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귤차님께
2.리른쪽 합작
3.양님께
처음에는 그저 누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 이상형에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남자, 프리드리히는 묘하게 신경 쓰이는 그 남자를 알고 있다. 사실 닮은 것 뿐이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 기억나지 않으니 '알고 있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마주치는 눈에 고개를 돌렸다. 아마 상대도 이쯤 되면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를 산 것 같단 말이다. 프리드리히는 아직도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고개만 처박았다. 교수 목소리는 들릴 리가 없었고 시간은 죽어라 안갔다. 드디어 마쳤나 싶어서 재빠르게 벗어나면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따갑다.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 말을 하자 베른하르트가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군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중얼거리듯 말하는 베른하르트의 말에 프리드리히는 끙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며 누웠다. 눈을 감고 다시 그 모습을 그렸다. 누구지-누굴까 프리드리히는 끊이지 않는 의문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면 곧바로 베른하르트의 핀잔이 들려왔지만 듣지 않는듯했다.
"진짜 누구지..."
누군가 기억하고 있다 라는 기억만은 명확했다. 그 기억이 나지 않을뿐이었지 프리드리히는 이제 꿈속에서도 그 눈을 바라봤다. 결코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단지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 쫓기듯 도망쳤을 뿐이었다. 그럴거면 이제부터 내가 바라보지 않았으면 되는거 아니었나 싶지만 이젠 그것도 무리인듯 싶었다. 자리있냐, 그 말에 프리드리히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대답도 듣지 않고 남자는 옆자리에 앉아버렸고 사실 대답한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오는것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는 원래 수업에 집중하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했다. 그와 동시에 이제 진짜 쳐다보는 것은 그만둬야 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업시간 내내 따라붙는 시선에 프리드리히는 죽을 맛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노골적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프리드리히"
어라,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잠이 든건지 몸을 일으키자 마자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이제 일어났냐, 웃음기 어린 그 목소리에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도망치듯 프리드리히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크흠, 누군가의 헛기침과 함께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음을 깨달은 프리드리히가 재빠르게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왠지 옆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조별과제는 2인 1팀으로"
조는 모두 정해졌으니 다음 주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나가는 교수를 보고서 프리드리히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조가 이미 정해졌다니, 프리드리히는 옆의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거기다 미안, 하는 소리까지 들은 프리드리히는 힐끔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설마 아니겠지.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나쁜 예감은 항상 들어맞다는걸 잊은채 그를 힐끔 바라봤다. 으익, 곧바로 눈이 마주쳐 버려 도로 고개를 돌렸지만, 마치 이 공간에 그와 자신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프리드리히는 얼른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났다.
"프리드리히"
다시 한번 명확하게 불러오는 이름에 프리드리히는 그를 돌아봤다. 폰번호 주고 가 그가 자신의 폰을 툭툭 치며 말했다. 역시는 역시 역시구나 프리드리히는 그의 폰을 잡고서 번호를 꾹꾹 눌렀다.
"리즈...선배님"
"선배님은 뭐야 같은 학년이잖아"
"......"
"그냥 리즈라고 불러"
어쩔 수 없이 그 이름을 꾹꾹 저장한 프리드리히가 언제 다시 만날까, 리즈? 하고 물어볼 때 까지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아무리 친해진다 한들 근본적인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다.
리즈는 프리드리히의 구석구석 까지 알고 있었으니 억울한 느낌은 안 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허벅다리 안쪽에 작은 점이 있다는 것 까지도 그 말을 들었을때 프리드리히는 당장에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보여줄 수가 없어서 그만뒀다. 그에 비해 프리드리히는 리즈에 대해 아는것이 없었다. 그나마 아는 거라곤 이름 두글자에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올해 복학한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복학생이라는 것 정도, 프리드리히는 정말 리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리즈가 자신에 대해 아는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뭐 어때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잖아. 그렇게 말했을때 리즈의 표정은 살벌했다.'또 그렇게 날 쳐다보겠다고?' 생각보다 많이 불쾌했나 보다. 프리드리히가 몇 번이고 사과 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즈는 그때 이야기만 하면 화부터 낸다. 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소문이 퍼졌는지 아느냐 모르느냐, 하며 투덜투덜거렸다.
