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화 스토커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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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베른리리ts(선천)중세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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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하고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단 한번 네얼굴을 보기만하면 단 한번 네눈을 보기만하면 내마음은 괴로움의 흔적이 사라진다 얼마나 즐거운 기분인가는 하느님만이 알고있을뿐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베른하드/프리드리히
아버지가 죽었다.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일년 365일중 300일은 비가 오고 안개가 낀 이 동네에서 드문 해가 쨍쨍하게 뜬 날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고 목사가 줄줄 내뱉는 말을 들으며 내 옆에 있던 어머니는 매우 오랫동안 우셨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울음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건 어머니가 우는것도 날씨가 맑다는 것도 아니었다. 검은 양복 한 언저리에 흙이 묻었다. 몸을 숙여 그것을 탈탈 털고 일어서니 아버지의 묘비가 보였다.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우는 소리와 목사의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줄줄 이어졌다. 고개를 옆으로 꺽었다. 커다란 정원이 보였다. 아, 사람이다. 오랜만에 햇빛 때문일까 저 멀리 나무 뒤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언뜻 웃고 있는것 같았다.
홀 중앙에서 파티가 열렸다. 사람들 모두 검은 옷을 입고 한손엔 샴페인을 들고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부엌구석으로가 테이블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탁, 빵을 집어 뜯고 있던 내 앞에 컵이 탁 놓여졌다.
“혼자서 뭐하니”
“어머니”
“손님왔다. 인사드리러 나가봐”
“그럴기분아니에요”
“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손님이야.”
쓴웃음을 진 어머니라 불린 여자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뻗었다. 여자라기엔, 한 사람의 부인이라 치기엔 지나치게 고운 손이었다. 부탁이다. 아이야, 그렇게 말한 그녀는 놓았던 잔을 다시 들고갔다. 홀 중앙으로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됬다. 저 아이가, 불쌍한 아이가, 하며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안아주는 사람들 까지, 이런 분위기가 싫어서 나오지 않은거였는데.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가, 일로오련”
어머니는 기분이 좋을대만 나를 아가,아이야 하고 부르곤 했다. 오늘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다가가며 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인사하나 없는걸 보면 그리 가까운 사람은 아닌가 보다, 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역시 대꾸가 없다.
“인사하렴.”
그렇게 말하곤 살짝 뒤로 물러선 어머니를 보고 그 남자 앞에 섰다. 손을 내밀자 살짝 망설이더니 이내 잡아온다.
“프리드리히입니다.”
“...베른하드다.”
무뚝뚝한 인사를 주고 받은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 어깨를 잡고 뒤에서 안아오셨다. 누군지 기억안나니? 어머니의 물음에 자신을 베른하드라고 소개한 남자를 빤히 쳐다봤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꼼꼼히 뜯어보자 눈동자 색깔이 자신과 같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쩔수 없다는 듯이 웃더니 나와 그의 손을 잡았다.
“아가, 베른하드는 네 쌍둥이 형이란다.”
닮은 거라곤 눈동자 색 하나뿐인 그와 내가 어머니는 형제라고, 그것도 쌍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베른, 이유없이 허무해질 때가 있어?"
"허무하다기보다…, '전에도 이랬지'라는 느낌일 거야.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시시해지지"
전에도 널 잃었었지, 베른하드는 굳이 뒤에 말을 내뱉지 않았다. 아직 기억이 없는 프리드리히는 아마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어디서 죽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베른하드는 쓰러진 프리드리히를 안아들고서 묵묵히 걸어갔다. 안무거워? 하고 묻는 프리드리히에게 무거워 죽겠어, 하는 농담을 하면서,
프리드리히가 쓰러졌다. 그랬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 전에도 이런적이 있었지. 얼마전 되찾은 기억과 그 기억에서 얻은 허무한 감정들을 되새겨 보며 베른하드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런 풍경이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데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해 가장 쉬운 술에 기대게 되는 경우가 많다."
