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릴글렌 시즌4까지 보고 썼습니다
- 사망소재 주의해주세요
- 18.02.01 오후 12:44 오타수정
작살로 철창 너머 좀비들의 머리를 찌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썩은 뇌를 찌르면 워커는 곧 쓰러져 미동조차 없다. 한때 인간이었을 시체들은 썩은 내를 풍기며 썩어가 주위를 더럽히고 사람들을 오염시킨다. 안전하다면 나름 안전한 이곳은 생각해보면 얄팍하기 그지 없었다. 총, 삽, 작살, 칼 그런 공구들을 쭉 둘러보다 문득 고개를 내려 밑을 보면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 그제야 아침부터 피냄새를 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겨운 나날이었다. 글렌은, 처음엔 익숙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워커로 변해 죽은 이를 보고서도 사람이었어요! 하고 울었던 그였다. 태우는 게 아니라 묻어줘야 한다구요! 그러면서 무슨 배짱인지 데릴에게 큰소리도 쳤었다. 지금은 태워주기는커녕 죽이기도 바빴고 무리의 사람들을 수습하기도 힘들었다. 더이상 교도소에 자리는 없었다. 이제 이름을 공동묘지라고 바꿔도 될 것 같았다. 데릴과 얘기하다 그가 문득 난 신 안 믿어. 라고 했다 글렌은 영문을 모른 채 저도 안 믿어요 라고 대꾸했는데 그가 웃으며 그럼 우리 묘비는 필요 없겠군 하고 웃었다. 글렌은 마주 보고 웃다가 그래도, 하고 그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 털어냈다. 이름 정도는 써주세요. 데릴이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하나 더. 키스하려는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낸 글렌이 시익 웃었다. 최고의 터프가이 애인이었다는 것도. 뭐,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세상이 멸망한 시대에서 제정신을 가진 이는 얼마 없었고 매일매일 살아가기 급급한 이들에게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파트너 역시 없었다. 데릴은 대답 대신 웃으며 입을 맞췄다. 예전이었다면 농담으로도 묘비명을 써달라니, 죽음을 암시하는 말은 하지 않았건만 날이 갈수록 그것도 유희 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죽는다면. 서로가 죽는다면. 워커가 된다면. 망설임 없이 머리를 내리찍어 줄 것을 약속하며, 그 약속만이 유일한 위안이라도 되는 것마냥 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로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은 불에 타 죽은 엄마가 나왔고 어느 날은 워커가 되어 제 손에 죽은 형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날은 네가 죽어있었다. 데릴은 꿈인 걸 알면서도 꿈에서 깨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단지 거짓일 거라고 그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농장에서 쫓겨나듯 도망치고 교도소로 들어왔을 때 겨우 정착했다고 믿었으니까, 죽음을 가지고 농담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도 생겼으니까 그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너는 정말 손쓸 도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역병이 돌았다. 처음엔 독한 감기인 줄 알았던 것이 교도소 전체에 퍼지면서 옮겨 다녔다. 안일했다. 워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명사회가 무너진 지금, 사람은 감기로도 죽는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선 더욱 그랬다. 비위생적이고, 피비린내 가득한 곳이었다. 그 흔한 감기약 하나 구할 수 없었다. 데릴이 가져온 약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글렌은 그리 말하며 살풋 웃었는데 그리도 이뻐 보여서 데릴은 정말 괜찮다고 믿었다. 그는 항상 돌아왔다. 어디에서든. 워커 소굴을 가도, 납치를 당해도, 워커가 있는 우물에 들어가도 살아 돌아왔다. 데릴은 그 모양새를 보며 욕을 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만약 그때도 우리가 지금과 같았다면 너는 이리 무모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푹 쉬어도 모자랄 판에 죽은 이들을 옮기고 머리에 칼을 꽂아 넣던 너는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들어가려는 것을 릭이 말렸다. 여기는 이대로 폐쇄해야 해. 데릴이 릭의 멱살을 움켜잡은 건 순식간이었다. 아직 안 죽었어. 릭의 표정 역시 참담했다. 내가 들어갈 거야. 그리 말하자 글렌이 유리창을 쾅 내리치며 중얼거렸다. 안돼요. 들어오지 말아요. 문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글렌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다. 릭 여길 태워줘요. 글렌이 말했다. 역병이 나가면 큰일이에요. 밖엔 아직 아이들도 있고, 릭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에도 데릴은 문을 열려고 애썼다. 이럴 때 총을 들고 오지 않았다. 실망시켜 드리기 싫었지만, 제가 마지막이에요. 데릴, 보지 말아요. 글렌이 제 머리에 총을 겨눴다.
