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장
2.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3.폐허가 된 성-보여줘
불편해
버스데이는 괜히 넥타이를 끌어내렸다. 목 끝까지 꽉 잠근 단추가 불편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안 어울려, 진한 초록색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 거기다 주황색 넥타이라니 누가 골랐는지.
의뢰였다. 지난번 요코하마 관광 추진회 영상이 꽤 잘 먹혀 이번에는 잡지를 만든다나, 버스데이는 처음에 거절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재밌어서 했지만, 두 번째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의뢰를 받은 것은 레시오였다. 왜냐고 묻기도 지쳤다. 레시오는 한 번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라고 나왔고, 이번엔 그 무라사키 조차 하겠다고 했으니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정장이라니 역시 거절할걸 그랬어. 버스데이는 밖에서 들리는 레시오 목소리에 대충 대답하곤 넥타이를 대충 둘러맸다.
“늦었어 버스데이. 벌써 무라사키와 나이스는 들어갔다고”
“그치만 넥타이 못 매겠는걸”
축 늘어진 넥타이를 보고서 레시오는 한숨을 쉬며 버스데이를 잡아당겼다. 넥타이가 목을 졸랐다. 켁, 버스데이가 죽는 소리를 냈다.
“이런거 하나 못해서 나중에 어쩔거야!”
“넥타이 하나 못 맨다고 죽지 않네요”
레시오가 버스데이를 한번 노려본 뒤 목뒤로 손을 넣었다. 목 카라를 편 후 넥타이를 바로잡곤 쭉 폈다. 버스데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레시오의 옷만 만지작거렸다. “고개 들어” 레시오의 말에 버스데이가 턱을 들고 레시오를 마주봤다.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넥타이핀까지 바로 꽂아준 레시오가 어깨를 한번 털고는 정장 단추를 꾹꾹 잠갔다. 버스데이가 금세 죽는 소리를 냈다.
“참아. 일이야.”
“그러게 안한다고 했잖아.”
“네가 일을 가릴때야?”
“그치만...”
새삼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레시오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버스데이는 웬만한 의뢰라면 다 참았다. 그 연극도 참았는데 이런 일에 불평을 부리다니 그 답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왜 그래?”
버스데이가 레시오의 물음에 잠깐 입을 꾹 다물더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 정장은 진짜 안 어울린단 말야”
덩달아 한숨을 쉰 레시오가 버스데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걱정마 잘 어울려”
“진짜?”
“내가 고른 거니까. 안 어울릴 리가 없잖아”
“레시오쨩이 고른거야?”
갑자기 밝아진 목소리에 레시오가 버스데이를 돌아봤다. 헤에, 웃은 버스데이가 안경을 올려 쓰더니 레시오를 앞질러 갔다.
“빨리 가자”
“하기 싫다며?”
“덕분에 의욕이 조금 생겼어”
“버스데이…”
그날은 정기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버스데이는 병원 로비에 앉아 지나가는 간호사들의 다리를 훑어보며 검진 결과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치의가 아닌 레시오가 버스데이 앞에 섰다. 짐짓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레시오를 보며 버스데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서류를 꾸긴 레시오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버스데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살쪘어”
***
때는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버스데이는 눈앞에 펼쳐진 음식을 보고 레시오를 봤다. 그렇게 하기가 수십번 결국 젓가락을 탁 소리나게 내려놓은 버스데이는 밥먹는걸 거부했다.
“밥 안먹으면 약 못먹잖아. 먹어”
“온통 풀 뿐이잖아!”
“건강을 위해서야.”
그랬다. 살이 쪘다는 걸 알자마자 식단을 바꾼 레시오는 버스데이의 앞에 온통 풀반찬을 내놓았고, 하루 이틀은 그냥 넘어갔으나 나흘이 되던 날 버스데이는 자신이 사육장의 토끼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냈으나 자신의 건강 때문이라는 말에 그냥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되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고기는커녕 고기 비슷한 음식도 보지 못했다.
“난 고기가 있어야 힘이 난단 말야!”
“헛소리 하지 말고 먹어”
“이러면 나 밥 안 먹을거야!!”
결국 단식 선언을 한 버스데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레시오 바보, 멍청이. 속으로 욕을 하던 버스데이는 주린 배를 쥐어잡곤 잠을 청했다.
***
“마스터 음식이 좀 이상한 것 같아”
“무슨 소리냐”
“난 분명 돈가스를 주문했는데 여긴 풀떼기뿐이잖아!”
포크로 파슬리를 푹 집으며 마스터 앞에 들이대자 마스터는 금세 싫은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레시오한테 들었다.”
“뭐?”
“너 살쪘다며.”
포크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버스데이가 노웨어 문을 쾅 열고 나갔다. 마스터가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산책! 이라는 소리만 들렸을 뿐 어디냐는 소리도 없이 버스데이는 노웨어를 벗어났다.
***
“무라사키 배고파”
“나도”
“어째 군식구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인데”
무라사키는 토끼 모양과 호랑이 모양의 접시에 볶음밥을 얹으며 안경을 올려썼다. 갑자기 쳐들어와 배가 고프다고 우는 버스데이를 보고서 마음이 약해진 것도 잠시. 테이블 위에서 수저를 들고서 탁탁 내리치는 버스데이와 그리고 언제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에 끼여있는 나이스를 보고서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밥은?”
“어제 저녁부터 쭉 굶었어”
“레시오는?”