프리드리히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레지먼트 입대전에는 술은 입에 댈수 조차 없었고, 입대 초기 역시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둘은 살아가기 급급했고, 술은 너무 비쌌다. 그렇기 때문에 베른하드가 프리드리히의 술 버릇을 알 리가 없었고, 술버릇이 있을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술버릇이란 것도 정도껏 취하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든 일이었으니, 별로 신경쓰지 않는듯 베른하드는 넘어갔다. 프리드리히 역시 술에 취해 옷을 벗는 날 보다는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오는 일이 더 많았으니 서로 피해만 주지 않는 선이라면 무심한듯 지나쳤다.
사건이 터졌다. 한 중대의 전멸, 에이스의 실종. 베른하드나 프리드리히 개인으로 보자면 크게 신경쓸일은 아니었다. 단지 레지먼트 안에서 일이 크게 나 서로 바빴을 뿐이었다. 베른하드는 그 전부터 바쁘긴 했으나, 그 일이 터진이후부터 프리드리히의 얼굴조차 못볼때가 많았다.
전부터 서로에게 그렇게 신경쓰는 형제사이는 아니었다. 있는듯 없는듯, 옆에 있는건 당연했고, 없어도 언젠가 자신의 옆에 돌아올거라는 강한 믿음. 형제이기에, 쌍둥이이기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 하얀 집에서 태어났다.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은 부모를 두고, 같은 피가 흐르며 같은 길을 걸은 우리들이건만, 우리를 갈라 놓을 일은 절대 없을거라 믿었건만, 어째서 죽음은 허무하게도 우리를 갈라 놓았고, 절대 만날수 없는 경계선을 그어 버렸다. 프리드리히. 이제 불러도 대답 없는 네 이름을 불러보며 눈을 감았다.
우리 죽어서도 천국은 못가겠지, 언젠가 네가 마물을 베어버리며 그렇게 말했다. 진득하니 피가 들러 붙은 검에 눈살을 찌푸리는 너를 보며 나는 글쎄, 하고 대답했다. 천국에 가선 뭐하게, 조금 관심이 생긴건지 베른하드가 물었다.
".....가면 엄마아빠도 만날수 있고, 친구들도 있을까 싶어서"
주변에 쓰러진 동료를 보았다. 프리드리히와 절친한 친우가 쓰러져 있었다.
"너무 커서 알아보지도 못할거야"
"역시 그렇지?"
"그렇다고 지옥이 편할거라 생각하지마"
왜? 하며 등을 맞대온 프리드리히가 물었다.
"리즈 선배가 불구덩이에서 기다리고 있을거다."
하하, 그건 너무했다고 베른- 각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이젠 서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곳에서 프리드리히의 웃음만이 그곳을 가득 매웠다. 그래도 프리드리히 넌 천국에 갈거다. 넌 착한 아이니까,
* * *
그랬는데, 그래야 했는데.
“정말이지 어머니도 너무해, 정략결혼이라니”
프리드리히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베른하드는 묵묵히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한건 아닌지 프리드리히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한숨을 쉬자 베른하드가 그녀의 허리를 바로 잡았다.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하자 프리드리히가 싫은 소리를 냈다. 너무 오래 걸려 베른~ 하면서 징징거리면 베른하드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러게 시종을 시키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짓을 멈추지 않는걸 보면 싫은건 아닌 모양이다. 베른하드의 크고 긴손이 프리드리히의 등을 조심스레 눌렀다. 고개가 젖혀지며 아, 하고 소리를 내자 베른하드는 참아, 하고 말했다. 그러자 프리드리히는 웃으며 끄떡없어, 하고 말했다.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아득한 기분에 손짓이 더뎌졌다. 베른하드의 손가락이 피부를 스칠때마다 그 자리자리에 불그스름하게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코르셋을 살짝 조이며 긴 선을 구멍에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그 손짓이 퍽 조심스러워 보여 아마 다른 사람이 봤다면 답답해 하며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을 정도였다.
베른하드의 손짓이 멈췄다. 프리드리히는 끝났어? 하며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럴려고 했다.
