은 아니었다. 반지에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붙들고 놓지 못한 것은 만약에 라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만약에 진짜 반지를 빼앗긴 것이라면? 저와 자왕난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로 인해 저를 이용할 생각이라면? 또다시 놓치게 된다면? 그래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카라카는 차라리 옆에 두고서 지켜보자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녀석이 그런 장난을 할 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카라카는 지금껏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다른 이들을 살리려는 자왕난을 보고 미련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는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다. 만약 그것이 자하드의 운명 때문이라면 말이 됐다. 그가 자하드의 피를 이어받고 있다면 웬만한 방법으론 그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카라카의 약점을 만들고 말았다.
옆에 두겠다는 말이 단순히 동행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자왕난은 처음엔 질색을 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같은 방,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공유하겠다. 물론 카라카는 어느 곳에 머물기 보다는 밖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잠도 자러 오지 않았다. 가끔 자왕난이 그곳에 머무는지 확인 차 둘러보기만 했다. 대화를 하지도 않았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저 가면 안에는 무슨 표정으로, 어떤 눈빛으로 저를 보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목숨이 아까워서 그만뒀다.
열차를 빠져나온 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일행과는 떨어졌고, 카라카는 이곳이 꼭대기 층과 아주 가까운 퍼그의 기지라는 것만 이야기 했다. 앞으로 그들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카라카의 말에 자왕난은 쉽게 수긍했다. 걸림돌이었지, 늘… 그 녀석들은 강했고, 자신은 약했으니까. 자하드의 피를 물려받은 게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반지는 찾지 못했다. 라헬을 만났으나 반지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저를 여기 가둬놓는 다는 건 카라카가 어느 정도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형제로서,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으로서? 자왕난은 실소를 터트렸다. 얼굴도 모르는데 형제라니, 카라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알 것도 같았다. 그저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
지나친 생각이란 걸 안다. 카라카가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자신은 그저 밤을 낚을 미끼 역할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왕난은 카라카가 가끔 여기에 들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았다. 감시하는 건 그저 카메라를 달아놓으면 그만이고 사람을 붙여놓으면 그만이다. 퍼그의 슬레이어나 되는 녀석이 시간을 내서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없어야 했다.
자왕난이 눈을 감았다. 창밖의 하늘은 어두워지고 밤이 오고 있었다. 방은 넓었고, 정원도 있었으며 아마 탈출하지 못하도록 결계가 쳐져 있을 것이다. 사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떠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무의미하고 힘들었다. 얼른 쉬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탑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 뒤로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누군가가 죽고, 다치고 협박당하고, 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도 여러번 있었다. 탑을 그만 오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눈을 감자 완벽한 어둠이 저를 덮쳤다. 차가운 손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것을 알았다.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어서 밤이 지나가길 바랐다.
[자왕난 들려?]
익숙한 목소리에 자왕난은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통신이 두절되어 있었을 텐데 휴대폰에선 쿤의 목소리가 들렸다. 쿤? 휴대폰을 귀에 대자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 어딨어? 대체 어디야? 다른 녀석들은? 혼자냐? 질문이 우수수 쏟아지자 당황한 자왕난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겉옷을 챙겨 입었다. 혼자야,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듣기론 탑의 꼭대기라고 했어. 커다란 문을 열고 나가자 하늘에 균열이 생겼다. 자왕난이 여태껏 하늘이라고 생각한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곳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카라카의 능력이라면 무리도 아니었다.
[데리러 갈게.]
“…뭐?”
지금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 다는 것은 그들이 꼭대기 층에 가까이 있단 소리고, 그건 곧 자하드와 만날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전혀 전력이 안 되는 저를 데리러 와서는 무얼 하겠다고? 자왕난의 당황한 목소리에 쿤이 살짝 짜증이 난듯 말했다. [내가 이거 해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곧 결계가 깨지니까.] 하늘이 갈라지면서 분홍색 구체가 보였다. 자왕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나를 구하러,
“자왕난.”
뒤를 돌아보자 카라카가 서 있었다. 가면이 반쯤 깨진 것을 보아하니 전투를 하다가 온 모양이었다. 그는 입가에 피를 닦아내곤 물었다. 갈게냐? 그의 눈동자에선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분노도 증오도 애정도 없었다. 자왕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라카가 한발자국 다가갔다. 자왕난은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가 다가올수록 짙은 피 냄새가 났다. 그가 곧 자왕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가지마.”