“그 녀석 얘기는 말도 마”
버스데이가 수저를 들고서 얘길 시작했다.
“근데 네 키에 그 몸무게는 좀”
“그래, 레시오가 괜히 그런 말 하진 않았겠지”
결국 자기 편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입맛 배렸어. 버스데이는 다 먹지도 않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어. 인사도 잊지 않고서,
결국 갈 곳이 없어서 집에 돌아왔다. 문 열기 죽어도 싫었지만, 어째선지 같이 살게 되어서 결국 마주쳐야 했다. 현관문에 들어가자 아직 올 시간도 아니었는데 레시오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결벽증, 버스데이는 그리 생각하곤 아무렇게나 슬리퍼를 벗어놓고 거실을 살폈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한 버스데이가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레시오? 슬쩍 부르자 레시오가 고개만 돌려 왜 하곤 물었다.
“뭐 해?”
“저녁”
사실 대부분 저녁 담당은 버스데이였다. 레시오가 바빠서 라는 이유도 있었고, 요리 솜씨는 자신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저번 주는 정말 레시오가 들러붙어 감시를 했지만, 버스데이는 레시오 옆에 슬쩍 다가갔다. 맛있는 냄새,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보며 버스데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레시오를 올려다봤다.
“웬 고기야?”
버스데이가 식단을 바꾼다면 당연히 레시오도 바뀌었다. 상대가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앞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을 정도로 레시오는 무심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요 일주일 동안은 레시오도 같이 풀만 먹었다는 소리였다.
“가끔은 단백질도 섭취해야하니까”
“그래?”
“게다가”
레시오가 음식을 들어 하얀 접시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다른 접시는 풀 뿐이었다.
“넌 지금이 보기 좋아.”
“흐음”
버스데이가 시익 웃었다. 접시를 들고서 식탁에 내려놓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근데 일주일 만에 생각이 바뀐 것 같다. 레시오쨩?”
“안 먹는 것보단 났지”
이겼다. 버스데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때는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하늘은 높고, 나무는 색색이 단풍에 물들어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버스데이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처음 레시오와 만났을 때도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레시오가 '본 것'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우리 중에 버스데이의 병을 알고 있는 건 레시오나 눈치빠른 나이스 정도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무라사키는 나이스에게 들었을지도 모르지,
레시오는 말하고 싶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숨겨야 할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 사실이 버스데이의 프라이드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레시오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버스데이는 과연 얼마만큼의 상처를 받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레시오는 가끔 버스데이가 무너지는 상상을 한다. 병이 아닌 그의 견고하고 우뚝 솟은 프라이드가 무너지는 상상을. 하루하루를 만끽하느라 자신의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아 결국 기댈 곳도 없이 무너지는 그의 작은 등을 상상하다 결국 인상을 찌푸리곤 소파의 등받이에 푹 기댔다. 전신에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 버스데이의 병을 고칠 방법을 찾지도 못했는데 자신의 머리는 쉬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레시오는 컵을 유리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몰라도 눈앞에 버스데이가 "깼어?" 하며 어색하게 웃 었다.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자 바닥으로 담요가 떨어졌다.
"커피 마실래?"
"…응"
버스데이가 부엌으로 몸을 돌렸다. 시계를 보자 눈을 감은지 삼십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버스데이 언제 들어왔어?"
"한, 이십분 전에? 나보곤 감기 걸린다고 거실에서 자지 말라고 하던 레시오쨩이 거실에서 자고 있길래 얌전히 있었지"
커피를 내려주는 버스데이에게서 비누냄새가 났다.
"TV 켜도 되지?"
"어…응"
TV소음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소파에 푹 기대 정신 사납게 채널을 돌리던 버스데이가 얼마 못 가 한 채널을 선택해 시선을 고정했다.
"버스데이 요즘 아픈 덴 없지?"
"응"
"발작도 없고?"
"그렇지 뭐"
"검진때도 아무말도 안 하고?"
"레시오"
버스데이가 컵을 내려놓곤 레시오를 바라봤다. 선글라스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 화났을 것이다.
"넌 내가 아팠으면 좋겠어?"
어, 레시오는 살짝 입을 벌려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대답하지 못 했다. 무릎을 잡은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나는, 네가…"
나는 네가 많이 아팠으면 했다. 내게 기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너를 고칠 수 있는건, 너를 살릴 수 있는건 나뿐이라고, 그리고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네 옆에 마지막까지 있는 건 결국 나라고,
그러니 제발 숨기지 말라고, 숨기고 감추고 도망쳐서 결국 내가 손쓸 수 없는 곳까지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건강했으면 해서 물어보는 거야...저번처럼 숨겨서 병 키우지 말라고"
"저번에 겪어 봤으니 이번에는 안 그러네요. 레시오쨩"
"그래…."
그러나 결국 버스데이는 숨기고 말 것이다. 마음속 깊이 자신마저 알 수 없는 저 숲 어딘가 그것을 꼭꼭 숨겨두곤 절대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꼭 폐허가 된 성을 닮았을 것이다. 깎이고 마모되어 누구 하나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 레시오는 가끔 그 성을 들여다본다. 어디를 만지고 어디를 걸으면 그것이 무너질지 안다. 하지만 레시오는 그 성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가 한쪽 눈만 있다고 해서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버스데이의 폐허는 자신의 폐허와 닮아 있었다. 꼭, 썩어 문들어진 곳 까지 닮아 있었다.
결국 레시오는 성의 문을 닫았다. 진심을 보여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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