어깨에서 날개뼈, 허리에 코르셋의 시작부분까지 단단한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코르셋 같은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보기 좋은 몸매였고, 마른편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코르셋을 하며 징징거리는건 단순한 핑계였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곤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방안은 새하얀 벽지에 백합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창역시 새하얀 틀이었다.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실정도로 모든게 새하얀 방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역시 마찬가지 였다.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에 자신과 똑같은 녹빛 눈동자, 그리고 흰 피부. 차오르는 욕정을 누르며 베른하드는 그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움찔하며 크게 떨리는 어깨에 짙게 입맞추면 곧 허리에 두른 손위로 그녀의 손이 겹쳐졌다.
“베른...”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프리드리히를 보며 베른하드는 어깨를 지나쳐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에 입맞췄다. 하아, 낮은 숨소리에 늘어진 드레스 자락을 들어올리면 흰 허벅지가 들어났다. 살짝 문지르며 고개를 돌리면 프리드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베른, 살짝 높아진 목소리와 붉어진 양뺨, 감긴 눈. 그 모든게 사랑스럽다고 생각됬다. 안되는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
쳇, 프리드리히가 혀를 찼다. 오늘이야 말로 베른하드와 끝까지 갈줄 알았는데 입을 맞추기 직전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황급히 떨어져야 했다. 저 놈의 눈치 없는것, 프리드리히는 언젠가 저 놈을 잘라버릴거라 이를 갈며 뒤를 따라갔다. 조여진 허리와 높은 구두굽이 익숙치 않아 걸음이 느렸지만 아마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이다.
뒤뚱거리며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지만 영 편치 않았다. 정말이지 구두를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참고는 천천히 내려가면 끝이 보였다. 이 놈의 계단은 정말이지, 살짝 긴장을 벗어던진 프리드리히가 속도를 냈다.
“어?”
또각또각 해야 할 구두가 또각또각 딱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뒤로 몸이 기울어진 프리드리히가 눈을 감았다. 부딪친다, 겁나 아프겠지 설마 죽지는 않겠지. 베른! 파노라마 처럼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가운데 그녀는 뒤로 넘어지지도 머리를 부딪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등에 푹식하게 뭔가 닿았다.
“못말리는 아가씨군.”
“가,감사합니다..”
가만히 있는 프리드리히를 보며 사내는 잠시 멍하니 뒷통수를 쳐다보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어깨를 잡고 있어서 그렇군, 하며 손을 놓았다. 뒤를 돌아폰 프리드리히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뭐가 못마땅했는지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내가 시종이어도 그렇게 고개를 숙일건가?”
“..예?”
프리드리히는 사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내는 한계단 위에서 프리드리히를 내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시종이나, 하인이었어도 그렇게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일거냐고 물었다.”
“......”
그녀는 자신의 성격상 그럴거라고, 막상 아니라고 해도 상황이 닥치면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의 옷은 고급스러웠고, 신발이나 시계, 다른 자잘한 물건 역시 고가의 물건이었다. 게다가 남자.
아는 남자라고는 집안의 시종들이나, 아버지 또 베른하드밖에 없는 탓에 프리드리히의 남자에 대한 시각은 좁았다. 그렇지만, 딱 한가지 알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프리드리히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사내가 마음에 들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무슨 연유로 여기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사내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리드리히가 대답이 없자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주며 이마를 꾹 눌렀다.
“적어도 내 집에선 그런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
“정략결혼이라는 걸 잊지말고, 위치에 맞게 행동했으면 좋겠어, 리리양”
**
리즈는 그 후 몇 번이고 찾아왔다.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프리드리히를 찾아왔다. 그는 멋대로 프리드리히에게 리리라고 불렀다. 프리드리히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리즈는 네 이름은 너무 길어, 그리고 남자같아. 하는 이유와 함께 리리라는 호칭이 고정됬다. 하지만 리즈가 몇 번 프리드리히라고 부를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자신에게 핀잔을 하며 낮게 분노하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에게 까지 한 소리를 한 것이었다. 아무리 결혼상대라지만 지나친 간섭이라고 소리쳤다.