"리즈 그놈의 탄산수 좀 그만 마시면 안 돼?"
"시끄러"
"탄산수가 밥도 아니고"
"그럼 넌 그놈의 술버릇 좀 고치는게 어때? 술만 마시면 옷은 휙휙 벗는....."
리즈가 입을 꾹 다물었다. 프리드리히가 다시 어? 하고 물어와도 대답이 없다. 네 형왔다, 리즈는 그렇게 말하며 프리드리히를 툭 쳤다. 베른,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정겹다. 그대로 달려가는 프리드리히의 등 뒤로 리즈의 시선이 따라갔다가 우뚝 멈췄다. 정말이지 짜증나는 형제 리즈는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아주 등을 돌렸다. 그제서야 거두어진 그 눈에 리즈는 프리드리히의 부르는 목소리에도 듣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 * *
이제 그 눈동자에 쫓기는 일은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분명 무슨 말을 했던것 같았는데, 어차피 꿈이란건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지만 프리드리히는 아주 중요한걸 놓친듯 한동안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복권을 사야하나, 사실 별 생각 없었다.
시간이 비었다. 미리 통보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항의하고 싶었다. 어차피 수업은 들어와야 했으나 미리 통보하지 않아 억지로 일어났단 기분을 지울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두는걸, 프리드리히는 다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책상에 엎드렸다. 귀찮은건 딱 질색인데 말이지 프리드리히는 그리 생각했으나 다시 생각을 정리하자고 하면 이미 술집이었다. 여기저기서 환호하는 소리에 프리드리히는 이미 핀트가 나가있었고 말릴사람 하나 없었다. 원샷 이라는 단어가 일제히 귓가를 때렸다. 그래 오늘 하루쯤이야 프리드리히는 잔을 받아들었다.
생각에서 결론까지 이르는 중간에 사람은 많은 고민을 하지만 실제로 사람의 몸이 그것을 실행하는데는 몇초도 걸리지 않는다. 프리드리히는 비척대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가냐는 말도 있었지만 대부분 취한 녀석들의 헛소리였다. 불빛이 없는 상가 옆에 몸을 기대었다. 닿아오는 벽이 차가워 술이 깨는 기분에 프리드리히는 품안에서 라이터를 찾았다. 달칵달칵 몇 번을 시도한끝에 결국 라이터를 집어던진 프리드리히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되는 일이 없어.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으면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 라이터가 들려 있는 것은 알수 있었다.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내밀면 쯧 하는 소리와 함께 화르륵 불꽃이 일어나며 상대의 얼굴을 비췄다.
"너 언제부터 담배폈냐"
뻐끔뻐끔 프리드리히는 연기를 도넛모양으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야,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시선이 높아 목이 아팠다.
"아주 오래전부터 쭉, 리즈가 없을 때부터"
"끊어"
"노력했어"
"하지만 못 끊었잖아."
"꼴초취급 받을 만큼은 아니야...가끔 생각나면 피우는 거지"
쭈그리고 앉은 프리드리히가 바닥에 담배를 비볐다. 바스스 사라지는 빨간재에 프리드리히가 꿍얼거리며 리즈에게 반박했다. 그럼 리즈는 왜 라이터 들고 있어, 담배도 안피면서- 그 말에 리즈는 몇 번 달칵달칵 거리더니 도로 집어던져 버렸다. 그 모양새를 보고만 있던 프리드리히는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려 앉아 버리는 리즈의 시선을 피했다. 프리드리히의 눈은 툭 떨어진 라이터에 닿았다. 어디서 본건데 한참 노려보고 있으면 리즈가 들릴듯 말듯 작게 하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네거야 저거' 그 말에 프리드리히가 리즈와 라이터를 번갈아보더니 얼굴을 푹 숙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날 알아차리기 전부터"
치사하다 정말, 프리드리히의 말이 끝까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프리드리히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닿아오는 입술은 까끌거렸다. 뺨을 잡은 손은 뜨거웠고 이마에 닿은 머리카락은 간지러웠다. 쪽 입술이 떨어지면 눈앞에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싫어? 그럴리가 없잖아. 그럼? ....치사해 죽겠어 진짜. 차가운 겨울 공기에 노출된 노출되있던 손은 차갑게 얼어있었다. 조금 미안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리즈의 양뺨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입술을 깨물고 부비면서 마치 그 자신의 입술을 자랑하듯 그 위에서 놀았다. 촉 하고 떨어진 입술은 반들거렸다.
