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다. 프리드리히는 그것이 꿈이라는 것은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그마한 손이 프리드리히를 이끌었다. 여기가 아니야,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너는 저곳으로 가야 해, 소녀가 손을 놓았다. 천천히 뒤로 물러선 소녀가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리드리히는 소녀의 양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서 기함했다.
-베른
미처 모두를 부르기도 전에 삼켜진 프리드리히는 다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 그래 프리드리히는 그것을 악몽이라 지칭했다. 채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난 프리드리히는 활짝 열려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새벽공기가 날카롭게 뺨을 스치고 지났다. 프리드리히는 한참이나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궁 뒤편에는 끝없이 펼쳐진 검은 숲이 있었다. 아무도 그 끝을 알지 못했으나, 돌아온 사람 역시 없어 아무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는 숲이었다. 낮게 울려 퍼지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프리드리히는 창문틀을 꽉 쥐었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슬픔인지 기쁨인지, 분노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은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기억이 희미하다. 프리드리히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눈을 떠보니 이 자리에 있었다. 자연스레 나라를 통치하고, 신하를 다스리고, 왕의 위엄을 내보였다. 하지만 항상 마음속에 떠도는 위화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맞지 않는 장소, 맞지 않는 자리, 맞지 않는 위치. 그랬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이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신하를, 나라를,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두고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책임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왕이 된 자로서 이들 모두를 이끌 책임이 있었다. 그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나라들은 이제 없었다. 찬란한 제국도, 수도 판데모니움도, 연합국도, 모두 얇은 책 사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은 이제 프리드리히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대, 그것은 실로 고독이었다.
소용돌이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백성들이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군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왕이시여, 전쟁이 일어날 것 입니다.
몇백 년 전 레지먼트라 불리는 성기사들에 의해 소용돌이는 소멸하고, 레지먼트 역시 그 소용돌이와 함께 소멸하였다. 프리드리히는 그것의 끝을 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산증인이었으니까. 아무리 기억이 희미해지고 지워진다 한들 그것을 잊을까 보냐, 프리드리히의 왕관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번에도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갈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모든 것의 끝.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끝낼 것이다. 그것이 왕의 책임, 자신의 의무. 살아난 대가. 수많은 사람이 죽겠지. 아마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소용돌이에 대해 무지하다. 자신이 입대한 나이보다 한참 어린 나이의 소년들을 보며 프리드리히는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과거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들 모두를 살릴 것이다. 희생되는 것은 자신으로 충분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프리드리히는 더는 꿈을 꾸지 않았다. 검은 숲의 울음소리가 더더욱 커질 때. 프리드리히는 모두의 앞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기억이 스멀스멀 밀려들어 온다. 어쩐지 목소리가 들뜬 것도 같았다. 엄숙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온 나라에 울려 퍼졌다.
"우리가 모두 굳은 결의를 하고 신념을 잃지 않는다면……신의 은총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