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시즌1의 데릴과 시즌2 중반이후부터의 데릴은 참 많이 차이난다고 느껴요
시즌1에는 도끼들고 난리쳤는데 ^,^)>
역시 덕질 초반에는 좀 갈팡질팡 하는게 있네요, 내용도 캐해석도;
그래도 즐겁게 썼습니다 ^.^)>
+분명 비공개였는데 언제 공개로 돌린건지, 엔딩을 한 세번정도 바꿨습니다 ^^);
자신의 연인에 대해 알아보자. 그는 다정하고, 용감하다. 예전엔 얼굴에 하기 싫어 죽겠다고 써놓고 다니곤 했는데 상황이 악화되자 위험한 일은 도맡아 하곤 했다. 그전에도 사실 그러긴 했다.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는 게 맞고, 그게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되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 꼭 남겨둔 건 아무것도 없고,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말하곤 했다. 그래서 자신과 연인이 되었을 때 그 빌어먹을 버릇들이 조금은 나아지길, 아니 아예 싹 사라지길 바랐다. 어쨌든 데릴은 글렌을 아꼈고, 아무리 상황이 위급해도 글렌을 위험에 내몰 순 없었다.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그러나 데릴은 자신이 죽는다면 글렌 역시 슬퍼할 것을 알기에 스스로를 궁지에 모는 무모한 짓도 하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기분을 그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말하자면, 가족이나 연인이 죽는 걸 더는 보고 싶지도, 당사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데릴에겐 정말 글렌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함께 하는 식구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우선순위가 있었다. 글렌은 분명 강하고, 재빠르고 머리도 좋지만 세상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철창이 무너져 순식간에 워커의 밥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 배신하고 우리를 죽일 수도 있었으며, 탱크를 몰고 와 이곳을 박살 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얌전히 있으면 죽지 않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허나, 데릴은 글렌이 제발 얌전하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특히나 위험한 일에 직면해 있을 때.
“허락할 수 없어.”
글렌의 말을 낚아챈 데릴이 말했다. 다들 고개를 들어 데릴을 봤다. 벽에 기대서서 얌전히 듣고 있는 줄 알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글렌의 뒤로 다가왔다. 그는 대부분의 작전에 불만 없이 따랐으며 이번에도 분명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데릴의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고, 그런 모습을 간만에 본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뒤에서 다가왔기 때문에 데릴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글렌만이 다시 설명하려 들었다.
“다시 말 안 해도 알아들어, 근데 나는 그 작전에 동참 못 하겠어.”
“데릴, 제발요.”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올려다보자 데릴의 기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허나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식량이 떨어져 갔다. 농사를 짓는 일도 한계가 있었고, 사람 입은 늘었으니 당연했다. 근처에 있는 마을은 모조리 돌아봤고, 차를 타고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 위치에 있는 곳은 모조리 수색했다. 이젠 정말 먼 곳까지 나가야 했다. 인원도 최소한으로 해야했다. 위험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글렌이 제안한 건 썩 나쁜 작전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제겐 너무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늘 그랬듯이 워커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글렌에게 있었다. 그는 늘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길 좋아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글렌에게 딱히 반박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네가 위험하잖아, 하고 말하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그 누군가가 자신일 수도 있죠. 하고 웃곤 했으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글렌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
몇 개 남지 않은 담배를 피우며 해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던 데릴이 글렌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들 회의실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되었다. 내일이면 릭과 미숀, 데릴, 글렌은 이곳을 떠나 식량을 구하러 꽤 오랜 시간 바깥 생활을 전전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틀이면 교도소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고 운이 없으면 죽겠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고, 죽는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데릴은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죽을뻔 한 적도 있었고, 죽고 싶은 만큼 괴로운 적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론 살았고,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살고 싶었다.
“난……네 작전이 나쁜 작전이라고는 생각 안 해, 무모하긴 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고,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
“그런데 가끔 답답해.”