"좋아해 리즈"
"......"
"좋아해..."
나도 많이 좋아하고 또 사랑해.
* * *
프리드리히 좋아한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한 프리드리히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도 금방 웃었다. 나도 선배. 그 말을 들은 리즈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이내 프리드리히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선 프리드리히는 왜 하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뒷목을 잡고 끌어안으면 안겨오는 자세가 어정쩡하다. 손을 어디둘줄 몰라 허공에서 팔락거리는 모습을 보면 우습기 그지 없었다. 한참을 놓지 않고 꽈악 끌어안고 있으면 그제서야 작게 허리를 끌어안아온다. 그 작은 행동 하나에 리즈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치사한 자식. 뭐가? 됐어. 리즈는 그대로 프리드리히를 밀쳐냈다.
"선배 애인한테 좀 부드럽게 대해줄수 없어?"
"사돈남말하시네"
"먼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한사람이 너무 한거 아냐?"
퍽, 걷어차인 정강이에 프리드리히가 몸을 숙였다. 시야가 넓어졌네.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프리드리히의 머리를 꾹꾹 내리누르던 리즈는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돌아섰다.
"임무 잘 다녀와요!!"
제 머리를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들고서 하는 모양이 웃겼는지 리즈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자신은 좋아한다고 말을 했을까, 프리드리히는 죽기 직전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얼굴 위로 안타까운 감정만이 그려지는 그 사람이 왜 하필 지금 생각이 났을까. 프리드리히는 자신과 항상 부딪쳐오던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더이상 그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만 눈을 감았다.
* * *
오늘은 옷 안 벗었네. 리즈가 프리드리히의 셔츠를 벗기며 말했다. 추우니까. 아무리 방안이라도 아무리 봄이 다가오고 있어도 새벽은 추웠다. 공기에 노출된 피부에 프리드리히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달칵, 바지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프리드리히는 멍한 눈으로 리즈를 올려다 봤다. 리즈는 왜 안벗어? 뭉텅뭉텅한 발음으로 말하며 손을 뻗어 그 셔츠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얌전히 그 모습을 보고만 있던 리즈는 옷을 끌어내릴 때까지 저지도 하지 않았다. 손이 아래로 내려가 바지를 푸르는 소리가 부스럭 부스럭 났다. 주정뱅이의 손은 몇번이고 엇갈려 결국 한숨을 내쉬더니 미안 하고 웃었다.
"아...아......자,잠깐..."
프리드리히가 리즈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오는 머리칼이 부드러워 소용없었지만 바닥을 잡아 쥐는 것보단 나았다. 허리가 크게 들썩이고 좁은 단칸방에 숨소리가 거칠게 일었다.
사실 난 너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 대한 속죄는 부질없었지만 그것이 너를 그리고 나를 이어주는 무언가라면 나는 기꺼이 실행할 것이고 해낼 것이다. 아마 네가 묻는다면 난 웃으며 얼버무리곤 마지막엔 그렇게 말하겠지. 사랑해. 툭 던져버린 이젠 타오르지 않는 라이터같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나면 꺼내드는 담배에 불을 붙여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여기 봐 있잖아. 점"
리즈가 프리드리히의 허벅지를 꾹 잡아 누르며 말했다. 응? 고개를 든 프리드리히는 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보일 리가 없었다. 사진 찍어줄까? 그렇게 묻자 경기를 일으키며 됐다고 소리치는 탓에 찍지 못했지만, 리즈는 그 점을 빤히 바라봤다. 꼭 생긴 모양이 하트모양 같았다. 아니 하트모양이었다. 어쩌다 이어져 버린 듯한
"나도"
"어?"
