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말하자면 네가 죽는 거겠지, 네가 워커가 되거나… "
사람을 죽였다. 그건 워커를 죽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따뜻한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날카로운 날붙이 끝으로 죽어가는 이의 고동이 느껴졌다. 나를 노려보는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두 눈 밑으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커다란 손과 발이 내 몸을 마구 강타했지만 나는 무게를 실어 화살을 더욱 밀어 넣었다. 때 묻은 옷 위로 피가 흘러넘쳤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눈이 감기며 손과 발에 힘이 빠졌는지 사방으로 푹 퍼졌다.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데릴은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곤 제 뒤에 쓰러져있는 이를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어?" 금방 사람을 죽인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글렌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 있어, 옷을 찾아볼 테니까."
데릴은 담요를 던져주며 말했다. 따뜻한 차라도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데릴은 2층으로 올라가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젠장, 머저리 같으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는 방을 살펴 보았다.
베이스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정찰을 나왔다. 다행히도 마을에 워커는 없었다. 그 덕에 방심하고 만 거다. 사람마저 없을 거라고. 텅 빈 마을에는 한차례 허리케인이 휩쓸고 간 듯 나무가 쓰러져 있었고 차들이 뒤엉켜있었다. 집 유리창도 죄다 깨져있었고, 이미 누가 다녀간 거 아닐까요. 하는 글렌의 말에 데릴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차피 이 이상은 못가니까 여기만 확인해보고 돌아가지." 그리고 둘은 각자 다른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 있으면 무전치고. 데릴은 무전기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고, 글렌은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한 거 아니야." 데릴의 말에 글렌은 소리내어 웃었다.
걱정이라. 데릴은 빈집 찬장을 열어보며 글렌을 생각했다. 강하고 현명하며 재빠르고 착한 글렌. 음, 조금만 덜 착했으면 좋았을 텐데. 데릴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글렀군. 그러던 중 굉음이 들렸다. 조끼 주머니에 넣어뒀던 무전기는 고요했다. 불길한 예감이 데릴을 엄습했고, 다시 한번 커다란 소리가 데릴을 덮쳐왔다. 젠장, 글렌! 데릴은 들고 있던 걸 던져버리곤 글렌이 들어간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살아있는 사람. 워커도 다른 괴물도 짐승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글렌을 덮쳐왔다. 커다란 몸으로 글렌을 짓누르고 들고 있던 총을 멀리 던져버렸다. 무전기가 그의 발밑에서 굴러다녔고 몸만큼 커다란 손이 글렌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처음에는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했다.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만나게 돼서 반갑다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글렌에게 속삭였다. "식량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그의 손이 글렌의 뺨을 때렸다. 몇 차례 후려갈긴 후에 글렌이 조용해지자 웃으며 몸을 일으킨 그때 글렌이 빠르게 그의 몸을 밀어 넘어트렸다. 총, 곧바로 총을 잡은 글렌이 그에게 총구를 겨눴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고 그는 몸을 벌벌 떨며 글렌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미안하다. 내가 너무 오래 굶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정말 미안하다."
괴물이 나타나고 허리케인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된 이후로 쭉 혼자였어…. 글렌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풀리고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혼자 지냈을 그를 상상했다. 그는 타인이야! 느슨하게 굴지 마! 하는 목소리와 동시에 외롭고 배고팠을 그를 생각하면, 글렌이 입안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그는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워커가 아니었다. 사람을 잡아먹고 싶다고 했지만 오랫동안 굶었으며, 만약 식량이 남아 있었다면 사람을 먹지 않았겠지. 이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안다. 글렌이 총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젠장, 울어 버릴 것 같아. 그 찰나, 아주 순식간에 그가 다가와 글렌의 턱을 발로 걷어찼다. 천지가 뒤흔드는 고통이었다. 입안이 터져서 피 맛이 났다. 몸이 휘청거리다 바닥으로 쓰러짐과 동시에 총을 놓쳤다. 젠장, 기절하면 안 돼, 기절하면 안 돼. 글렌은 고통 속에서도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네가 ……아이라 다행이야."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목을 조르고 옷을 벗기려는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보고만 있었다. 눈을 감으려던 순간 날아온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혔고…….
"해가 졌어."
데릴이 초에 불을 밝히며 말했다. 당장 그 집에는 쓸만한 게 없어서 다른 집으로 옮겨왔다. 시체도 있었고…. 글렌은 데릴이 구해온 끓인 물을 홀짝였다. 초가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흡연자라는 것도 한몫했고. 끓인 물을 담은 스텐 컵을 뜨겁지 않게 수건으로 돌돌 말아 글렌에게 건네준 그가 담배를 물며 얘기했다. 라이터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이곤 글렌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안 괜찮다고 해도 필 거잖아요…. 글렌의 대꾸에 데릴이 웃는 얼굴로 받아쳤다.