“...프리드리히...”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으득 거리는 그에게 공포와 위압감을 느꼈다. 리즈와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절대적인 힘의 차이, 갑작스레 베른하드가 보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한 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가 보고 싶어져 눈물이 났다.
**
“진짜 너무 하지 않아?”
그닥, 베른하드가 대답했다. 프리드리히는 입술을 쭉 내밀며, 베른하드를 쳐다봤다. 요새 일이 바쁘다며 자신을 만나기를 꺼려했던 그였다. 근데 어째선지 선뜻 같이 와준 그를 보며 프리드리히는 때아닌 스킨십을 하며 칭얼거렸다.
“신부가 드레스를 고른다는데 신랑이 오지 않다니, 아무리 일이라도 그렇지”
“....”
“뭐, 덕분에 베른이랑 둘이 있게됬으니”
프리드리히는 그의 뺨에 입맞추며 웃었고, 베른하드 역시 프리드리히의 뺨에 짧게 입맞췄다. 헤헤, 하고 떨어진 프리드리히가 기다려, 하고 커튼을 젖히고 들어갔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빼끔 내밀더니
“베른이라면 훔쳐봐도 괜찮아”
하곤 쏙 들어가 버렸다. 잠깐 얼빠진 얼굴로 그곳에 시선을 두던 베른하드가 고개를 숙이고 살짝 웃었다.
2
처음부터 품어서는 안돼는 마음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먼저 다가왔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보여줘서는 안돼었다. 결국 이렇게 될걸 알면서도 그리했다. 마음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나의 동생은, 내 동생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나타샤는
***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인채 작게 눈을 뜨면 얼마나 지난건지 시간파악 조차 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진걸 보고 베른하드가 몸을 숙였다. 책 페이지를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려 고개를 들었다.
“베른”
“…….”
“헤헤...어울려?”
“…….”
“별로 인가?”
베른하드가 천천히 일어났다. 프리드리히의 말에 대답은 일체 하지 않았다. 두계단 위에 서 있는 프리드리히는 으아해 하며 그를 쳐다봤지만 베른하드는 그러지 않았다. 서서히 다가가며 시선을 떨구고 있던 베른하드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치마 끝자락부터 시선이 마주칠때 까지,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있던 프리드리히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듯 웃었다.
“역시 별로지?”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를 끌어안았다. 약간 놀란듯 프리드리히가 치맛자락을 놓았다. 하얀 드레스가 바닥에 흩어졌다.
어머니가 처음 동생에게 구혼자가 있다고 했을때, 동생이 정략결혼을 해야 한다고 했을때, 가끔 찾아오는 사내에게 동생을 빼앗길때 그럴때까지만 해도 자신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옆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베른하드…”
자신을 부르는 입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자신에게 뻗어오는 손길. 그 모든게 자신의 것일거라는- 베른하드는 조심스레 입을 맞추며 그녀를 눕혔다. 바닥의 푹신한 카펫이 그녀를 마지했다.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았다.
“아름다워”
“…….”
“그누구보다 예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프리드리히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열리고 혀가 얽혀서, 더 밀어붙이면 숨이 찬듯 어깨가 크게 떨었다. 입을 떼고서 바라보면 물기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드리히의 얼굴에 베른하드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봤다.
“무서워? 그만할까?”
아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그녀가 웃었다.
“계속해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어깨 쇄골, 그리고 가슴까지 내려오면 프리드리히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적당히 보기 좋게 오른 가슴골에 입을 묻고는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것어올렸다. 하얀 드레스 안에 숨어 있던 길고 늘씬한 다리가 들어났다.
허벅지를 붙잡고 젖어있는 속옷위로 손을 갖다대면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긴장하지마, 프리드리히. 처음이라는것에 대한 배려였을까, 한손을 잡아주며 계속 눈을 맞추려 드는 베른하드에게 프리드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눈앞의 사람이 베른하드라는 것과 아득한 기분에 자극적인 손짓, 프리드리히는 계속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신음을 참으려는 듯한 프리드리히에게 베른하드가 괜찮아, 아무도 않와. 하며 부축였다.