"사랑한다고 프리드리히"
일이 터지려면 어떤 식으로던 터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일이 시작된 것인지 무엇 때문인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리즈는 눈앞에 펼쳐진 하얀 눈더미를 보며 삽을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야! 절벽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프리드리히를 보며 소리를 치자 뒤돌아보며 손을 까딱인다. 선배! 일로 와바! 여기 있는 눈을 다 녹여야 정신을 차릴까 리즈는 잠깐 그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푹푹 들어가는 눈을 밟으며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다지 높은 절벽은 아니었지만 퍽 보기에도 가팔라 보였다.
주변이 조용하다. 언제 여기까지 와버린건지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자, 리즈가 프리드리히를 툭 치며 말했다. 가자, 응. 한발 뒤에서 따라오던 목소리가 불안했다.
“프리드리히.”
“어?”
시선이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땅 끝에 프리드리히가 서 있었다. 손 뻗는 것이 무섭게 무너져 내리는 발아래 리즈가 그 이름을 불렀다. 프리드리히!! 정말 바보 같이도 잡은 것은 손이 아니었다. 끌어안아 오는 몸둥이에 프리드리히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선배가 같이 떨어지면 어떡해? 그런 말을 하려 했지만 그만뒀다. 금세 눈앞이 어두워 지면서 생각이 멈췄다.
어이, 프리드리히! 목소리 한번 우렁차다고 생각했더니 깨어난 곳은 동굴이었다. 선배? 하고 몸을 일으키니 말려온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선배의 이능 덕분에 불을 피울 수 있었다는 것 정도, 프리드리히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기도 전에 리즈가 입을 열었다.
“네시간 정도 지났어. 구조대가 왔어도 벌써 와야 하는 시간이었지”
“....”
“아무리 눈이라고 해도 내 능력은 아무 쓸모 없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프리드리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리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꽃 앞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드리히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미안하다고 하기엔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 이상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공기가 차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에 프리드리히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벗으면 되었겠지만 그것도 무리였다.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이 옷을 입고 죽던 다 벗고 죽던 얼어죽는건 매한가지 란 소리였다.
“야 벗어”
갑작스레 말해오는 리즈에 프리드리히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응? 하고 다시 묻자 리wm가 자신의 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대로 있으면 얼어 죽으니까 벗으라고 똑똑히 들려오는 말에 프리드리히가 반문했다.
“그럼 선배는?”
“난 안 추우니까 벗어라”
“아니, 내 말은 선배 옷은 나한테 작은”
“농담할 기분 아니다.”
살기등등하게 다가오는 리즈에 프리드리히는 찍소리도 못하고 옷을 벗어야 했다. 리즈의 외투를 받아든 프리드리히는 리즈를 빤히 올려다봤다. 검은 반팔티를 입고 있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추웠건만 리즈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었다. 리즈의 옷은 그새 다 마른건지 포근했다. 무릎에 기대었다가 고개를 들어 리즈를 바라봤다. 묵묵히 불을 태우고 있는 리즈의 옆으로 다가가자 뭐냐는 듯이 쳐다봤다.
“붙어있는 편이 따뜻하잖아”
“퍽이나”
그렇게 말했지만 역시 밀어내지는 않는다. 프리드리히는 불꽃을 빤히 바라봤다. 눈이 깜빡깜빡 거렸다. 선배, 그를 부르는 호칭에 졸음이 섞여 있었다.
“이왕 죽을 거면 그래도 싸우다 죽고 싶었는데”
“헛소리도 작작해라”
“이런 데서 죽게 되면 진짜 억울할 거야.”
그다음 리즈의 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이름을 불렀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눈 앞이 암전됬다.
누군가 어깨를 탁 쳤다. 프리드리히는 불편한 자세로 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오랜 철야로 짜증이 섞여 목소리가 탁 가라앉았다. 그것이 익숙한지 동료는 손짓하며 속삭였다. 떴다. 그 말에 프리드리히는 주머니에 있던 총을 조심스레 쥐었다. 드디어 떴다. 저 녀석만 잡으면, 집에 갈 수 있다. 조용히 차에서 내려 뒤를 쫓던 프리드리히는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인영에 동료와 프리드리히 역시 뛰기 시작했다.