찾아낸 대형마트는 워커의 소굴이었다. 도시 전체에 워커가 깔려있었는데 그곳에 특히 많았다. 어떤 머저리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다가 워커들을 거기에 가둬놓기라도 한 것마냥 그랬다. 하나하나 다 죽이자면 끝이 없었고, 큰 소리를 내서 유인하는 것이 방법이라는 글렌의 말에 다들 동의했다. 그런데 왜 워커를 유인하는 역할을 글렌이해야하는 건가. 그것도 자처해서. 여긴 애틀란타도 아니고, 차로 달려도 될 만큼 넓은 도로를 가지지도 못했다. 유인만 하고 돌아올게요. 글렌이 그리 말했지만 다들 탐탁지 않아 했다. 당연했다. 그 많은 것들을 어디로 유인하고 어떻게 돌아온단 말인가. 글렌이 그건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니, 너를 못 믿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분명 우리를 위해 워커를 멀리까지 유인할 것이고, 우리는 안전하게 식량을 확보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 많은 워커들을 데리고 달리고 달리다 붙잡혀 멈출 너는? 세시간이 지나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가요. 그렇게 말하는 네게 내가 어떻게 그러겠노라 말하겠냐는 거다.
“나는 너를 살리려고…발버둥을 치고, 악을 쓰고, 미치겠는데…”
너는 아무것도 아닌 이를 구하고자 사지에 뛰어들고, 몸을 날리고,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것처럼, 몸이 강철이라도 되는 것처럼 워커앞에 나서며, 감기에 걸려 쓰러져 죽을뻔한 주제에 내게 괜찮냐고 옮는다는 이유로 곁을 내어주지도 않았고, 이번엔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시간이 되면 너를 버리라 말한다. 천천히 나열해보니 머리에 열이 올랐다. 화내지 말아야지, 네게 화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가 났다. 누구나 죽을 수 있는 세상이다. 네 작전이 완벽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변수가 너무 많은 세상이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와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각종 역병과 워커들, 심지어 사람들조차 그랬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네 탓이 아니었다. 그런데 너는 누군가 잃는 걸 두려워하고는
“왜 넌 죽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이지?”
정작 자기 자신은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건 정말 아니에요. 데릴,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널 버리고 가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만약에,”
“만약에!”
데릴이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벽에 부딪혀 큰 소리가 나자 글렌이 몸을 움츠렸다. 씨발,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건 데릴 딕슨이라는 아주 오래전에 형과 함께 버렸던 버릇이었다. 화도 잘 내고, 쉽게 흥분하며 맘에 들지 않으면 금세 싫증 냈다. 그런 나를 바꿔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내게 소중한 것이 되었으면, 너에게도 내가 그 비슷한 무엇이라도 되어야지 너는 꼭 언제라도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넌 죽고, 난 혼자 남는다는 상상은 하고 싶지도 않으니 그만둬.”
-
싸웠다고 하기도 민망했다. 데릴의 일방적인 분노에 글렌은 말을 잃고 그저 멀어져 가는 데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데릴이 그렇게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설마 그것이 데릴을 섭섭하게 만들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늘 안달 난 쪽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도 붙잡고 미안하다고,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 않은 건 내일 실행될 작전이 무사히 끝나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릭에게 다시 말하겠지만, 그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다. 무려 데릴도 싫지만 인정했으니까. 그런데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걸리는지.
“옛날 생각나네요.”
글렌이 새빨간 스포츠카를 보며 웃었다. 릭 역시 글렌과 같은 것을 떠올리며 간만에 미소를 띄웠다. 예전에 릭 구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의 말에 릭이 등을 툭 두드리며 말했다. “영원히 잊지 못할 명대사를 남겼지.” 글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잘돼야 할 텐데. 그들은 커다란 화물차 하나와 작은 스포츠카를 가지고 갔다. 글렌이 스포츠카로 워커들을 유인한 다음 그들은 화물차에 달린 냉동탑에 식량을 옮길 것이다.
“조심해야 해.”
