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데 시즌5 파이널까지 보고 쓴 글입니다.
투명하고 얇은 유리 벽 하나를 두고 사람이 종이짝처럼 뜯겨 나갔다. 피부는 갈가리 찢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나왔다. 근육과 뼈, 내장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건, 그간 간신히 사람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던 우리들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과정이었다. 쩔뚝거리던 다리로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환하게 미소짓던 이의 얼굴이 글렌의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저는 살 거예요, 살아남을 겁니다.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보란 듯이 살아남아 언젠가 베스에게 보여줄 거예요…. 그때 나는 뭐라고 했었지? 글렌은 자기가 점차 작아진다고 느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늘 도움만 받으며 누군가의 희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 또다시 살아남았다는데 밀려오는 죄책감과 동시에 깊은 안도. 그 길로 달려가 니콜라스를 때려눕힌 글렌이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피와 얼룩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은 눈물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도 됐다. 기절한 니콜라스를 차에 던지듯 태우고는 말한다. 출발해요. 저를 보는 유진의 눈이 그를 죽이라고 하는 것 같아 부러 모른 척 고개를 푹 숙였다. 노아는? 하는 말에 글렌은 덤덤히 말했다.
“죽었어요.”
-
“어떤 건 죽여도 되고, 어떤 건 죽이면 안 된다고 정한 기준이 뭐지?”
데릴이 의자에 푹 기대 창밖을 보며 물었다. 교도소 주변을 팀을 이루어 몇 주에 걸쳐 순찰을 나가곤 했다. 위험한 놈들은 잡아 오고, 좀비가 몰려있으면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 식량이 있으면 구해오고, 그 정도의 일이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데릴과 함께니 산책 정도의 기분이었다. 글렌은 이렇게 둘이 나가는 것도 오랜만이지 않냐며 선뜻 운전대를 잡았다. 글렌은 힐끗 데릴을 한 번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와서 그게 궁금해요?”
“……그냥, 네 말대로 단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잖아?”
그는 불량한 자세를 고쳐잡고는 말한다.
“바빴으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글렌은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딱히 기준을 정해놓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말해줄 정도로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마음 가는 데로…. 라고 말한다면 데릴은 그래서 어린애라는 거라며 또 애 취급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다.
“살아있고, 우리에게 위협이 가지 않으면 일단…… 두고 보는 거죠.”
“살아있다는 기준은?”
글렌은 운전을 해야 했기에 데릴을 돌아보지 못했다.
“워커만 아니면 되지 않을까요.”
숨을 쉬며,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다.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하고 하하 웃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데릴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중얼거린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나?”
-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바빴지. 인간답게 살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워커의 내장을 뒤집어쓰고, 온몸에 피 칠갑을 하면서 죽은자들의 가운데를 걸어가는 짓을 스스럼없이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의 형도 버리고, 아직 워커로 변하지도 않은 이를 길바닥에 내버려 두었으며, 자살을 택하는 이들을 말리지도 못했다.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누군가는 내게 강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다정하다고 했지만 나는 강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도망치는 것뿐이어서, 겁쟁이라서 살아남은 거였다. 릭이 그랬잖아요, 베스를 죽인 인간에게 총을 겨눈 그 순간 저 사람을 죽여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고.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겁쟁이여서 저 비겁한 놈을 죽이지 못했다.
“저놈 때문에 노아를 잃었는데도 죽이려던 그 순간에…놈을 죽인다고 해서 노아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게다가 알렉산드리아 사람이 둘 다 죽어서 온다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결국 저는 제가 살고 싶어서 놈을 죽이지 못한 거예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데릴이 석궁을 들고 일어섰다.
“내가 죽여줄까.”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데릴의 말은 질문도 아니었고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올 것만 같았다. 당장 그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릭은… 말리지 않았다. 침묵만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몇 분. 그 몇 분 사이 데릴이 마음을 굳혔는지 발걸음을 옮기자 눈물 섞인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제발 데릴, 그러지 말아요…제발…”
제발……. 글렌은 울지 않으려고 했다.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장서야 할 일이 많아지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고,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 이후부터 일행들 앞에선 울 수 없었다. 감정은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제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데 살아남기 위해선 그것을 모두 이겨내고 걸어야 했다. 걷고, 또 걷고 있으면 뒤에야 알아차린다. 이건 살아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흐르지 못한 감정들이 다시 고여 글렌의 몸을 짓누른다. 깊고 먼 미래를 상상하다보니 머릿속이 최악의 미래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누군가를 흉내 내는 목소리에 머리는 뜨거운데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조금 더 이러고 있겠다는 말에 릭과 데릴이 자리를 비켜준다.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진짜 죽이지는 말고.”