뭔 놈의, 프리드리히가 이를 악물었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아차 싶었다. 여기는 놈이 잘 아는 동네였다. 들어서면 불리해지는 게 당연했다. 흩어지자, 동료가 말했다. 반대방향으로 뛰어간 프리드리히는 곧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에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동료가 뛰어간 곳으로 발을 돌렸다.
"프리드리히!!"
동료가 바닥에 굴렀다. 프리드리히의 눈앞이 핑 돌았다. 탕, 총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저 새끼가, 튀어나오려는 욕을 삼켰다. 입안이 쓰다. 뜨거웠다. 온몸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공포탄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로 악몽을 꾸다니,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아, 덥다. 누가 보일러를 무식하게 틀어놨나, 내가 그랬던가, 어젯밤 기억이 희미했다. 프리드리히는 넓은 침대를 굴러다니며 이불로 온몸을 둘둘 말았다. 어쩐지 옆자리가 따뜻했다.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며칠 동안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철야를 했던 프리드리히는 노곤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더 잘까, 고민하던 프리드리히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베른하드가 와있나, 말끔하게 치워진 방이며 끌어올려 진 이불이며, 자신에게 이런 배려를 해주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하물며 집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곤, 이불을 걷어낸 프리드리히는 배를 벅벅 긁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곤, 냉수를 마시니 그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베른,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소리가 딱 멈췄다. 베른? 목소리를 들은 프리드리히 역시 딱 멈췄다. 이건 평소 자신의 직업상 느낄 수 있는 그러니까, 도망가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이었다.
*
"자"
리즈 손에 들린 수건을 바라본 프리드리히가 응? 하고 받아들었다. 선배, 나 아침부터 너무 힘든데. 뭔 헛소리야!! 엉덩이를 뻥 걷어차인 프리드리히가 죽는소리를 냈다.
"너무해."
"……빨리 씻고 나오기나 해"
다시금 분주해지는 부엌소리에 프리드리히가 세면대 거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십 년 된 애인이라도 이런 꼴은, 보여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지. 까쓸까쓸해진 턱을 어루만지던 프리드리히가 면도칼을 꺼냈다. 날카로운 면도날이 거품을 쓱쓱 걷어냈다. 음, 어떻게 하는 거더라. 이게, 그러니까…. 프리드리히는 리즈를 부를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우당탕하는 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남자는 배짱이지, 날카로운 면도날이 턱을 스쳤다.
"으악!!!"
*
"병신."
"……."
"머저리"
"……."
남자가 면도하나 제대로 못 해? 울컥할 것도 아니었다. 맞는 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면도날이 스친 상처 위를 문질렀다. 반창고 위로 피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손대지 말라니까. 리즈가 버럭 소리 질렀다.
"팔"
"응?"
"모른척하지 말고 걷어라"
가끔 동료들끼리 그런 말을 하곤 하지,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 그 귀신이 자신의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프리드리히는 입고 있던 셔츠를 걷어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엉망으로 구른 몸에는 잔상처가 수두룩했다. 리즈는 미간을 팍 구기더니 솜뭉치를 꺼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철야를 하고 돌아오는 날은 리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건 미안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는데 프리드리히는 따끔따끔 거리는 팔을 저도 모르게 움츠렸다.
"엄살은"
"……."
"아프냐?"
"걱정돼?"
이걸 콱, 리즈가 때리는 시늉을 하자 프리드리히가 실실 웃었다. 정신 못 차리지? 붕대를 꽉 졸라매는 리즈에 프리드리히가 졌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선배가 여기 뽀뽀해주면 나을 것도 같은데…."
"넌 창피하지도 않냐?"
닳는 것도 아니고, 프리드리히가 툴툴거렸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리즈가 그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
리즈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리즈는 정말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에 프리드리히는 재빨리 손을 빼려고 했지만 리즈가 놔줄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대로 손을 잡아당겨 끌어당겨 버렸지, 손부터 시작해 천천히 입을 맞춘 리즈가 턱을 핥았다. 어느새 떨어진 반창고는 바닥에 뭉개져 있었다.
"아!"
입술이 깨물렸다. 얼얼한 입술을 부여잡으며 일어선 리즈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뭐해 밥 먹고 나가자"
"선배가 만든 거 먹을 수 있긴 해?"