릭이 글렌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글렌은 뭐 죽기야 하겠냐며 릭의 등을 툭 쳤다. 화물차 안에는 이미 미숀과 데릴이 타고 있었다. 싫다고, 못 하겠다고 하면서도 결국 데릴은 작전에 참가했다. 글렌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그의 몸이 돌아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됐다. 어색하게 손을 내린 글렌이 릭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릭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글렌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낡아빠진 무전기와 권총 한 자루만이 글렌의 곁을 지켰다. 화창한 날씨였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마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워커들이 스포츠카가 울리는 경적을 따라 모조리 사라졌다. 마트 안쪽에 남아있던 워커는 몇 없었다. 그것들을 때려죽이고 나니 꽤 많은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식량뿐만 아니라 옷과 생필품 역시 챙길 수 있었다. 데릴은 주변을 살펴보더니 작은 손목시계 하나를 발견했다. 글렌에게 준 것은 유리가 살짝 깨져 있었기에 제대로 보지 않으면 시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손목시계도 귀해서 릭과 글렌 말고도 들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것도 언젠가 수명이 다해 멈출 것들이었다. 데릴은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는 릭에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다. 두시간. 데릴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렇게 옮기고 난리를 쳤는데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글렌이 돌아오려면 두시간이 남았단다. 금방도 다섯시간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늘. 데릴은 깨끗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요즘 세상에 담배 피는 녀석들은 다 사라졌는지 어딜 가도 담배는 넘쳐났고, 그건 시간 죽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글렌, 총알이 많지 않아. 신중해야 할 거야. 릭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커다란 도로가 나올 때까지 달리던 글렌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일행을 놓칠지도 모른다. 허나 뒤에는 아직 많은 워커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이것들을 따돌리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었다. 글렌은 하는수 없이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로 차를 꺾었다. 구불구불하고 진흙탕 투성이에 차가 다니기에 적합한 길은 아니었다. 길을 따라 쭉 나아가자 작은 마을이 있었다.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있었고, 불에 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워커 역시 있었다. 젠장, 글렌은 황급히 몸을 돌려 뒤를 봤고 뒤에는 저를 따라 들어온 워커들이 물귀신처럼 차에 달라붙으려 애를 썼다. 앞에 있는 워커의 수가 훨씬 적으니 차로 들이받고 지나가야 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땀이 났다. 워커를 치고 지나가자 속도가 확 줄었다. 앞 유리에 달라붙은 워커를 떼어내려 급하게 커브를 꺾었다. 끼이이익. 귀를 찢는 소리에 글렌이 혀를 찼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따라오는 워커가 하나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일행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져 오자 무전기에서 소리가 났다. 릭이 만약을 위해 주었던 거였다. 글렌, 들려? 데릴의 목소리였다. 시간을 보자 약속 시간이 훌쩍 넘어있었다. 네, 데릴…! 시계를 보며 대답하던 글렌이 황급히 커브를 꺾었다. 아, 젠장. 도로 위에 덩그러니 혼자 서 있던 워커를 순간 사람으로 착각했고 그 대가는 컸다. 차가 뒤집히고 눈앞이 암전됐다.
무전이 뚝 끊겼다. 분명 글렌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굉음이 들린 것도 같았다. 글렌? 글렌! 릭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찾으러 가야겠어. 데릴이 석궁을 들고 일어나자 릭이 어깨를 잡아챘다. 기다려. 그의 손을 쳐내자 그가 얌전히 물러섰다. 지금 다섯시간을 넘게 기다렸어. 릭 너도 글렌을 두고 갈 생각이 없잖아. 세시간이 넘었을 때 데릴은 혼자서라도 글렌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고, 릭은 두시간만 더 기다리자고 했다. 미숀 역시 그 말에 의의는 없었다. 하지만 무전이 돌아왔고, 무언가에 쫓기듯 끊겨 버렸다. 데릴은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만약에, 라는 말도 안 되는 온갖 비참하고,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부터 글렌을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다면 누구 하나는 글렌의 옆에 있어야 했다.
“미숀은 먼저 교도소에 돌아가. 나랑 데릴은 글렌을 찾아 데려갈게.”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릭이 입을 열었다. 미숀은 릭 대신에 제가 가겠다고 했으나 릭이 고갤 저었다. 글렌에게는 빚이 있어서.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이 뒤집힌 채였다. 머리가 웅웅 울려 손을 대니 피가 묻어 나왔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워커에게 물리지 않았는지 몸을 살펴보는데 주변에서 인기척이 났다. 설마, 글렌은 황급히 몸을 추스르고는 총을 확인했다. 품에 있던 권총은 무사했다. 해가 이제 막 졌는지 사방이 푸르스름했다. 안돼, 글렌이 황급히 무전기를 찾았지만 잡히지 않았다. 차는 부서졌고, 여기는 어딘지조차 모른다. 무전 역시 찾지 못했고, 손에는 권총 한 자루에 시간은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아침까지 기절해 아무것도 몰랐거나 죽는 편이 나았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구겨진 차 문을 겨우 밀고 나오려던 글렌의 몸이 우뚝 멈췄다. 밖에 워커가 있다. 그것도 꽤 많이.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귀를 긁는 특유의 워커 소리에 소름이 쫙 돋았다. 철창 안에선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였다. 꽤 많은 워커들을 죽여왔지만 그땐 늘 누군가 함께였고, 손에는 충분한 무기가 있었다. 워커 역시 많지 않았고, 도망칠 구석도 있었으며 몸도 멀쩡했다.