“아응,아 하으으, 베르은…아,앗..”
“프리드리히….”
“보지마…읏...”
촉촉하게 젖어드는 아래에 프리드리히가 베른하드를 저지했지만, 그 손을 잡아 올렸다. 몸을 비틀며 움직였지만 베른하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아,하아, 숨을 내뱉은 프리드리히가 그를 올려다 봤다.
“베른…나 진짜..”
“괜찮아, 괜찮아 프리드리히”
“미칠것 같아…”
아직 옷도 벗지 않은 베른하드와 달리 반쯤 벗겨진 프리드리히가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과 처음보는 베른하드의 이런 모습에 공포와 설레임이 동시에 찾아왔다. 안돼, 하면서도 정직한 반응에 베른하드가 웃었다. 예뻐 프리드리히, 그렇게 말하곤 입을 맞추면 혀가 뒤섞이며 농도 짙은 키스가 오갔다.
덜컹, 굳게 닫혀있을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야, 프리드리히. 하고 들어온 남자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프리드리히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마주보던 둘의 정적사이가 ‘아,!’ 하는 프리드리히의 목소리에 깨졌다.
“리,리즈!”
아무말도 없이 뒤돌아 나가는 리즈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곧 베른하드에 의해 저지됬다. 신경쓸거 없어, 그렇게 말하는 베른하드에게 프리드리히가 입술을 꾹 깨물더니 손을 빼냈다. 미안 베른, 지금은 리즈가 먼저야.
자신의 품에서 사르륵 빠져나가는 프리드리히를 감히 잡지도 못하고 베른하드는 멈춰있었다. 그녀의 작은 발소리가 사라질때 까지 베른하드는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앉아있었다. 돌아올 것이다, 그럴것이다. 그녀는, 프리드리히는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멀어지는 발소리와 텅빈 공간에 베른하드는 자신의 책을 집어 들었다. 쾅! 내던져진 책이 촤르륵 펼쳐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젠장,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베른하드가 방을 벗어났다.
"리즈!!"
한참을 뛰어서야 그를 따라잡은 프리드리히가 리즈의 옷깃을 붙잡고 숨을 내뱉었다. 일부러 천천히 간건지, 아님 기다린건지 리즈는 아무말도 없이 멈춰있었다.
차라리 몰아붙여주길 바랐다.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자신을 거부하길 바랐다. 하지만 리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든 프리드리히가 리즈와 눈이 마주쳤다. 변명같은거 생각하지도 않았다. 눈앞에서 들켜버린것을 더 변명할 것도 없었다.
"저…."
"……."
"……."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깨버린건 리즈였고, 그 입에서 나온건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오늘 밤에 우리집에서 연회가 열려"
"……."
"오늘 같이 못있어줘서 미안, 그 사죄의 뜻으로 여는 거니까 와주면 좋겠어."
리즈는 자신의 겉옷을 벗더니 그녀의 텅 빈 어깨에 걸쳐줬다.
"그리고 조신하게 좀 다녀"
프리드리히가 죽었다. 때문에 이제 다신 볼 수 없다.
완벽한 어둠. 베른하드는 이 장소를 알고 있다. 하지민 두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이었다. 감은 눈위로 빛한점 들지 않아.고개를 숙이고 귀를 틀어막았다. 나무 천장위로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그 후로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딸깍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자신의 전우가 그곳에 서있었다. '정신은 차렸나, 베른하드.' 그 목소리에는 걱정 한점 담겨 있지 않아 절로 실소가 터져나왔다. 베른하드는 웃음과 함께 터져나오는 분노에 주먹을 말아쥐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때려 눕히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철컹 거리는 수갑에 베른하드가 다시 한번 그를 노려봤다.