데릴이 피식 웃는다.
“그건 저 꼬마 위로해주려고 한 말이고.”
“반은 진심이었잖아.”
릭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말한다. 언제나 반은 진심이었지. 데릴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린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어!!”
데릴의 발이 니콜라스의 콧대를 짓밟았다.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돌리자 이번엔 어깨를 강타했다. 등과 허리, 다리까지 분질러놓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몇 번을 더 발로 차더니 바닥에 침을 뱉고는 석궁을 들었다. 글렌의 상처를 살피던 애런이 말리지 않았다면 진즉 니콜라스의 머리는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데릴을 붙잡다 그만 그의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은 애런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살아있어요, 숨은 쉽니다.”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던 도중 총소리가 울렸다. 사방에 있는 워커를 다 몰고 올 심산이군! 데릴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허나 발은 이미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째서? 최근에 일행이 방황 해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몰려올 워커가 걱정돼서? 혹은 저 총소리가 글렌이 아니었으면 해서? 데릴은 쉽게 답을 내릴 수 없었고, 총소리의 주인이 글렌만 아니었으면 했다. 데릴이 상상하는 최악은 뭔데요? 글렌이 물었을 때 데릴은 애써 고갤 저으며 말했다. 난 그딴 상상 안 해. 교도소를 거점으로 시작해서 네 방향으로 전진 캠프를 마련해뒀었다. 멀리 갔다가 교도소까지 돌아오기 힘들 때, 시간이 늦었을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곳은 꽤 요긴하게 쓰였고, 둘은 교대로 잠을 자면서 서로를 지켰었다. 그날은 유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단둘이 나오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런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글렌도 마찬가지였는지 계속 말을 걸어왔다. 꼬마, 네가 상상하는 최악은 뭔데? 글렌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릭도 죽고, 데릴도 캐럴도 죽고…미숀도 메기도… 모두 죽고 저 혼자 살아남는 거요. 재수 없게 죽긴 누가 죽어? 데릴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글렌이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린다. 쉿. 하며.
“이거 총상이에요, 돌아가야 합니다.”
애런이 가방 안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더니 글렌의 머리에 두른다. 출혈은 많지 않아도 충격이 컸을 겁니다. 석궁을 내려 잡고 반대쪽 어깨로 글렌을 부축하자 애런이 돕겠다며 나머지 한쪽을 잡아 온다. 데릴이 치우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고갯짓으로 니콜라스를 가리킨다. 저 새끼나 데려와. 애런이 농담하는 거죠? 하고 웃었건만 데릴의 얼굴엔 웃음기는커녕 감정마저 없는 것처럼 무표정하다. 데려와. 앞장서는 데릴을 보며 애런이 인상을 구기며 니콜라스를 부축해 끌고 간다.
왜 살렸죠? 내버려 뒀으면 죽었을 겁니다, 저도 모른 척 했을 거고요. 그는 예전부터 골칫덩어리였어요. 글렌을 메기한테 맡기고 단둘이 되자 애런이 따지듯 물었다. 데릴은 찬물로 얼굴을 씻어낸 후 눈 밑을 꾹 누르며 애런을 바라봤다.
“꼬마라면 살렸을 테니까.”
애런은 그가 말하는 꼬마가 글렌을 칭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만약 당신이 총에 맞았어도요?”
“……죽지 않았으면 그랬겠지.”
“냉정해져야 한다고 했던 건 당신들입니다.”
그건…변명할 여지가 없군. 데릴이 소파에 몸을 푹 기대앉았다. 지금쯤 글렌은 정신을 차렸을지도 모른다. 메기가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어보면 워커에게 쫓기다가 총알이 튀어서 그랬다고 변명을 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사람이 일부러 쏜 것이며 니콜라스의 상처 역시 사람에게 얻어맞은 거였지만 워커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치다가 굴러떨어졌다고 했을 것이다. 글렌이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연인이, 릭이 속아주는 것인지도 모른 채 잘 속였다며 생각하겠지.