"죽는다."
뻗어진 리즈의 손을 잡고 일어선 프리드리히가 그 손을 보고 웃었다. 반창고 투성이,
"빨리 먹고 데이트하자."
"…응!"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생각해도 질기다고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렇게 크다 할 상처 없이 사지 멀쩡히 말이다. 누구는 너무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그저 웃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동기는 뜨끔했는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동기가 죽었다. 이제 프리드리히와 같은 기수 혹은 그보다 높은 기수의 사람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 그러게 몸이나 사리지, 더는 들어줄 사람 없는 메아리였다.
디 아이 작전은 성공 적이었다. 그래야 했다. 이미 한 번의 과오가 있었다. 그것을 반복해서는 안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소멸해가는 소용돌이와 무너져 가는 하늘을 보며 검을 바로 쥐었다. 적들은 사라져가는 소용돌이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금 이곳으로 몰려올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피해 후퇴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대지를 바라보았다. 이기심이라던가 복수심 같은 게 아니었다. 단지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자신이 만들어낸 망령을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베른하드가 있었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가온 그는 내 손을 꽉 잡고선 기도했다. 그답다면 그답다고 해야 할까, 프리드리히는 꽉 막힌 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쉬운 괜찮다는 말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사내 하나가 다가와 베른하드에 말을 걸었다. 너무 멀어 들리지 않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베른하드가 그의 멱살을 잡고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말려야 하는데, 베른 화내면 말릴 사람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서 프리드리히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베른하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구나. 어쩌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해서, 그래.
만약 주마등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걸까, 레지먼트에 들어와서 나름 괜찮은 삶이었다고, 사람을 만나고, 동료가 생기고, 제자를 가르치고, 그리고,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입술을 깨물었다.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곤, 목에 걸린 피를 토해냈다.
죽는 게 무섭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내가 사랑했던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리즈……"
술병이 바닥을 들어냈다. 프리드리히는 멍하니 술병 구멍에 눈을 깜빡깜빡 들여다 보더니 이내 테이블 위로 몸을 떨구었다. 이미 주변에는 만취하여 쓰러진 동료들이 있었다. 마지막 까지 마신 건 자신뿐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우리는 살아 돌아왔고 하루쯤은 나태해져도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프리드리히가 다시 눈을 깜빡 였을땐 환한 아침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을 옮기려면 꽤나 힘을 썼을텐데 프리드리히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한참을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덮고 있는 이불에선 익숙한 냄새가 났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방안을 돌아보았다. 남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깔끔한 방에 프리드리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방은 아마 엉망진창이거나 한번 베른하드가 왔다가 갔을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는 이불을 잘 정돈한 후 다시금 방을 돌아봤다. 선배 안녕, 프리드리히는 그 말을 한 후 방문을 닫았다.
선배! 프리드리히는 앞서 가던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하고 돌아보는 남자는 프리드리히를 보더니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나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그냥 이름 부르라니까,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프리드리히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군대는 무조건 기수라던 사람이 누군데?”
“응?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누구랑 헷갈린 거야, 남자는 짓궂게 웃으며 프리드리히의 품에 있던 책을 쏙 빼 갔다. 이거 돌려주려고 온 거지? 멀리서 다른 사람이 남자를 불렀다. 남자는 프리드리히를 지나치며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말고, 그것이 알고서 하는 말이었는지 그냥 하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에서 한 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프리드리히에게 실상 선배는 많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역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로 오래가는 축에 있었으니 그 위에 기수들은 말 다한 거였지만, -이번 임무 실패했다고 하더라 - 대부분 죽었고 살아 돌아온 사람도 처분대상이라던데 -그 선배도 죽었겠구나, 아니 죽었어. 회수팀에서 연락이 온건 이미 장례가 모두 끝난 후였다. 시체를 찾았다. 비록 반쪽뿐이었지만 찾았다. 프리드리히는 이미 빈 관이 묻힌 묘비를 바라봤다. 태워,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무덤을 다시 파헤칠 순 없잖아. 죽은 사람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다 할 처사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는 차라리 시체를 찾지 못하길 바랐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면서도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프리드리히는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서 눈을 꾹 감았다. 머리가 아팠다. 시체 타는 냄새가 무덤 한쪽 편에서 피어올랐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관은 이미 땅속에 있는데 시체는 타오르고 있다니. 프리드리히는 들고 있던 꽃도 그 안에 던져 넣었다. 내일 다시 올게 미안, 프리드리히는 퀭한 눈으로 돌아섰다.