"이거 풀어 미리안"
"다시 그같은 난동을 피우지 않는다고 하면 풀어주지"
프리드리히의 숨이 멎자마자 베른하드는 그 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가히 공포의 쌍둥이라 불릴만한 위력이었고 더군다나 한참 위에 기수의 선배에게 섵불리 덤빌 사람은 몇 없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리안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있는 절반이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미리안이 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베른하드의 분노의 대상은 레지먼트가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 안의 엔지니어와 기술팀. 그들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고, 미리안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 새끼들이 프리드리히를 죽게 만들었어!! 저 놈들이!! 저 놈들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엔지니어의 예측 오차는 항상 있는 일이었다. 그저 프리드리히가 운이 없었다고 봐야했다. 유달리 큰 오차범위였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 희생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것이 헛된 희생이라고 한들.
"안따라올텐가?"
노려보는 눈초리가 사납다. 미리안은 헛기침을 하더니 그의 손목을 풀어줬다. 네 동생을 만나게 해주지. 한마디였다. 단지 그 한마디에 곧 달려들기도 할것 같던 기세가 누그러 들었다. 뭐? 하고 물어오는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주 작은 희망. 손을 놓고, 눈을 감아버린 프리드리히가 혹여나 저 수술실 안에서 살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희망이 있었다. 사실 프리드리히의 몰골은 그 희망마저도 짓뭉게 버리기에 충분했으나 인간은 희망위에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미리안은 베른하드가 프리드리히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다. 주변에서 보면 어떻게 저렇게 냉정할수가 있냐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대화도 별로 없고 마주치는 일도 없었지만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를 아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처음 레지먼트에 입대했을때부터 느껴왔었다. 그 이상으로 생각이 미치기 전에 미리안이 베른하드를 일으켰다. 도움을 준것은 아니었지만 미리안의 몇 마디만으로도 베른하드는 자리에서 일어날수 있었다.
프리드리히가 살아있다는 그 한마디 만으로도 베른하드는 일어날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드리히는 한 번 죽었다."
말하지 말걸 그랬나, 베른하드의 발걸음이 멈춘순간 미리안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지만 언제까지 숨길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제 몇분후 베른하드가 프리드리히를 만난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노력했지만 자네도 봤듯이...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 하지만 자네나 나나, 프리드리히나 레지먼트에 오래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버리기 아까운 인재였지"
"본론만 말해"
".....직접 보면 알겠지"
레지먼트는 소용돌이에서 생겨나는 이형생물을 단죄하고 코어를 회수하여 소용돌이를 소멸시키는 단체.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이라 불렀고 혹자는 성기사라고 불렀지만 그 실상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곳곳에서 속출하는 소용돌이와 이형생물에 반해 그들의 전력은 턱 없이 부족했고 인간은 한 없이 약했다. 몇년전 레지먼트의 에이스라 불리던 자도 어긋난 예측과 턱 없이 부족한 전력에 사라졌다. 그 후 몇번의 소속 변경과 개편이 있었지만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었다.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무기와 능력도 가면 갈 수록 그들에게 밀렸다.
거대한 실험실. 유리벽으로 되어있는 오른쪽 벽안에는 누군가 침대위에 누워있었고 수많은 색색의 선들이 그 몸에 연결되어 있었다. 몸집으로 보아 성인은 아닌듯 보이는 모습에 베른하드가 눈쌀을 찌푸렸다. 저런 어린 아이를 실험도구로 쓰는건가, 역겨운놈들. 베른하드는 미리안이 왜 자신을 이 곳으로 데려왔는지 알지 못했다. 저런 실험이나 구경하라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발작하며 울고 있는 아이를 보라고? 베른하드가 움직이기 전에 미리안이 그를 막아섰다. 내가 알고 있는 넌 적어도..베른하드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미리안이 어쨌는데, 기억도 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가 죽고 나서 모든 기억이 엉망 진창이었다.