절절한 목소리였다. 그의 손이 자왕난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널 어떻게 찾았는데.”
옷이 피투성이가 됐다. 자왕난은 곧 쓰러지기라도 할 듯 무너지는 카라카를 놓지 못했다. 슬레이어라고 불리는 그의 손이 떨리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리기도 했다. 누구보다 강할 것 같았던 그가 피투성이로 제게 매달려서 이기도 했다.
“못 가…”
“뭐?”
이번에 되물은 건 쿤이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자왕난의 품에 있는 카라카를 확인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쿤이 한소리 하려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정은 대충 알 고 있었다. 밤에게 들었으니까. 그렇다고 둘 다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카라카는 적이고, 자왕난을 제외한 우리를 전부 죽이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 쿤은 형제애 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카라카가 자왕난을 죽이지 않은 걸 봐서는 자왕난에게는 크게 위협요소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카라카에게 자왕난은 위험요소였다.
스스로도 미쳤다고 생각했다. 저를 감금해두고 얼굴도 비추지 않는 녀석에게 무슨 동정심이 들어서 감싸는 것인지. 그렇지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녀석을 혼자 두고 가면 안 된다. 언젠가 밤에게 가장 큰 적이 될 녀석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자왕난은 저를 처음 여기 데려왔을 때 카라카를 떠올렸다. 편하게 지내도록, 필요한건 말하고, 밖에 나가고 싶다는 것 외에는 들어 줄 수 있다. 퍽 다정한 말이었다. 그때는 그리 비웃었는데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다정이라는 것을 알 고 난 후에는 웃을 수 없었다. 밤에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손가락도, 이불을 덮어주는 손길도, 빤히 바라보는 시선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자왕난이 고개를 푹 숙였다. 녀석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저를 구하러 온 녀석들이었다. 목숨을 걸어야할 상황도 있었을 것이다. 카라카가 결계만 쳐놨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미안해…하지만 갈 수 없어.”
내가 가면 이 녀석은 정말 혼자가 되어버려. 쿤이 한소리 하려는 것을 밤이 막아섰다. 왕난씨 결정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죠. 쿤은 밤을 빤히 바라보더니 등을 돌렸다. 난 이제 몰라. 알아서 해. 쿤이 걸음을 멈추더니 소리쳤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으면 연락해. 그의 목소리에 카라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왕난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는 카라카의 등을 두드렸다. 안심하라는 뜻이었으나 그는 영 불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들고는 자왕난을 내려다봤다. 자하드의 회복력이란 가끔 쓸데없이 빠를 때가 있었다. 자왕난의 뒷덜미를 꽉 붙잡은 카라카가 그대로 몸을 숙여 입을 맞췄다. 읍-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던 자왕난의 입안에서 혀가 엉켰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뒷덜미를 꽉 누르자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깨를 밀어내는 손에서 힘이 점점 빠지더니 이내 카라카의 품에서 무너졌다.
“저 미친 새끼가―자왕난 일어나!!”
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튀어나갔다. 밤이 바로 막아섰지만 밤의 손에도 힘이 꾹 들어간 후였다. 카라카는 입술을 훔치고는 자왕난을 안아 들었다. 희미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함부로 녀석의 이름을 부르지 마라.”
카라카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밤은 지금껏 싸웠던 그 어떤 때보다 그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았다.
“눈도 마주치지 말고, 목소릴 들을 생각도 하지마라.”
카라카의 발밑으로 공간이 생겨났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앞으론 볼 일도, 목소릴 들을 일도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
떨어진 휴대폰을 발로 밟은 카라카가 잠든 자왕난을 내려다봤다. 떠나지 않겠다고 한 건 너야. 기회를 줬는데도 내 곁에 있겠다고 한 것도 너고.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가늘게 눈을 뜬 자왕난이 카라카의 옷깃을 꽉 쥐었다. 그러나 이젠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밤의 신수와 카라카의 신수가 부딪치고, 섬광이 터졌다. 그 강렬한 빛이 지나간 자리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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