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오나 연합왕국은 그란데니아의 병력 앞에 무너졌다. 커다란 요새도 오로르 부대의 장갑병도 그 막강한 힘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르세우스가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옥좌에 앉아 그들이 겁화에 타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쟁은 끝났다. 그것은 실로 따분하고 시시한 일이었다. 마르세우스는 구김살 하나 없는 웃음 지어 보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남자가 있었다. 독한 남자였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르세우스는 불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는 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끄는 것인지 남자는 불길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다. 어쩌면 가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토록 충성하고 마지않는 주군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참으로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연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이 부순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남자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았을 때 마르세우스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지은 표정은 절망이기도 했고, 슬픔이기도 했고, 때때로 그것은 살의를 품기도 했는데 그것은 아주 귀여운 수준이었다. 마르세우스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몸을 숙였다.
“감정은 패자에게서 보이는 결함이지” “…….” “나를 두려워하는군”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마르세우스는 살짝 짜증이 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남자는 한번 자신의 성에서 도망쳤다. 온갖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두려운 기색 하나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아 부를 수 조차, 찾을 수 조차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마르세우스는 왜 그토록 이 남자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몰라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말에 모순되는 말이니까,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은 달랐다. 그런 것에, 고작 감정이란 인간이 가지는 결함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설마 이 마르세우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결국,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르세우스는 커다란 할버드를 손에 그러쥐었다. 자네에게 실망했어, 어쩌면 자신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그 눈동자는 자신과 같은 동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탓하며 할버드를 높이 치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느리고 정확하게 남자의 목 위로 떨어졌다.
“두려움은…극복하지 않으면…안되겠지”
눈앞에서 사라진 남자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 와있었다. 짧지만 날카로운 검이 정확히 마르세우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힘없이 쓰러진 마르세우스를 보며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영 죽지 않을 것만 같던 불사의 황제가 자신의 손에 쓰러졌다. 그것도 정말로 허무하게, 이제는 모두 타 재로 변해버린 대지를 바라보며 몸을 숙인 남자는 그의 몸에서 검을 뽑아냈다.
“희망이 있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워 하지, 안 그래?”
그리고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남자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가 한번 죽어줬으니 이름 정도는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분명 자신의 눈앞에 있는 시체는 불사황제 마르세우스가 맞았다. 그렇지만,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서린 목소리는,
“그냥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면 좋아.”
마르세우스-영원한 불사황제는 죽지도 늙지도 않아, 정체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불사황제는, 마르세우스는 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