역병은 노인과 어린아이, 남녀 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을 데려갔고 거기엔 너도 있었다.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릭이 데릴의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 애썼다. 키드, 장난치지 마. 나 사실 장난 안 좋아해. 그동안 참은 건 네가 했기 때문이라고. 릭을 밀어내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머리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데릴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릭, 널 믿었어. 글렌을 살려줄 거라고 그래서 내가 저 밖에서. 데릴의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D구역에선 불과 함께 새까만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그 꿈 꿨어요? 망루 난간에 앉아있는 걸 어찌 알았는지 눈을 비비며 곁으로 나온 글렌이 옆에 털썩 주저앉아 데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냥…그래. 데릴은 딱히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건 글렌을 위해 밖으로 약을 구하러 나갔을 때 꿨던 꿈이었다. 지나치게 생생해서 종종 꿈에 나오곤 했고 그날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망루에 앉아 철창 너머 워커들을 보고 있으면 그래도 역병보단 워커가 무섭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괜찮아. 데릴이 그리 말하자 글렌은 그게 뭐냐며 웃었다. 워커는 죽일 수라도 있죠. 글렌의 말에 데릴은 웃으며 그러게. 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몇 개 안남아서 다음에 나갈 때 있으면 챙겨야겠다. 뭐 필요한 거 없어? 글렌은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부르더니 데릴의 턱을 스윽 만지곤 말했다. 면도크림이 필요할 것 같아요. 키스할 때 따가워. 그러면서 입술을 삐죽 내민다. 데릴은 삐죽 내민 입에 살짝 입을 맞추며 그러지 하고 대꾸했다.
만약 그가 워커로 변했다던가, 워커에게 죽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데릴은 차마 글렌의 묘비를 만들지 못했고 그건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글렌의 최후를 들은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지만 데릴만은 울 수 없었다. 형을 제 손으로 죽일 때도 펑펑 울었다. 워낙 개망나니 같던 형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이었고, 하나뿐인 핏줄이었으며 그럼에도 저를 퍽 아꼈다. 도망쳤으면서, 나를 두고 갔으면서 그랬다. 형이 죽은 걸 쉽게 인정한 건, 그래 내 손에 형의 피를 묻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차라리 널 내 손으로 죽였다면, 비참해도, 슬퍼도, 고통스러워도 그랬다면 차라리 이렇게 허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워커로 변했을 때 머리를 으깨주기로 약속했고, 우습지만 데릴은 아주 만약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글렌은 그저 웃고 말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정말 나를 죽일 수 있었을까, 내 머리에 총을 겨눴을까. 나를 죽게 내버려 뒀을까. 아니면 내가 먼저 죽음을 택했을까 허나 이제는 모두 소용없는 가정들이었다. 너는 죽어버렸고, 나는 너를 죽이지도, 스스로를 죽이지도 못했다.
교도소에서 동쪽으로 두시간쯤 달리다 보면 커다란 마트가 나온다. 이미 쓸만한 건 모조리 쓸어왔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을 해야했다. 마침 워커의 옷 속에 담배가 있었다. 릭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갤 저었다. 데릴은 한 대 피우겠냐는 듯 손짓을 했고 릭은 손을 내저었다. 식량이 아닌 생필품이 목적일 땐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였다. 교도소는 메기가 지키고 있었고, 릭과 데릴, 미숀과 칼이 함께 나왔다. 릭은 칼이 나오는 걸 못마땅해 했지만 미숀이 지키겠다고 하는 말에 고갤 끄덕였다. 식품코너는 거의 비어있었다. 간간이 토마토스프가 든 캔을 구할 수 있었지만 한참 부족했고, 목표는 식량이 아니었다. 겨우내 버틸 옷가지를 챙기고, 샤워용품도 챙겼다. 예전 같았다면 시간 아깝고, 무겁게 무얼 그리 챙기냐고 했겠지만 역병이 한번 돌고 난 후에는 다들 조심스러워졌다. 쓸수 있을까요? 세상이 멸망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여기 남은 것들도 그랬다. 못써도 어쩔 수없지. 데릴이 말하자 칼이 가방에 생필품을 차곡차곡 쌓아 넣었다. 아, 면도크림. 데릴이 선반 아래에 있던 크림을 챙겼다. 칼이 면도하시게요? 하고 물었다. 데릴은 턱을 더듬으며 시익 웃었다. 어른의 사정이란거지. ‘어른’이란 말에 칼이 인상을 썼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조끼 주머니에 면도크림을 넣었다. 또, 그 있잖아요…. 글렌이 말끝을 흘려서 처음엔 짐작하지 못했지만 후에야 콘돔이 몇 개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없을 땐 없는 데로 그냥 했지만 있다면 하는게 서로에게 좋았다. 칼에게 잠깐 챙기고 있으라고 한 뒤 자리를 옮겼다. 근처에 워커가 없는건 이미 확인했고, 칼도 총이 있었으니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커다란 진열대를 지나치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릭? 미숀? 슬쩍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꾸는 없었다. 데릴은 황급히 석궁을 고쳐 쥐고는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다가갔다. 마네킹이었군. 데릴이 석궁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왜 여기에 마네킹이 있지? 옷 진열장은 이보다 한참 위쪽에 있었고, 이곳에 마네킹이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마네킹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검은 티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계절은 겨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네킹은 여전히 세상이 멸망하던 여름이었다. 글렌이 아끼던 셔츠와 비슷하군, 그는 오래전 글렌이 겉옷을 벗어 던지며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글렌 리, 글렌, 글렌.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이름을 중얼거리자 두통이 일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데릴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석궁을 고쳐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 오길래…”
“……그래.”