데릴에게 사과하고 올 걸 그랬나. 미안하다고, 죽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고, 그저. 글렌은 권총을 꽉 쥐었다. 아주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당신은 아주 슬퍼할 것이다. 당신의 형을 직접 죽이고 온 날처럼 종일 울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고, 만약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울어 줄 것인가 늘 궁금했었다. 그리고 그건 궁금증으로만 남겨두는 편이 좋았다. 그건 소중한 게 없던 나에게 소중한 걸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죽고 싶지 않았다. 당신과 아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웃으며 살아가고 싶었다.
입안에 구겨 넣은 총구가 서늘했다. 이제 곧 불을 뿜으며 제 머리통을 박살 낼 생각을 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릭이 말한 신중해야 한 다는 건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릭이 제 몰골을 보면 얼마나 아연실색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워커에게 모조리 뜯겨 먹힐 테니 시체도 찾지 못하려나. 그런 슬픈 상상을 했다.
“글렌!”
데릴의 목소리였다. 글렌은 황급히 총을 입에서 빼고는 문 앞에 머리를 들이밀던 워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살았다. 밖에 얼마나 많은 워커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안도감부터 찾아왔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뒤늦게 몰려오는 공포에 글렌이 손을 벌벌 떨었다. 죽을뻔했다. 정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세상이 변하고 나서는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거늘 막상 진짜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게 되니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벌벌 떨렸다. 워커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서 겨우 빠져나온 글렌은 제게 달려오는 데릴의 품에 덥석 안겼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둘 다 차에 타! 빨리! 릭이 소리쳤다.
차는 또 어디서 구했어요? 글렌의 물음에도 데릴은 묵묵부답으로 그의 찢어진 이마에 피를 닦아줬다. 데릴이 어릴 적에 손장난을 좀 많이 쳐 본 모양이야. 대신 릭이 웃으며 대답했다. 글렌은 쉬이 데릴이 차창을 깨고 문을 열어 시동을 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보다 몇 시간이나 그러고 있었던 거야? 릭이 되묻자 글렌이 잠깐 고민하더니 무전을 받았을 때 사고가 났다며 말했다. 무전을 받고 시간을 확인한다고…으악! 글렌이 놀라 소리쳤다. 시계 다 깨졌어요. 손목에 차고 있던 작은 시계는 가죽밖에 남지 않았다. 죄송해요. 얼마 없는 건데.
네가 무사하면 된 거지. 이번에도 릭이 대꾸했다. 이대로 빈집이라도 찾아 쉴까 고민했지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침 훔친 차에는 연료도 든든했고,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이다. 데릴과 교대로 운전하면 아침이 오기 전에는 도착하겠지. 릭의 말에 글렌이 자기도 운전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데릴이 무서운 얼굴로 글렌을 다그쳤다. 넌, 지치지도 않아? 글렌이 대꾸가 없자 그가 몸을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릭이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곧 그도 운전에 집중했다. 그래, 글렌 다쳤으니까 좀 쉬어. 글렌은 결국 몸을 숙이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데릴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글렌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그가 룸미러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더 자라는 뜻 같았다. 글렌은 몸을 당겨 물었다. 옆에 앉아도 돼요? 데릴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잠깐 멈춰 그가 옆에 앉기를 기다렸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글렌이 멎쩍은 듯 말하자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위험하잖아.
“화났어요?”
옆에 앉은 글렌은 몸을 뒤척이더니 영 잠이 오지 않는지 결국 데릴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냥…제가 무모하게 굴어서요.”
“잘 아네.”
“…죄송해요.”
“…….”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글렌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고, 적막만이 내려앉은 차가 교도소 앞에 도착했다. 칼과 미숀이 황급히 달려 나와 문을 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미숀이 글렌에게 말했다. 다들 자고 있으니 제가 보초 설게요. 글렌의 말에 데릴이 발끈 화를 내려다가 ‘데릴이랑요.’ 하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
“보초는 내가 설 테니 넌 자라.”