"말대꾸 하는거 보면 몸은 괜찮은가 보군."
"처음부터 괜찮다고 했잖아요."
"시끄러워."
네 꼴을 봐. 입안은 터져서 피가 철철 흐르지 턱은 시퍼렇게 멍들었지 한쪽 귀는 잘 들리지도 않잖아. 데릴의 걱정어린 잔소리에 글렌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요…"
"그래……"
웬일로 글렌의 말에 수긍한 데릴이 손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글렌의 꼴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발견했을 땐 더했지, 턱은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었고, 이마와 입술은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뿐인가? 바닥에 잘못 부딪친 한쪽 귀는 잘 들리지도 않고, 목은 졸려 호흡도 불안했으며 멍 자국도 남았다. 글렌은 미처 멍 자국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선 계속 만지작거렸다.
"꼬마, 나는 네가 약한 놈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머리도 좋고…재빠르고, 판단력도 좋지. 게다가 총도 들고 있었잖아. 그래서 혼자 보낸 거야. 네 몸 하나는 지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답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였다.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랬다면 글렌 역시 화를 내고 말았을 테니까. 그러다가 적당히 말을 받아주고, 아침이 오면 교도소로 돌아가, 적당히 화해하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을 테니까…
"왜 망설였지?"
처음에는 워커가 그를 덮친 줄 알았다. 급히 쏜 화살이 어깨에 빗맞으며 그것이 비명을 지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비명과 함께 돌아본 그것은 사람이었고, 그 뒤에 있던 글렌의 모습은 처참했다. 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겠더군. 데릴은 그날을 회상하며 그리 말했다. 눈앞에 시뻘겋게 변해버리는 거 말이야. 너는 아직 겪어본 적 없겠지. 형을 내 손으로 죽여야 했을 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었는데, 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열이 쫙 오르더군. 데릴은 술이 들어가면 종종 옛날얘기를 해주곤 했는데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러는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지 글렌은 알 수 없었다.
"…사람이었잖아요."
데릴의 한숨이 글렌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소리가 두 번 났어."
"……대화로 해결해보려고 했어요."
글렌이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았다. 목이 아픈지 연신 목을 만지작거린다.
"…그는…굶었다고 했어요. 오랫동안…혼자였다고…"
"……."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잖아요."
이…, 강하고 현명하며 재빠르고 착한 꼬마는 그래서 망설였을 것이다. 그가 아직 우리와 같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혼자였고 몹시 굶주렸다는 얘기 때문에, 그 공포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사람을 먹는다고 해도?"
"…미안해요."
사과를 듣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너를 울리고자 꺼낸 말도 아니었고, 윽박지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다만,
"걱정했잖아…"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글렌이 물었다. '데릴이 상상하는 최악은 뭔데요?'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굳이…말하자면 죽는 거겠지, 네가 워커가 되거나…' 때마침 워커 하나가 차 앞에 뛰어들어 너는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
"왜? 나는 네 걱정하면 안 되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저를 보는 글렌을 보며 데릴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뇨, 그냥…기뻐서요."
데릴은 술이 들어가면 종종 옛날얘기를 해주곤 했는데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러는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는지 글렌은 알 수 없었다.
"꼭지가 돌아버릴 것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겠더군."
"그만 해요…"
"듣기 싫으면 나가면 되잖아."
할 말이 없어진 글렌은 술로 입술만 적셨다. 누구 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네가…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새끼를 죽이지 않고선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어."
"…전 살아있잖아요."
"…맞아. 그놈은 죽었지만. 아직도 내가 그놈을 죽인 게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해가 뜨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그대로 돌아가기엔 뒤가 구리다는 데릴의 의견 때문이었다. 글렌은 보고 싶지 않아 했지만 데릴을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제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 거란 확신도 없었고. 그 집에는 사람의 뼈와 시체가 가득했다. 진짜 사람을 먹은 것이다. 워커가 아닌 사람을. 데릴은 욕을 했고 글렌은 고개를 돌렸다. 그 일은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다.
"살려뒀으면 해가 됐을 거예요."
비록 데릴은 진실을 알기도 전에 그놈을 죽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글렌은 데릴이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분노로 그놈의 가슴에 날붙이를 밀어 넣는 모습을, 그리고 제게 다정하게 손을 뻗는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겠지.
"고마워요 데릴,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뭐 어때, 네 부탁이라면 몇 번이고 들어줄게."
"그럼 전 위험한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요."
그가 피식 웃더니 커다란 손으로 내 가슴팍을 툭 친다.
"good boy."
그건, 아무리 눈치 없고 겁쟁이인 나라도 알아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다정한 눈이었다. 나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술로 입술을 적셨다. 아,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데릴이 툭 쳤던 가슴팍 위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불에 덴 듯 아팠고,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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