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남지 않았어. 지시자가 그렇게 말했다. 아이작은 알았다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작, 지시자가 고개를 빼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지시자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나는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있는 지시자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어두운 이곳은 빛 한점 비추지 않았다. 그래도 지옥은 아니라는 것을 떠올리며 타오르는 불 너머 자신의 전우를 바라봤다. 나는 괜찮아. 아이작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 * *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하얀 조각이 지시자의 품에서 나왔다.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 양손으로 꼭 쥐어 에바리스트에게 내민 지시자는 퍽 괴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잠시 고민하는듯 했지만, 그 조각은 이내 에바리스트의 품속에서 사라졌다. 녹아들어 간 것이다.
억센 비명과 함께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에바리스트를 아이작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 아이작. 그렇게 부르는데도 아이작은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도 겪어야할 관문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지시자는 아이작에게 종종 다가오더니 귓가에 무언갈 속삭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알겠어. 지시자, 아이작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가는 지시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곧 에바리스트의 비명이 멈췄다.
“어땠어?”
“묻지 말아줘”
그 하얀 조각- 그러니까 케이오시움은 누군가의 기억, 생명과도 같았다. 누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이작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마 생전의 기억은 물론이고 성유계에 와서의 기억도 모조리 빼앗겼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잔인한 처사였지만 그 정도 대가도 없이 부활이라는 것은 말도 안되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시자는? 그렇게 묻는 에바리스트에게 아이작은 모자를 챙겨주며 말했다. 교관들이랑 탐색. 아직 조각하나가 부족한가 봐, 말까지 덧붙여 가며 말이다.
“에바, 우리 산책갈까?”
“...위험해”
“이 근처면 몬스터도 없고”
“지시자 허락도 없이 돌아다니면..”
“마지막이잖아.”
* * *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줄 알았어.”
앞서 걸어가는 아이작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조금 긴장이 풀린 것인지 에바리스트는 그 등을 빤히 쳐다보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영원이란 건 긴 시간이지. 아이작”
“하지만 결국 죽어서도 다시 만났잖아?”
“뭐, 죽음도 우리 둘을 갈라놓을 수 없었다. 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에바리스트의 말에 아이작이 입술을 삐죽였다. 맞장구 쳐주면 어디 덧나? 많이 컸다. 아이작? 그 말에 금방 깨갱 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처음 지시자와 만난 장소. 세계수가 있는 곳.
커다란 나무가 둘을 반겼다.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이 장소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나무’였다. 에바리스트는 아이작의 짓궂음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하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랬다. 이번엔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 금발을 빤히 바라봤다. 너까지 이곳에 올 필요는 없었는데. 자신이 처음 아이작을 만났을때 했던 소리였다. 하지만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아이작”
뒤돌아 있는 그를 불렀다.
“응”
많이 컸다고는 하나, 둘의 기억은 어릴 적에 멈춰있었다. 썩 좋은 인생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이작은 뒤돌아 에바리스트를 마주 봤다. 모자를 벗어 만지작 거리던 에바리스트는 자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아이작에게 모자를 씌워줬다.
“고마워.”
“....응”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에바리스트는 아이작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끌어안은 몸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눈앞은 눈부셨다. 에바리스트는 언젠가 아이작을 보며 태양같다고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이 지옥 같은 곳을 버텼어”
“응”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케이오시움이 되는 자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에바리스트는 뺨에 느껴지는 살결에 고개를 들었다.
“울지마 에바.”
“....아이작”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응. 꼭 다시”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에바리스트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허공이어야 할 아이자크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줄 알았다. 에바리스트는 안경을 벗곤 눈을 비볐다. 레온이 그 모양을 보더만 우스갯소리로 안경 바꿔야 할 때가 온거 아냐? 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현실적이었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으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형상이 눈에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분명 비웃음 당할께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자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바리스트는 대답대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아이자크는 벌벌 떨리는 손을 바로 하며, 검에 묻은 붉은 피를 닦아냈다. 하얀 장갑이 금새 더러워졌다. 칼날이 검집을 통과해 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전에서 보통 검은 잘 쓰지 않았건만, 어째선지 이번에 에바리스트가 그에게 검을 쥐어줬다.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질꺼야,
대체 무엇을. 열띈 환호속에서 아이자크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면 거기엔 항상, 반드시 에바리스트가 자신의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이자크 자신이 자각할 정도로 쿵쿵 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무엇 때문일까, 자신을 보는 에바리스트 때문일까 아님 전장의 열기 때문일까, 사람들의 환호소리에도 심장소리는 묻힐 생각조차 하지 못한채 쿵쾅거렸다. 아직도 등에 열기가 가득찼다. 손에 땀이 났다. 다시 뒤를 돌아보면 더 이상 에바리스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심장은 쿵쾅 소리를 냈다.
“아이자크”
연락도 없이 찾아온 에바리스트에 화들짝 놀란 아이자크가 들고 있던 군화를 툭 떨어트렸다. 그 모양새가 퍽 웃겼던지 에바리스트가 피식 웃더니 그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풀썩 앉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군화를 다시 집어든 아이자크가 침대 한 구석으로 밀어넣을 때 까지 에바리스트는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군화정도는 다시 줄 수 있다고”
“...그냥 닦고 싶어서 그래”
“그럼 계속 해”
자신의 말이 끝나자 마자 군화를 집어든 아이자크를 보며 흐음, 하고 그 어깨에 기대었다. 근데 아이자크, 언제부터 군화닦는걸 그렇게 좋아했어? 그렇게 물어보면 움찔하는 어깨에 에바리스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자크. 그렇게 불렀다. 손을 가져다 가슴에 대자 쿵쾅거리는 심장이 느껴졌다.
팔에 피묻었어, 걷어올린 상의위로 손을 가져다 닦아냈다. 군화를 닦는 하얀 천에는 거뭇거뭇한 흙먼지와 함께 피가 섞여 있었다. 무엇을 그렇게 닦아내고 싶은건데,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발끝을 멍하니 쳐다보며 일어섰다.
“오늘은 잘했어, 다음에도 부탁할게”
“....에바...”
아이자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본 에바리스트는 웃으며 뒤돌았다.
“다음번엔 내 군화도 부탁할게”
“응!”
*
그 뒤로 아이자크가 에바리스트의 군화를 닦아줄 일은 없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에바리스트 없는 전장으로 나간 아이자크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봤다. 이제 총의 감각이 아득해져 검이 아니면 사람을 벨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여전히 흰 장갑으로 검을 닦아내고 돌아가면 군화를 닦아냈다. 그 뒤로 군화는 몇 번이고 닦아내고 닦아냈다.
“...”
군화가 또 더러워졌다. 이번에는 그냥 새로 바꾸는게 나을것 같다고 생각한 아이자크는 군화 끝으로 바닥을 질질 끌었다. 이렇게 뒤를 돌면 분명 에바리스트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아이자크!”
몇 번의 총성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이자크는 고개를 들었다. 모자는 어디다 두고 온건지 머리카락에 눈이 따갑진 않은건지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나면 바로 앞에서 헉,헉 거리며 숨을 내뱉는 에바리스트가 보였다.
“아이자크! 너 무슨 생각을 하는,”
“에바 군화가 더러워졌어.”
“.........”
“내가 닦아줄게”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군화를 바라봤다. 급하게 뛰어온다고 흙먼지를 뒤집어 써 더러워져있었다. 하, 에바리스트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좋아, 닦아줘. 에바리스트는 자신의 절친한 친우이자 충직한 군견인 아이자크를 끌어안았다. 흙먼지 투성이가 된 머리를 쓰다듬으며 꽈악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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