데릴은 모자를 집어 들고는 칼과 자리를 옮겼다. 슬슬 가보지 않으면 둘이 걱정할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걸음 소리가 울렸다. 칼이 데릴을 슬쩍 바라봤지만 그는 소리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데릴.” 칼이 불렀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데릴!” 칼이 조금 큰소리를 내자 데릴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칼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소리 너무 커요. 그리고 그 모자는 왜 들고 있는 거예요? 그가 아까부터 모자를 만지작거리느라 주변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제게 들게 했으면 그가 주위를 봐주기라도 해야지 처음부터 그러겠노라 하며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숀이랑 갈 걸 그랬어요. 칼의 푸념에 데릴이 미안하다며 모자를 품 안에 넣었다. 뭔데요? 그게. 데릴은 석궁을 고쳐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한번 확인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키드 주려고. 데릴은 입에 습관처럼 배인 그 애칭을 불렀고, 칼은 교도소에 있는 아이들을 떠올렸지만 그 아이들이 쓰기에 저 모자는 너무 크고,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자신은 범위에 넣지 않았다). 글렌 말이야. 데릴이 다시 한번 정정했다. 글렌은 어느 순간부터 모자를 쓰지 않았다. 확실히 모자를 쓴쪽이 더 어려 보이긴 했으나 안 쓴 것도 데릴의 눈엔 마찬가지였고, 이왕이면 쓰고 있는 편이 낫지 않냐고 했다. 햇볕은 뜨거웠고, 늘 피 튀기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모자는 농장에서 잃어버렸어요. 데릴은 더 묻지 않았다.
“글렌? 글렌이요?”
칼이 멈춰 서서 물었다. 데릴이 어서 오지 않고 뭐하냐고 말했지만 칼이 모자를 벗었다. 얼굴에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데릴 잘 들어요.”
칼 역시 글렌을 아주 잘 알았다. 데릴과의 사이도 알고 있었고, 그러니까. 칼 역시 둘을 아꼈다.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이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글렌은 죽었어요. 역병과 함께 사라졌다고요, 시체도 찾지 못했어요!!”
비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알고 있었다. 글렌이 죽었다는 것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글렌이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환영이라도 좋으니 옆에 있고 싶었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기댈 곳 하나 없고, 마음 줄 곳 하나 없는 곳에서!
데릴은 칼의 멱살을 잡고 저벅저벅 마트를 빠져나왔다. 미리 대기해있던 릭과 미숀이 놀라 달려왔다. 데릴은 그들에게 칼을 던져주고는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에 칼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데릴이 환영을 보는 것 같아요. 릭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저 참담함에 고개를 숙였다.
교도소로 오자마자 망루에 올라간 데릴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피곤해. 릭이 소리치자 그리 대꾸했다. 피곤한데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치겠어. 데릴이 머리를 감싸 쥐고는 말했다. 면도라도 하는 건 어때? 설핏, 칼이 그가 면도크림을 챙겼다고 말했다. 데릴은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천천히 망루에서 내려왔다. 길게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잘라내자 시야가 탁 트였다. 깨진 거울 위로 상처투성이 얼굴이 보였다. 글렌이 보면 한소리 하겠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세상이 이 모양이니 사람 하나 미친다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미치는 편이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살아있고 다른 이들이 다 죽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몹쓸 생각도 들었다. 힘을 내요! 데릴! 멀리서 글렌이 소리쳤다. 무얼 위해? 글렌이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데릴 자신을 위해서죠. 데릴이 고갤 들어 뒤를 돌아봤을 때 이미 그는 없었다.
*네가 죽는 꿈을 꾼 이후로 너를 만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릭을 원망하기도 했다. 글렌은 널 살려줬고, 우리 모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내버려선 안 되는 일이라고, 릭을 원망하고 싸우고 화도 냈다. 릭 역시 상심이 컸다. 애틀랜타 생존자캠프에서부터 함께 했던 이였다. 가족이고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은 건 릭도 마찬가지였으나 데릴에게 그리 말 할 수 없었다. 의미하는 바가 달랐으니까. 데릴 정신차려야 해. 릭은 교도소에 와서 처음으로 가족을 잃었다. 소중한 걸 잃고 방황했었고, 한참이나 환영을 보고 악몽을 꿨다. 데릴 역시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눈앞에서 글렌은 자살했고, 시체는 찾을수도 없었다. 유품이랄 것도 없었고, 유언도 없었다. 남길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데릴은 글렌을 위해 한참이나 밖을 헤맸고, 글렌은 꽤 오래 버텨왔었다. ‘왔었다.’ 그 단어가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헤집었다. 우리는 임신한 아내 하나 구하지 못하고, 감기에서 폐병으로 악화된 이들조차 구하지 못했다. 아마, 아니 분명 이보다 더한 상황이 오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지켜야 했다. 릭에게는 칼이 있었다. 허나 데릴에겐? 하나뿐인 핏줄조차 제손으로 죽이고 돌아온 그였다. 그땐 글렌이 있었지. 하지만 이젠 그조차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데릴을 이곳에 눌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황/인/찬-유/사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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