-
“데릴이 상상하는 최악은 뭔데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
운전대를 잡은 데릴이 글렌을 돌아본다. 운전에 집중해요. 데릴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데 뭐 어떠냐며 말했다.
“그냥…심심하잖아요.”
안 심심하게 해줘? 데릴이 핸들을 꺾으려 하자 글렌이 손사래를 친다. 됐어요! 그러곤 창밖을 본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지루하고 때때로 위험하다. 지루하고 심심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좋은 말이 어딨겠는가. 평화롭단 뜻이니까, 지루함을 느낀다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최악의 상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전 세계가 희망도 빛도 남아있지 않는다는 상상, 더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상상을 아주 옛날에는 했었다. 그 언젠가,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었을 때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빴고 인간답게 살기 바빴으며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 최악의 최악. 굳이 상상할 필요가 있나? 현실은 아주 가끔 희망적이었고 대부분 절망적이었다.
“굳이…말하자면 죽는 거겠지, 워커가 되거나…”
“데릴 앞! 앞!!”
쿵! 워커 하나가 차에 치였다. 그대로 밟고 넘어가자 온몸으로 진동이 느껴진다.
“운전할 땐 앞을 봐야죠!”
“사람이 아닌 게 어디야.”
“데릴!”
“차 안 고장 났으니 됐잖아.”
글렌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젓는다. 이내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썩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차가 교도소에 도착하고 물품을 내려놓는다. 한숨 쉬는 게 좋겠다는 말에 데릴이 기다렸다는 듯 제 침대에 가서 눕는다. 아까의 일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도통 잊혀지지가 않는다. 젠장!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푹 처박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을 돌리지 않자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데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익숙해서 괜히 잠든 척 눈을 감는다.
“아까 화낸 건……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안일했죠. 너무 낙천적인 것도 맞아요. 그래도……그냥, 있잖아요 데릴……”
“……”
“저는 데릴도 저도……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랬어요, 지금 세상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게…… 언젠가 원래대로 돌아갔을 때 어색하지 않도록……”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이로 잡아 뜯어 엉망진창인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낸다.
“우리 너무 익숙해지지 말아요. 포기하지도 말고……”
끝끝내 돌아보지 않는 데릴을 향해 글렌이 쓸쓸한 얼굴을 한다.
“같이 살아남아요……”
내가 너를 좋아한 이유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나는 책을 잘 읽지도 않았고 공부를 하던 것도 아니어서 마음만큼 멋진 고백을 할 수가 없었다. 데릴이 접한 매체라고는 영화와 만화가 전부였고, 사랑을 꽃에, 달과 해에, 별과 은하수에 비유하던 게 다였다. 나는 그렇게는 하지 못해. 데릴은 망루에 앉아 어두운 숲을 내려다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숲. 그 위로 반짝이는 작은 별들. 그거 알아? 세상이 멸망의 길을 걷는 순간 별이 많아졌어. 더 밝아졌지. 데릴의 말에 글렌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방긋 웃었다.
“어쩌면 지구에겐 우리가 워커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죠.”
“꽤 잔인한 말이네, 꼭 지구가 우릴 죽이려고 덤비는 것 같잖아.”
그럴지도 모르죠. 글렌이 제법 두꺼운 담요를 들고 와 어깨에 걸친다. 안에 있으라니까. 데릴의 말에도 듣지 않는다. 한소리 하려고 했건만 글렌이 고개를 어깨에 기대며 말한다. 파트너도 내일이면 끝이네요. 결국 입을 다물고 만다.
“데릴이랑 있으면 편하다고 해야 하나, 꼭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긴장을 풀게 되는 것 같아요…”
긴 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감는 글렌을 보며 데릴이 헛기침을 한다. 어깨가 들썩이자 불편했는지 이마를 비비며 옆에 꼭 붙어온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자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뭐…… 너 하나 정도는 내가 감당할 수 있지.”
“말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진짠데.”