드디어 실험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중 하나와 이야기 하던 미리안이 베른하드에게 손짓했다. 들어가 보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실험실 안에 들어갔다. 사람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아이의 갈색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지친것인지 이불을 끌어안고 뒤돌아 있는 아이는 척 보기에도 어렸다. 많아봐야 16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미리안을 돌아보자 고개만 끄덕였다. 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베른하드는 미리안이 자신을 왜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자신이 왜 미리안의 뒤를 따라왔는지를 생각해냈다. 전부 프리드리히를 만나고 싶다는 그것 하나 만이었는데 미리안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어린 아이를 보여 주는 것인지
"못알아 보면 어쩌나 했네"
마지막에 이마에 상처가 났다고 했었지? 미리안은 그 말을 하곤 실험실을 나갔다. 상처는 단순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어떤 말을 해도 위로도 용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의 몸이 반대로 움직이면서 선이 하나 뽑혔다. 그 아픔에 눈을 뜬 아이의 초록 눈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베른...?"
누군가는 기적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불행이라 말했지만 지금 베른하드에게는 어떠할까. 상상도 가지 않을 그 감정에 미리안이 두 눈을 감았다.
정확이 이 나이때쯤 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아니면 분간하기도 힘든 우리 형제가 서서히 달라 진것이, 애초에 성격부터 비슷하지 않아서 하는 행동을 보면 누가 프리드리히냐 베른하드냐 쉽게 구분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레지먼트에 입대하면서 머리를 짧게 잘라버린 프리드리히를 보며 베른하드는 자신의 뒷통수를 훑어내렸다. 길러볼까, 그것이 프리드리히의 모습을 본 제일 처음 감상이었다.
생기있게 반짝이는 눈동자와는 달리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의 눈을 감겼다. 어, 하고 대답하자 프리드리히가 손을 뻗어 그 위로 겹쳐온다.
"여긴어디야?"
"......."
"베른 되게 어른스러워 보인다."
"프리츠, 피곤하지"
"응.."
"조금만 자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거야"
얼마있지 않아 프리드리히가 잠든 것을 확인한 베른하드가 실험실을 박차고 나와 미리안의 멱살을 움켜잡곤 벽으로 밀어 붙였다. 어째서,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더라도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며 베른하드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차분히 멱살을 잡은 베른하드의 손을 떼어논 미리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쩔건가"
"무슨 말을 하는거지"
"저 프리드리히를.."
"저건 내 동생이 아니야!!"
생각보다 큰 부정에 미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죽일텐가. 무리한 인체연성이었다. 레지먼트 내부에 힘으로는 무리가 있을 정도의 실험. 아직 미완성인 드론실험을 억지로 강행해 만든것이 저 프리드리히였다. 본인의 외향과 성격,DNA를 본따 만들었으니 99% 프리드리히와 일치하지만 그 나머지 일퍼센트가 부족한 아이였다. 저건 전투용으로도 실험용으로도 부적합했다. 아마 베른하드가 아니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생명이었겠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미리안은 베른하드를 떨쳐내곤 실험실로 들어갔다. 얌전히 자고 있는 이 작은 아이는 목을 졸른다면 깨어나지도 못한채 죽게 될 것이다. 그 여린 어린아이의 피부가 굳은 손바닥에 닿으면서 프리드리히의 눈동자가 띄였다. 어, 라?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려 보는 것이 베른하드를 찾는것 같아 미리안이 다른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 금방 끝날꺼야. 그 소리가 무엇임을 알아들은 것일까. 손바닥에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공포와 두려움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 입모양을 보아선 베른형. 베른, 하는 것이 착각이길 바랐다.
"..죽이지마"
"....."
제길, 빌어먹을... 몇번이고 욕을 내뱉은 베른하드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프리드리히, 프리츠 그 이름을 부르며 우는 베른하드의 모습이 그렇게 작아 보일수가 없었다. 미리안은 프리드리히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베른하드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형제라 조금 웃음이 나왔다.
이 끝은 분명 불행할 것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얼마 없을 것이며 그 시간동안 계속 괴로운 일들이 반복 될 것이지만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2
베른하드의 일과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항상 바빴고, 쉴 틈이 없었다. 거기에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뿐이었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약을 챙겨주며 옷을 여미던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의 얼굴을 보고서 몸을 숙였다. 왜, 손안 가득 쥐여준 약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볼을 부풀린 프리드리히가 입을 열었다.