* * *
“따지고 보면 내가 네 선배야 임마.”
프리드리히는 아이자크의 머리를 딱 때리며 말했다. 아이자크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그럼 선배라고 불러요? 하고 대답했고 프리드리히는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렸다.
“아, 알겠어요. 교관!!”
엄살은,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그럼 교관의 선배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엉거주춤 일어난 프리드리히가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 머리를 긁적이며 허리를 쭉 핀 프리드리히가 중얼거렸다. 어떤 사람이었더라. 이제는 너무 오래되 기억도 나지 않는, 내가 기억하는 그 얼굴이 맞는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그런 사람.
“멋있는 사람이었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프리드리히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랜만이구나, 프리드리히는 그 흔한 국화 한송이 조차 들지 않은채 묘비들을 바라봤다.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는 묘비 수에 프리드리히는 혀를 내둘렀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과 친구들이 묻혔는가,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나는 운이 좋은 놈이지, 얼마나 오지 않은건지 한참을 헤매 그 앞에 선 프리드리히는 묘비위에 손을 올렸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선배?”
솔직히 다시 오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 생각난 김에 온것일지도 모른다. 옛 연인에게 너무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먼저 가버린 그쪽이 더 너무하다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원래 오는 사람은 잘 없었지만 그날 따라 더더욱 조용했다.
“선배”
그냥왔어.
“리즈 선배”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그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이제 희미해진 얼굴 위에 이름이 그려졌다.
“리즈, 선...”
목구멍이 막혀 버린듯 왈칵 토해내지 못한 이름에 눈물이 나왔다. 마른 땅위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외면하려 해서 미안해, 차라리 받아들였으면 편해졌을까, 봇물처럼 터져버린 지금까지 참아왔던 감정이 눈물로 새어나왔다.
“꽃,..준비 못했어”
프리드리히! 리즈가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멍하니 리즈를 쳐다보던 프리드리히가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뒤로 한발짝 물러나며 그를 제지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리즈의 말이 와다다 쏟아졌다. 절반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비교적 진심으로 화가 나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건 프리드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울컥 급작스레 올라오는 감정에 프리드리히는 그 손을 내쳤다.
“너 뭐하는 새끼야! 뭘 바라고 온거야!"
“선배...”
“왜...하필이면 이곳에”
리즈가 꺼지듯 말했다. 왜 하필, 이곳에, 그렇게 말하는 리즈의 목소리는 안타까울 정도였다. 왜 하필이곳일까, 프리드리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가 어딘진 모르지만, 자신이 죽었음을 생생히 기억하는 프리드리히는 적어도 좋은 곳 만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그래도...선배를 만나고 싶었어 한번만이라도 좋으니..만나고 싶다고...”
“..........”
“여기서 만나길 바란건 아니었어...그저 살아있다면, 죽기전에 한번만 만나고 싶다고”
그게 이루어 진거라고, 생각해.
그만큼 더 간절했던거야, 이곳에서 만큼은 만나지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보다 한번더 너를 만나고 싶다고, 그 생각이 더 간절했던거야. 그런거야 선배.
이미 일어난 일에 만약을 생각하는 것 만큼 쓸데없는건 없겠지, 하지만 선배가 에이스가 아니었다면 그런식으로 개죽음 당할 일은 없었을테지,
나와 만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항상 그 곳을 지옥같은 곳이라고 말했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위태위태한 사다리를 타고 있었거든, 하지만 그 지옥같은 곳에서도 웃고 떠들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있었어. 근데 지옥이라고 말하는 여기는 뭐가 다르지? 여전히 우리는 웃고 떠들고, 살아가고 있잖아. 아주 어쩌면, 거기가 더 지옥일지도 모른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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