데릴이 담요를 던져주며 말했다. 차에선 제대로 못 잤잖아. 그는 몸을 획 돌려 밖을 둘러보았다. 금방 전 차 소리에 워커가 조금 모여들긴 했으나 위협적인 숫자는 아니었다. 내일 아침 다 같이 처리하면 될 것이다.
“데릴.”
“화 안났어.”
뒤에서 빤히 쳐다보는 글렌을 애써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까부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계속해서 말을 걸 기회를 엿보고 있는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데릴 날 봐요.” 글렌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타이르자 그는 긴 숨을 내뱉으며 글렌을 돌아봤다. 여전히 몸은 밖을 향한 채였고, 언제라도 글렌을 등질 수 있다는 듯한 모습에 허탈하게 웃은 글렌이 말했다. 저 사실 아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저 사실 워커한테 물렸어요.”
“어디 봐,”
그가 황급히 석궁을 내려두고 글렌에게 다가왔다. 어찌나 순식간이었는지 뒤로 주춤 물러난 글렌이 팔을 들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글렌의 얼굴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옷을 걷어냈다. 대체 어디야, 어디에 물렸냐고! 그가 소리를 지르자 글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걸 꼭 찾아야 해요? 물린 사람이 대체 누군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글렌은 이상하게 여유로웠고, 데릴은 초조했다. 얼른 물린 상처를 봐야 했다, 그러면.
“데릴, 제가 물리면 죽여주기로 했잖아요.”
“…….”
“그냥 죽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너…”
데릴의 손을 뿌리친 글렌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까만 눈동자가 그 무엇보다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약속했잖아요.” 지금 글렌은, 자신의 연인은 강요를 하고 있었다. 상처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말만 듣고서 저를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다른이였다면 망설임 없이 쏴 죽였을 것을 데릴은 그러지 못했다. 거짓말. 데릴이 중얼거렸다. 물렸다는 건 거짓말이지 키드. 애써 말을 돌리려고 하자 글렌이 생긋 웃었다. 네, 농담이에요. 그는 윗옷을 벗으며 말했다. 바지도 벗어요? 그가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거는데 순간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잠깐, 글렌. 데릴이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내가 너무 피곤하고, 잠을 자지 못해서 꿈을 꾸는 건가? 헛것을 보고 있나? 그제야 글렌이 웃음을 터트리며 데릴에게 다가왔다.
“진짜 농담이에요, 데릴. 저 워커한테 안 물렸어요.”
그 말에 안도와 함께 지독한 배신감이 몰려왔다. 지금 그런 걸 농담이라고…! 그가 소리치자 글렌이 손을 붙잡아왔다.
“운이 좋았어요.”
“글렌.”
“이번엔 진짜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 못 해요, 데릴 전 죽을 뻔 했어요, 자살하려고 했죠.”
당신에게 못난 모습을 보일바에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거든요.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데릴은 당시 글렌의 상황을 모른다. 차가 뒤집어지고, 워커가 달라붙고, 자살을 결심해야 했던 단 몇 분간의 글렌을 데릴은 보지 못했다.
몇 시간을 기절해 있었는데 워커한테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는 건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못 해요. 글렌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만약에, 있잖아요 데릴, 아주 만약에… 내가 정말 워커한테 물리거나 긁히면 이렇게 무기를 버려두고 오면 안 돼요. 위험하잖아요. 손에 얼굴이 닿았다. 이내 글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데릴의 손등에 하염없이 이마를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키드, 많이 지쳤구나.”
데릴은 글렌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없었다. 너를 죽인다거나, 죽여줄 거라는 약속을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너는 살아있고, 내 앞에 있었다. ‘만약에’라는 의미 없는 가정을 데릴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거짓 약속이 아무리 위안이 된다고 하더라도 데릴은 할 수 없었다. 대신 잠이 들 수 있게 어깨를 빌려주는 건 할 수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아직 춥고 그건 병에 걸리기 좋았다. 옷을 입히고, 담요를 둘러주고 어깨를 빌려주자 그는 금세 잠에 빠졌다. 데릴은 글렌의 머리에 기대, 밖을 바라봤다. 해가 뜨고 있었고, 하루가 오고 있었다. 종말의 아침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네가 있는 지금은 아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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