"나 이거 먹기 싫어"
"먹어야 해"
"왜? 왜 먹어야 하는데?"
프리드리히가 처음 물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려웠다. 베른하드는 프리드리히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먹어.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억지로 약을 삼키고 혀를 내두르는 프리드리히를 보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있는 실랑이건만 견디기 힘들었다.
손을 잡아오는 프리드리히에 베른하드가 고개를 내렸다. 한참 작아진 동생은 목을 아프도록 들고서 베른하드를 올려다봤다.
"오늘은 일찍 올 거야?"
"글쎄"
"베른 없으면 너무 심심하단 말야."
"……."
"밖에도 못 나가게 하면서"
그러니까, 조금 피곤했을 뿐이라고 베른하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잡아온 손을 뿌리치고서 방을 빠져나가려 들면 보폭이 짧은 걸음걸이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베른? 베른! 겨우 쫓아온 작은 손이 옷자락을 붙잡았다. 미안, 눈을 꾹 감았다.
“오늘은…일찍 올 거지?”
"……최대한 힘써보지, 약은 거르지 말도록"
*
추모식이 있었다. 그러니까 베른하드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다. 무덤가에 피어오른 연기가 피어오르지도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릴 만큼 지독한 냄새에 베른하드는 입가를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비석에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거기에 적힌 건 분명 프리드리히의 이름이었다. 최근 일이 겹쳐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비석에 깎여 들어간 프리드리히의 이름은 생동감 없게도 손안에 들어왔다. ‘유품입니다.’ 손안에 쥐어진 금색의 딱딱한 조각에 베른하드가 이를 악물었다. 깊게 파인 이름이 제 손안에서 굴러다녔다. 간간이 묻어있는 검고 딱딱해진 핏덩어리가, 긁힌 자국이, 눈앞에 어려져 버린 동생이 있었다.
기도하라. 그러면 이루어 질 것이다.
레지먼트 한 편에는 커다란 성당이 있다. 때때로, 종종 그곳에 가는 프리드리히를 발견했지만 베른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한 일이었다. 이런 곳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신에 기대는 것은, 어 쩔수 없는 것이었다. 동생 역시 죽음은 두려웠을 것이니. 베른하드는 눈앞에 동생을 바라봤다. 색색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들어 있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땀에 가득 찬 동생의 손위에 군번 줄이 툭 떨어졌다.
모두 재앙이라고 말했다. 사느니만 못하다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동생은, 프리드리히는 약이 없으면 하루도 제대로 버틸 수 없는 몸이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곧 죽을 것 같았다. 베른하드는 하루 치 약이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대 밑에 쓰러져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그 작은 몸뚱어리를 안아 침대 위에 올리면 배시시 웃는 얼굴이 마치 마지막 같았다.
“베른…”
“…….”
“형…”
미안하다. 베른하드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미안하다. 프리드리히, 너를 포기하려고 했어. 그 손을 꽉 쥐었다. 작은 손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금속 덩어리를 치우고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뺨도 감싸 쥘수 없는 손이건만 베른하드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 것인지 한참이나 붙잡고 놓지 않았다. 울면 안돼, 형이니까, 난 네 형이고, 이제 너한텐 나 하나 뿐이니까.
얼마나 오래된 일이었더라, 그러니까 레지먼트도 소용돌이도 없던 시절, 아직 서로가 형이고 동생이던 시절, 대등하지 않았던 시절, 자신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리던 프리드리히가 있던 그 시절에 딱 한번 프리드리히가 자신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그냥, 환하게 웃으며 말하던 프리드리히가 지금 눈앞에 있는데도,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지마라, 살아 프리드리히”
대답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미약한 목소리가 어, 하고 들려왔다.
*
“베른 오늘은 일찍 올 거지?”
“글쎄”
“치사해…”
“……올때 사탕이라도 사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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