어깨를 누르고 있던 작은 온기가 서서히 멀어진다. 글렌이 고갤 들어 철망 밖을 바라본다.
“…고마워요.”
그건, 아무리 바보 천지에 머저리인 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완곡하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녀석의 어깨를 붙잡아 당겨 안았다. 차라리 이마저도 뿌리쳤으면 좋았을 걸 너는 저항도 하지 않고서 옆을 내어줬고, 덕분에 나는 마음을 접지도 못하고 펼쳐두었다가 누군가 밟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허나 지나가는 족족 발자국은 같은 모양새였다. 빠르고 좁은 보폭으로 조심성이 많은 발자국이 여러 개. 밟고 지나갈 때마다 너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라고 하며 웃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밟히면 밟히는 족족 따라가 잔소리를 해주었고, 때때론 네가 나를 쫓아와 한소리를 하기도 했다. 포기하지 마요. 우리, 함께 있어야 해요. 나는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주던 아이를 지키지도 못했고, 나를 위로해주려던 이가 납치당하는 걸 멍청하게 지켜봐야 했으며 죽을 위기에 처했던 너 역시 번번이 구해주지 못했거늘 너는 내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매번, 매 순간.
-
“그놈은 내가 데려오자고 했어.”
주황색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는 방안에 글렌이 누워있었다. 잠이 들었건, 단순히 휴식을 취하는 중이건 상관없었다.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앞에 앉자 말간 얼굴에 잔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알렉산드리아에 있고 싶다고 했지. 더는 떠돌아다니고 싶지 않다고,
데릴은 이곳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모두가, 글렌이 이곳에 남고 싶다 한다면 기꺼이 따를 것이다. 함께여야 했으니까.
데릴은, 우리가 아니라면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은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면서 생겨났고, 계속해서 친구가 동료가, 가족이라 믿었던 이가 죽어 나갔다. 만약 네가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당장 애런의 양다리에 총알을 박아주고 니콜라스의 목을 베어 이곳의 주인 앞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릭은 망설이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복수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고,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 속이 이걸로 후련해질 수 있다면……. 내가 처음부터 그 아이를 잘 지켰더라면, 내가 그 아이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강했더라면 어린애처럼 굴지 않았더라면! 글렌의 손을 꽉 붙잡고 머리를 푹 숙인다. 복수해서 속이 시원했냐면 전혀,
데릴은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왜 죽였냐며 그 애가 뭘 잘못했길래 죽어야 했냐며,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널 죽이려던 놈이었는데…”
그놈은 널 다시 죽이려 들 것이다. 언젠가 너를 사지로 내몰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살려왔다.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도 했다. 눈앞에서 노아를 죽게 만들고 동료조차 모른 척 내뺐던 놈이다. 너를 죽이려고도 했으니 모든 복수는 네 손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런데 너는 복수하지 않겠지? 죽이려고 했다면 진즉에 죽였을 것이다. 화가 나고 눈물이 터져도 해서는 안돼는 일이 있는 법이지, 그렇지 글렌? 대답이라도 하듯 글렌의 손등이 뺨에 닿았다.
“괜찮아요…, 데릴 탓이 아니에요.”
“……”
“내가 약한 탓이지…우리가 약했던 탓이지, 데릴의 잘못이 아니야.”
아니다, 세상이 너무 악했던 탓이지 네 탓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은 허기에 우리를 뒤쫓고 살아남은 자들은 욕심에 우릴 죽이려 한다. 단지 그뿐인 세상에…. 글렌의 손등에 입을 맞춘 데릴이 고개를 다시 푹 숙인다. 눈시울이 뜨겁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데릴.”
“…너 하나 정도는 감당해준다고 했잖아.”
글렌이 작게 웃는다. 그게 아직도 유효하냐는 말에 당연하다며 큰소릴 친다.
-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나, 하루를 연명하는 게 전부고, 당장 오늘 밤 누군가 저 벽을 뚫고 들어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르며, 워커가 된 친구가 내 다리를 잡아 뜯을지도 모르는데. 내일은 주변을 탐색하러 나가야 하고, 다음날은 식량을 구하러 나가지만 목숨을 부지 못할 수도 있는데, 꼭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구는데.
“…어, 적어도 저랑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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